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진 휴대폰 흔적만 남아… 되살아난 ‘악몽’
▲ 지난 9일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실종된 여성들을 찾기 위해 비봉면 논두렁 등지에서 경찰이 수색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
물론 실종자들의 생사가 불확실한 현 상황에서 납치나 살인과 같은 범죄와 연관짓는 것은 성급한 면이 있다. 경찰 역시 아직까지는 실종자들의 생존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그들의 행방을 찾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실종자들이 사라진 지 최대 한 달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단서조차 발견되지 않고 있는 점 등으로 인해 사실상 부녀자를 노린 납치 범죄 쪽으로 가닥이 잡히는 분위기다.
이번 실종 사건들이 몇 가지 면에서 그간 화성지역에서 발생한 살인사건들과 유사하게 흘러가고 있어 사태는 더욱 심상치 않다. 경찰 내부에서도 “단정하기엔 이르지만 단순 실종으로 보기에는 뭔가 조짐이 좋지 않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1986~1991년 열 차례에 걸쳐 발생한 ‘화성 연쇄살인사건’과 2004년 10월 실종 46일 만에 주검으로 발견된 ‘여대생 노 아무개 양 실종 피살 사건’ 발생 지점을 10㎞ 반경에 두고 일어났다는 점에서 공포감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과연 또 다른 ‘살인의 추억’이 시작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나친 기우에 불과한 걸까.
지난해 12월 14일 경기도 안양에 거주하는 A 씨(45)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던 A 씨는 실종 전날인 13일 오후 8시 50분경 서울에 사는 딸과의 전화통화에서 “금정역 근처 먹자골목에 있다”며 평소와 다름없이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A 씨는 이날 새벽 4시경 군포시 금정역 인근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했다. 그후 A 씨의 모습은 홀연히 사라졌고 그의 휴대전화는 화성시 비봉면 자안리 부근에서 꺼진 것으로 확인됐다.
미귀가자 신고를 받은 경찰은 A 씨가 과거에도 몇 번 가출을 한 적이 있다는 점, 재혼을 약속한 남성이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이 사건을 애초 개인 사정에 의한 단순가출로 여겼었다. 하지만 재혼을 앞둔 A 씨가 새벽에 통화를 한 인물이 전에 알던 남성이라는 점, 또 두 사람 간에 금전거래가 있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사건은 잠시 다른 양상을 띠는 듯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 남성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 결과 아무런 특이점도 발견되지 않은 상태다.
경찰이 보다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낀 것은 A 씨가 실종된 지 열흘 후인 12월 24일 또 한 명의 부녀자가 실종됐다는 신고가 들어오면서부터. 두 번째 실종자는 수원에 거주하는 B 씨(37)로, 그녀 역시 노래방 도우미였다.
B 씨는 당일 새벽 2시경 집을 나선 뒤 여지껏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사건 당일은 모두가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 있던 날로 B 씨는 오전 2시 25분경 가족에게 “남자친구와 제부도에 놀러간다”는 음성메시지를 남겼다. 하지만 이후 B 씨는 연락이 끊겼고 그녀의 휴대전화는 비봉면 서해안 고속도로 비봉IC 인근에서 꺼진 것으로 확인됐다. 앞서 실종된 A 씨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진 지점과는 불과 1㎞ 정도 떨어진 곳이다. 경찰은 수원에서 제부도로 가려면 비봉면을 거쳐야 하는 점을 감안, 그의 남자친구를 일차적으로 조사했으나 “그날 B 씨를 만나지 못했다”는 진술만 돌아왔을 뿐 별다른 혐의점을 찾아내지 못했다.
경찰은 두 실종자의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노래방 도우미를 노린 의도적 범행일 가능성에도 무게를 두고 두 실종자들과 통화한 인물들 중 동일인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였지만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또 한 명의 여성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세 번째 실종자는 화성시 신남동의 한 업체 경리부에서 근무하던 C 씨(53). 경기 군포에 거주하는 C 씨는 3일 오후 5시 30분께 회사에서 퇴근길에 나섰다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B 씨가 실종된 지 또 ‘열흘’ 만이었다. 열흘 간격으로 세 명의 부녀자들이 잇따라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C 씨의 휴대전화 역시 화성시 비봉면 일대에서 전원이 꺼진 사실이 확인됐다. C 씨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인물은 같은 교회 성가대원으로, C 씨의 실종과 관련된 특이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C 씨는 보통 오후 5시 30분경 회사를 나와 마을버스와 시외버스를 이용해 퇴근길에 올랐는데 독실한 기독교신자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마다 7시 저녁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C 씨가 실종된 당일은 마침 수요예배가 있던 날로 가족들도 C 씨가 예배에 참석한 줄 알고 기다렸다는 것.
C 씨가 근무하던 직장은 마을버스가 30분 간격으로 다닐 만큼 한적한 곳에 위치해 있다. 경찰은 ‘C 씨가 예전에도 예배시간에 맞추기 위해 낯선 사람의 차를 타고 버스터미널까지 간 적이 있다’는 가족들의 말에 따라 버스 시간을 놓친 C 씨가 이번에도 모르는 사람의 차를 얻어 타고 가다 변을 당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수사를 벌이고 있다.
이 같은 세 건의 연이은 실종사건에서 강력범죄의 조짐이 짙어지자 최근 경찰은 전담 수사팀을 구성해 본격 수사에 나선 상태. 도대체 이 여성들을 누가 왜 어디로 데려간 것일까. 12일 현재까지 확인된 수사 진행 상황과 의문점 등을 중심으로 연쇄 실종 미스터리에 한 걸음 다가가보자.
