전기톱까지 들이대며 2억대 갈취
▲ 공포영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경찰에 따르면 이 여성은 ‘그동안 생명을 위협할 수준의 폭력을 행사, 사업자금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뜯어갔다’며 상대 남성을 신고했다. 반면 상대 남성은 ‘사소한 폭행은 있었지만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한 상해를 입힌 일은 없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경찰 수사 결과 이 여성의 주장은 상당 부분 사실로 밝혀졌고 결국 상대 남성은 하루 뒤인 지난 2일 갈취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2년 가까이 동거해왔다는 두 사람 사이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통나무집을 주로 건축하는 전경락 씨(가명·37)와 백화점 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주순이 씨(가명·39)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 가을께. 당시 이혼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방황하던 전 씨와 그동안 혼자 살아온 주 씨는 우연히 안면을 익힌 이후 급속도로 가까운 사이가 된다. 주 씨가 전 씨보다 두 살 위였지만 서로 마음 둘 곳이 없어 외로웠던 이들은 이내 동거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의 만남에 대해 경찰은 “전 씨는 ‘주 씨가 통나무집과 관련된 상담을 해달라는 명목으로 사무실에 찾아오는 등 먼저 접근했다’고 하고 주 씨는 ‘전 씨가 내가 일하는 매장에 일부러 와서 먼저 호감을 표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이 알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양측의 말이 달라 어느 쪽 말이 진실인지 알 수 없지만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동거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급속도로 가까워진 것은 사실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급한 인연’이 화를 부른 것일까. 서로 뜻이 맞은 탓에 서둘러 시작한 동거였지만 행복도 잠시, 이들의 생활은 평탄하지 못했다. 문제는 돈이었다.
동거한 지 얼마 후부터 전 씨는 주 씨에게 사업자금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건축업을 하는 전 씨는 자신의 사업구상에 대해 설명하며 그때마다 주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사업을 하는 데 돈이 필요하다’는 전 씨의 간곡한 부탁에 주 씨는 처음에는 선뜻 돈을 내줬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전 씨는 점점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돈을 요구하는 빈도도 잦아졌다.
돈 문제로 인해 두 사람이 다투는 일이 늘어나면서 갈등의 골도 날로 깊어지게 된다. 한두 번도 아니고 잊을만하면 되풀이되는 전 씨의 돈 요구는 주 씨로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또 적은 돈도 아니고 최소 수백만 원 이상 되는 돈을 구하는 일도 주 씨로서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돈이 없다’는 주 씨와 ‘돈을 내놓으라’는 전 씨의 싸움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전 씨는 주 씨에게 폭력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백화점에서 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주 씨의 수입은 결코 넉넉한 수준이 아니었다. 근근이 생활을 꾸려나가던 주 씨에게 큰돈이 생길 리도 만무했다. 그러나 전 씨의 무자비한 폭력과 협박 앞에서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주 씨는 그동안 어렵사리 모아놨던 돈을 모두 전 씨에게 갖다주었다. 그 돈마저 바닥나자 주 씨는 자신의 가족들에게까지 돈을 빌려 전 씨에게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전 씨의 돈 요구는 좀처럼 멈출 줄 몰랐다. 이를 거부하면 그때마다 끔찍한 폭행이 가해졌다. 돈을 뜯어내기 위한 전 씨의 행동은 단순한 폭행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초기에 주먹질로 그쳤던 전 씨의 행동은 날이 갈수록 엽기적인 수준으로 변했다. 급기야 전 씨는 통나무를 자를 때 쓰는 전기톱을 주 씨에게 들이대며 위협을 가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톱날과 귀청을 뚫는 듯한 기계음은 주 씨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금방이라도 베어버릴 듯 전기톱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전 씨의 행동에 주 씨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돈을 구해다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전 씨가 뜯어간 돈은 모두 2억 원 대.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경찰 조사결과 전 씨는 주 씨의 머리와 집안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며 난동을 부리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이었다. 주 씨는 전 씨가 자신에게 휘발유를 뿌리는 과정에서 휘발유가 눈에 들어가 각막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고 했으나, 전 씨는 휘발유병 마개를 따다가 우연히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의성은 없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경찰 조사결과 전 씨는 이미 폭력 등으로 여덟 차례나 전과가 있는 인물로 동거에 들어간 이후 주 씨에게 수시로 폭행을 가한 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이번 사건을 단순히 돈 문제가 얽혀서 발생한 남녀간의 애정문제로 여기기는 어렵다는 것이 경찰의 의견이다.
경찰 관계자는 “전 씨의 폭행으로 인한 것이라며 주 씨가 경찰에 증거로 제시한 병원 진단서만 모두 5장에 달한다. 이는 그간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잦은 폭행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폭행을 당하고 살해 협박까지 받으면서도 주 씨는 왜 이제야 신고하게 된 것일까. 무려 2년 가까이 시달린 끝에 자신의 동거남을 신고한 주 씨는 “여태까지는 사업자금 명목으로 준 돈 문제도 있고 해서 참고 살았지만 전 씨의 폭행과 협박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달해 신고하게 됐다”고 경찰에 하소연한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늦은 나이에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의 관계는 폭행과 협박으로 얼룩진 채 여성 측의 고소로 막을 내리게 됐다. 성급하게 맺어진 두 사람의 악연이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긴 채 경찰에 의해 간신히 정리된 셈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정읍경찰서 관계자는 “최근 들어 부부나 동거인들 간에 이런 류의 사건이 급증하고 있다. 사랑하던 사이였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온갖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사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좋아서 살다가도 원수보다 못한 관계로 헤어지는 그 속내를 어찌 알겠느냐”며 씁쓸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수향 기자 ls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