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칼질…유유히 빠져나간 살인마
▲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원남동 빌딩. | ||
이들 일련의 노인 피살사건이 일어난 지 6개월여가 흐른 2004년 5월, 남편과 사별한 한 60대 노파가 서울 원남동 자택에서 처참하게 살해된 사건이 또 다시 발생했다. 경찰은 피해자 주변에 대한 탐문 수사를 실시하는 한편 앞서 벌어진 사건들과의 연관성을 찾으려 했으나 단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이 사건은 단순 강도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범행수법이 너무도 끔찍했다. 한때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자백’으로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보였지만 경찰은 그를 진범으로 기소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그후 이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는 상태다. 과연 노파의 죽음 뒤에는 어떤 진상이 숨어 있는 걸까. 2년 반 전 부유층 노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원남동 노파 살인사건’ 속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사건은 지난 2004년 5월 22일 오전 11시 40분경 서울 종로구 원남동의 한 빌딩 5층에서 건물주인 김 아무개 씨(여·당시 65세)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가스검침원에 의해 발견된 김 씨는 목과 가슴, 복부 등을 예리한 흉기로 무려 28차례나 찔린 채 죽어 있었다. 방에는 금품을 노린 듯 장롱을 뒤진 흔적이 있었으며 김 씨의 휴대전화와 손가방, 롤렉스 시계가 없어진 상태였다.
경찰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 방향을 잡아나갔다. 얼핏 보기에 이 사건은 금품을 노린 강도살인으로 여겨졌다. 즉 금품을 훔치기 위해 노인 혼자 있는 집에 들어온 강도가 집주인과 실강이를 하는 과정에서 살인을 저지르게 된 경우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단순히 강도사건으로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다. 특히 경찰은 범인이 김 씨를 무려 28차례나 난자했다는 점에 주목, 원한 살인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단서들을 토대로 사건의 성격 및 범인의 윤곽을 추적해나갔다. 하지만 현장에는 피해자 김 씨의 혈흔이 낭자하고 방안을 뒤진 듯 물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을 뿐 범인을 특징지을 만한 구체적인 단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특히 목격자가 없다는 것은 수사에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 두 달에 한 번 방문하는 가스검침원이 올 때까지 이웃들조차도 김 씨의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경찰 수사는 자연히 주변 인물 및 비슷한 범행 전력이 있는 전과자에 대한 탐문수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부검 결과 김 씨가 살해된 시각은 이날 오전 9시에서 9시 30분께로 추정됐다. 김 씨는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으나 당시 아들은 출근하고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이 무렵은 김 씨가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동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 씨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자택 인근의 스포츠센터와 공원에서 운동을 해왔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날에도 김 씨는 동호회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마치고 귀가했다는 것.
범인은 김 씨를 기다리고 있다가 집안에 들어서는 김 씨를 급습했거나 김 씨로 하여금 스스로 문을 열게끔 했을 것이다. 김 씨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가스검침원이나 배달원 등으로 위장했을 수도 있었다.
사건 현장을 살펴보던 경찰은 김 씨가 살던 5층의 출입문 바깥에서 김 씨의 혈액을 발견했다. 하지만 김 씨의 사체가 발견된 곳은 김 씨 집의 안방이었다. 이는 출입문 밖에서 이미 범인이 김 씨에게 흉기를 휘둘렀거나 범인과 김 씨 간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경찰은 범인이 귀가하던 김 씨를 기다리고 있다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김 씨를 급습, 반항하는 그를 흉기로 찌른 뒤 안방으로 끌고가 다시 무자비하게 살해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 경찰은 사람들의 눈에 쉽사리 띌 수 있는 오전 시간대에 범행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범인이 김 씨의 집안 사정과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었거나 사전에 현장을 여러 번 답사해 침입 및 도주 경로를 미리 파악해두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은 좁은 골목길을 통해 김 씨의 건물로 침입한 범인이 범행 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유유히 달아났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범행시간도 일부러 가족들이 출근하고 노인이나 부녀자들이 집을 보고 있는 오전 시간대를 택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 경찰은 그간의 수사결과를 토대로 몇 가지 가능성을 추리했다.
먼저 면식범에 의한 범행일 가능성이었다. 사건 현장의 흔적으로 볼 때 범인은 그 시각에 김 씨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김 씨를 기다리고 있다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건은 단순 강도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이 아니라 김 씨의 사정을 잘 아는 면식범에 의한 계획적인 범행이라는 얘기가 된다. 아들이 함께 있는 저녁이나 한밤중이 아니라 김 씨가 집 안에 혼자 있는 오전 시간대에 범행이 이뤄진 점도 범인이 김 씨의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인물일 개연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두 번째는 김 씨의 재산을 노렸을 가능성이었다. 탐문 수사 결과 김 씨는 사별한 남편으로부터 수십억 원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상태였다. 경제적으로 남부러울 것 없던 부유한 노인이었던 것이다. 당시 사건이 발생한 빌딩 역시 김 씨 앞으로 되어 있었는데 시가가 10억 원대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범인이 김 씨를 위협, 거액을 요구하다 이를 거절하자 살해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또 김 씨와 채무관계에 있던 누군가가 김 씨를 위협하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벌어져 무자비한 살인으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다음은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김 씨를 무자비하게 난자해 살해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단순히 금전을 노린 범행이었다면 김 씨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흉기를 휘두를 이유가 만무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김 씨가 반항을 하더라도 한두 번 찌르고 달아나는 게 일반적인 강도범의 심리였다. 즉 살인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단순 강도였다면 설사 김 씨를 해치게 됐더라도 금품을 챙겨 재빨리 현장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을 터였다.
