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정 나눈 ‘도사님’은 유령?
▲ 전북 군산에서 유명 여성역술인이 수십 억 원을 빌리고 잠적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피해자도 수십여 명에 이르고 있다. 사진은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없음. | ||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이 역술인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채고 그를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지만 문제는 정작 그의 신상에 대해 아는 이들이 아무도 없다는 점이다. 그의 이름이 ‘최 아무개’라는 일부 피해자들의 주장도 있으나 확인 결과 이마저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역술인이 잠적한 때는 지난 7월 25일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가 운영하던 철학관 주변의 이웃들은 역술인이 휴가를 떠났다고도 하고 이사를 갔다고도 전하고 있다. 이웃의 말대로 그가 휴가를 떠난 것이 사실이라면 한시름 놓을 일이지만 만약 잠적한 것이라면 수많은 이들이 금쪽 같은 돈을 잃고 넋을 놓아야 할 판이다.
역술인의 행방을 두고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사건의 여파는 지역사회를 들썩이고 있다. 문제의 역술인에게 돈을 빌려 줬다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막을 알아봤다.
지난 7월 31일 전주지방검찰청 군산지청의 민원실에는 20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이들은 모두 한 역술인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고소장을 접수하러 온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문제의 역술인이 사채자금 또는 곗돈 등의 명목으로 거액의 돈을 피해자들로부터 받아 챙기고 잠적했다는 것.
지금까지 파악된 피해자 수만 해도 17명에 이르고 이들이 주장하는 피해액을 합친 금액은 무려 22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피해액수는 앞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날 민원실에 모여든 이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이 역술인은 군산에서 18년간 ○○철학관을 운영해왔음에도 사람들에게 단지 ‘선생님’으로만 알려졌을 뿐 그밖에 실명이나 나이 등 인적사항은 전혀 밝혀진 바가 없다. 그나마 일부 단골고객들에게 알려진 사항이 있다 해도 확인 결과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나이 역시 주위에 57세로 알려져 있었지만 이마저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
피해자들에 따르면 문제의 역술인은 돈을 빌리는 과정에서 일부 피해자들에게 차용증을 써주기도 했으나 이 차용증에 적힌 이름 또한 가짜인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몇몇 피해자들은 차용증에 적혀 있는 이름이 이 역술인의 여동생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생님’으로 불린 이 여성 역술인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이들로부터 거액을 챙길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해 피해자들의 주장을 들어 보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40~50대의 중년 여성들이었으며 개중에는 70대 할머니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전하는 ‘사연’은 제각각이었다. 저마다 ‘선생님’에게 돈을 빌려주게 된 이유가 다 달랐던 것이다. 계모임에 뭉칫돈을 넣었다가 날린 경우도 있었고 개인적인 부탁으로 돈을 빌려준 경우, 또 사채놀이를 하고 있는데 투자를 하면 이자를 몇 배로 늘려 주겠다고 해서 돈을 빌려준 경우도 있었다.
자신의 신원을 밝힐 수 없다는 한 중년 여성은 “○○정계라는 계모임을 통해 곗돈으로 낸 돈 2000여 만 원을 모두 날리게 생겼다”며 “그 사람(역술인)을 찾아 돈을 받아낼 수 있을지 너무 걱정이 돼 며칠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정계’는 군산의 ‘○○정’이라는 식당에서 계를 결성한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50대 중반의 A 씨(가정주부)는 “한 푼 두 푼도 아니고 3000만 원이나 날렸다”며 “사채놀이를 하는데 자금을 대면 이자를 몇 배로 불려 주겠다고 해서 믿고 돈을 줬는데 이런 꼴을 당하고 말았다”고 땅을 쳤다.
여기서 떠오르는 한 가지 의문은 피해자들이 신원조차 제대로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거금을 선뜻 빌려 줄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피해자들에 따르면 그들이 예의 역술인을 철석같이 믿고 거액의 돈을 맡긴 까닭은 다름 아닌 ‘선생님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다. 그 ‘신뢰’란 이 역술인이 18년간 한자리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며 ‘명성’을 쌓아왔던 데 기인하고 있었다.
또 다른 피해자는 “몇 해 전 일이다. 선생이 내년 4월경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해서 긴가민가하고 있었는데 그가 예견한 그해 그달에 정말 집안에 크게 좋은 일이 있었다”며 “이런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그의 말을 안 믿을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피해자들은 또 이 역술인이 오래전부터 사채놀이를 해오면서 사채자금을 대는 사람에게 실제로 이자도 꼬박 꼬박 지급했다고 전했다.
‘선생님’의 신뢰 쌓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평소 테이블 위에 돈다발을 수북이 쌓아놓고 자신의 자금력을 방문객들에게 은근히 과시했고, 테이블 아래에는 유명 사립대인 Y대 총장, 사회운동가 등 저명인사들의 인터뷰가 실린 월간지 몇 권을 쌓아 두고 있다가 이를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친인척이라고 속였다.
피해자들은 “그(역술인)는 자신을 서울 소재 명문여대 출신이라고 소개했다”며 “자신을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모두 명문대 출신이고 이 때문에 저명인사들과 많이 알고 지낸다고 자랑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 역술인은 예사롭지 않은 점술로 많은 고객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검·경 고위 간부를 비롯한 고급 공무원들도 일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고위 공무원들은 주로 진로 수정이나 승진 문제로 그를 찾았다고 한다.
이 역술인이 이렇게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지난 6월경부터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피해자들 중 사채자금을 빌려줬다는 이들은 “그동안 꼬박꼬박 나오던 이자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액수가 줄더니 6월 초순부터는 아예 이자가 지급되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역술인)이 6월부터 집중적으로 돈을 여기저기서 빌린 것 같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때부터 돈을 챙겨 잠적하기로 작심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해당 역술인이 실제로 잠적했는지 여부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기도 하다.
피해자들 중 일부는 아직도 그의 잠적 여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철학관 이웃의 말대로 ‘선생님은 지금 휴가 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정말 휴가 중이고 다시 사람들 앞에 나타난다면 이번 ‘역술인 사기사건’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에 비춰볼 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최초로 ‘역술인의 증발’을 확인한 50대 중반의 B 씨는 누구보다 그가 잠적했다는 데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이렇다. 먼저 역술인이 운영해온 철학관이 7월 3일자로 매각됐다는 사실이다. 만약 휴가를 간 것이라면 철학관을 매각하고 갔을 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그랬다는 것은 어딘가 석연치 않다는 것.
또 7월 24일자로 철학관 전화도 끊어졌다. 역술인이 잠적한 때는 7월 25일로 추정되고 있다. 더욱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는 대목은 이 역술인의 어머니 집전화도 함께 끊어졌다는 점이다. 그의 어머니도 잠적했는지 여부는 확실치 않으나 연락은 두절된 상태라는 것이다.
이에 B 씨는 이런 상황을 다른 피해자들에게 알렸고 그제야 이 소식을 들은 피해자들이 부랴부랴 역술인의 ‘남편’ E 씨를 수소문해서 찾아냈다.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것은 “나는 그 여자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말뿐이었다.
피해자들은 “그의 남편이라는 사람을 조사해 보니 정식부부가 아니라 사실혼 관계인 동거남이었다”며 “그런데 E 씨는 직업도 없는 사람이 4500㏄의 최고급 차를 몰고 다녔다. 도대체 그가 무슨 돈이 있어 그렇게 할 수 있겠나. 증거는 없지만 전부 그 사람(역술인)이 우리 돈 뜯어서 사준 게 틀림없다”며 분개했다. 이들에 따르면 문제의 역술인도 최고급 승용차 에쿠스를 타고 다니는 등 초호화 생활을 해왔다는 것.
한편 이날 고소장을 접수하기 위해 몰려든 이들 중 일부는 고소장 접수를 결국 포기해 눈길을 끌었다. 피해자들 중 3명은 각각 3000만 원, 3억 원, 3억 6000만 원씩의 돈을 역술인에게 빌려줬지만 “주위 사람 이목도 있고 그가 정말 잠적한 것이라면 돈을 찾기는 힘들 것”이라며 “뭐 밟은 셈 치겠다”는 말을 남긴 채 민원실을 떠났다.
윤지환 프리랜서 tangohun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