▲ 유영철 | ||
마지막은 단순 강도를 위장한 청부살인일 가능성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범인이 값나가는 금품을 뒤진 흔적이 역력했다. 경찰은 범인이 김 씨를 살해한 후 장롱을 뒤지는 등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 단순 강도에 의한 범행으로 위장하기 위한 ‘계략’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때문에 경찰은 청부살인일 가능성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해나갔다.
경찰은 김 씨의 가족 및 주변 인물들에 대한 탐문 수사를 실시하는 한편 김 씨가 생전 자주 접촉했던 사람들을 상대로 사건 전 김 씨의 언행 등에 대해 알아봤지만 특이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 김 씨와 평소 안 좋은 사이로 지냈거나 금전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들을 찾는 데 주력했으나 이 역시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경찰은 또한 김 씨의 복잡한 가계도에 주목,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가족들을 상대로 조심스레 내사를 벌이기도 했다. 특히 지난 2001년 사망한 남편의 전 재산이 김 씨에게로 이전되는 과정에서 자식들과 어떤 마찰이 있었는지도 조사했다. 하지만 범행을 의심할 만한 단서는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의 골치를 썩이던 이 사건은 지난 2004년 7월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붙잡히면서 잠시 해결의 빛이 보이는 듯했다. 유 씨가 검거 직후 원남동 노파 살인사건도 자신의 범행이라고 진술했던 것이다. 당시 유 씨는 “원남동 5층 주택에 침입해 노인을 죽였다”며 건물의 구조 및 출입문의 방향, 침입 경로 등에 대해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유 씨의 그간 전력 및 범행 수법 등을 토대로 원남동 사건과 유 씨와의 연관성을 찾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경찰은 유 씨가 원남동 살인사건의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간 유 씨가 부유층 노인을 주요 범행 타깃으로 잡았던 점, 목 부위를 집중적으로 28차례나 찌르는 잔인한 수법, 현장에 지문과 범행도구 등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점 등이 유 씨의 범행수법과 상당히 흡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유 씨 사건을 수사하던 혜화경찰서(당시 동대문경찰서) 관계자는 “다른 부유층 노인 살해사건이 단독주택에서 발생했지만 원남동 사건은 다세대주택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또 유사 사건과 6개월 이상 시간 간격이 있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범행수법이 잔혹하다는 점 등으로 미뤄 유 씨가 연루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경찰은 서울구치소로 유 씨를 찾아가 여러 차례에 걸쳐 범행 관련 여부를 추궁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찰은 유 씨로부터 ‘시신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세탁세제를 뿌렸다’ ‘당시 훔친 현금 100만 원을 인근 은행에 입금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듣게 된다. 또 현장에서 사라진 김 씨의 롤렉스 시계에 대해서도 유 씨는 ‘감정을 받았더니 모조품이라 해서 버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 씨의 진술을 토대로 원남동 살인사건의 수사에는 탄력이 붙었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사라진 김 씨 휴대폰의 마지막 발신이 사건 당일 오후 10시에 유 씨의 거주 지역인 마포구 공덕동에서 이뤄졌다는 점, 유 씨가 이날 자신의 은행 계좌에 100만 원을 입금시킨 사실 등을 파악하고 유 씨를 원남동 사건의 진범으로 확신했다. 사건 현장에 남아 있던 255㎜짜리 범인의 족적이 유 씨의 신발 크기와 일치한다는 점도 경찰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근거였다.
하지만 그후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유 씨는 진술을 번복하기에 이른다. 유씨는 ‘했다’, ‘안 했다’를 반복하거나 ‘그 사건에 대해서만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등 알쏭달쏭한 입장을 보였다. 또 경찰의 집중 추궁에 여유만만하게 “증거를 대보라”며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고 한다. 유 씨의 돌변한 모습에 경찰은 당황하면서도 진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급기야 경찰은 2005년 2월 24일 “유 씨가 지난해 5월 말 서울 종로구 원남동에서 60대 여성을 살해하고 금품을 훔친 혐의가 확인됐다”며 “그를 기소하도록 검찰에 건의할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문제는 증거물의 확보였다. 경찰은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물론 피해자 김 씨의 휴대폰과 시계 등 결정적인 물증을 전혀 확보하지 못해 유 씨를 원남동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기소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반이 지났지만 작년 말 수사본부가 해체된 이후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된 것이 없는 상태다. 혜화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당시 사건 담당자들 대부분이 바뀐 상황”이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사건기록을 살피는 등 모든 정황과 단서들을 되짚어보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며 답답한 심정을 내비쳤다.
쉽게 해결될 듯도 보였던 원남동 노파 살인사건은 이제 무수한 추측만 남긴 채 먼지 쌓인 미제 사건 파일 속으로 다시 들어갈 운명에 놓여 있다. 과연 한때의 ‘자백’처럼 유 씨가 노파를 죽인 것일까, 아니면 진범이 아직 망각의 베일 뒤에 숨어 있는 것일까.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