먼저 주목할 부분은 세 명의 실종자들의 휴대전화가 꺼진 지점이 모두 화성시 비봉면 일대라는 점이다. 실종자들은 안양과 수원, 군포 등 모두 다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화성에 소재한 직장을 다니던 C 씨를 제외하면 화성에 연고가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C 씨 휴대전화의 전원이 꺼진 비봉면 양노리 일대는 앞서 A 씨의 휴대전화가 꺼진 비봉면 자안리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점이다. 또한 12월 24일 실종된 B 씨의 휴대전화가 꺼진 비봉 IC와도 불과 1㎞ 떨어져 있는 곳으로 세 명의 실종자들의 휴대전화가 꺼진 지점은 모두 비봉면 일대 반경 2㎞ 내외였다.
▲ 실종된 A 씨(왼쪽)와 C 씨를 찾는 전단. | ||
그렇다면 이들 여성의 휴대전화가 모두 비봉면 일대에서 꺼진 이유는 무엇일까. 경찰은 이들 여성이 비봉면에 자의적으로 갈 일이 없다는 점에서 누군가 실종자들을 납치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사라진 세 여성 모두 실종의 원인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도 이번 사건에서 흡사한 점이다. 실종자들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한 결과, 경찰은 아무런 특이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 여성들은 가출할 이유가 없었을 뿐 아니라 치정이나 채무관계에서도 특별한 문제가 드러나지 않아 더욱 의문을 더했다.
통상적인 납치의 ‘징후’가 전혀 없었다는 것도 이번 사건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경찰은 실종자들이 금품을 노린 강도에게 납치됐을 가능성 때문에 이들의 금융거래내역을 조사했지만 특이한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실종자 가족들에게 한 통의 협박전화도 걸려오지 않았다. 경찰이 이번 사건을 돈을 노린 범행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 수사 관계자는 “이번 사건이 단순 실종이 아니라 범죄 사건이라면 범인은 분명 혼자 있는 여성을 타깃으로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귀띔했다.
이번 연쇄 실종 사건이 이전에 발생했던 화성 여대생 살인사건과 몇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실종자들은 모두 실종 후 휴대전화의 배터리가 분리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3명 중 2명이 안개가 짙게 드리운 수요일 새벽에 실종됐다. 2004년 실종 46일 만에 화성의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여대생 노 아무개 양이 실종된 날도 안개 낀 수요일 밤이었다. 또한 노 양의 휴대전화 역시 실종 직후 배터리가 분리됐다. 노 양이나 실종자들은 모두 실종 전 지인이나 가족과 통화를 하는 등 신상에 특별한 문제나 이상징후가 발견되지도 않았다.
끝으로 짚어봐야 할 것은 동일범에 의한 범행 가능성이다. 이번 연쇄 실종사건에서 이상한 점은 불과 한 달 새에 세 명의 여성이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목격자나 단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각기 다른 범인에 의한 납치극이라면 적어도 조그만 차이점이나 흔적이라도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실종자들은 마치 같은 수법에 당한 것처럼 누구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졌다. 만약 납치가 확실하다면 범인이 치밀한 계획하에 완전범죄를 추구하는 상당한 지능범이라는 얘기다.
경찰은 실종자들의 거주지가 모두 다르다는 이유로 범인을 한 명으로 단정짓지는 않고 있지만 열흘 간격으로 중년 여성을 노린 정황과 휴대전화가 모두 비슷한 지점에서 전원이 꺼진 점으로 추측해볼 때 동일범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특히 경찰은 외지인이 비봉면 일대를 능수능란하게 이동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범인이 화성지역 일대의 지리에 밝은 인물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각에서는 성범죄자나 정신이상자 혹은 여성증오자의 범행일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다. 돈을 목적으로 납치했다면 신용카드나 현금카드 인출 내역이 있어야 하지만 실종자들의 금융거래내역은 깨끗했다. 실종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성폭행을 동반한 범행일 경우 살인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경찰은 더욱 긴장하고 있다. 특히 실종자 중 2명이 노래방 도우미로 일했다는 사실은 범인이 특정 직업층의 여성에 대해 원한이 깊은 인물일 가능성에도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실종자들의 주변 인물들을 탐문 수사한 결과 이들 여성에게 원한을 맺을 만한 사람이나 특별한 혐의점을 가진 인물은 드러나지 않았다. 실종자들이 낯선 이의 범행에 의해 희생됐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는 제3자를 범행대상으로 삼은 것은 과거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였다. 이번 사건에서 수많은 여성들의 목숨을 앗아간 화성 연쇄살인마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현재 수사의 초점은 크게 두 가지다. 즉 이번 실종사건이 동일인의 범행인지 여부와 이전의 화성 살인사건들과의 연관 가능성이 그것이다. 경찰은 수사진행 사항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고 있지만 여대생 노 양 실종피살사건과 비슷한 방향으로 사건이 진행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분위기다.
특히 경찰은 ‘화성발 살인의 악몽’이 또 다시 시작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에 대해서는 적잖이 불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경찰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 지점이 이번 사건들과 모두 10㎞ 정도 떨어져 있다는 점을 이유로 무관함을 강조하지만 주민들의 불안감을 누그러뜨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실제로 2004년 귀갓길에 사라져 사체로 발견된 노 양 사건 또한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 주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커지고 있다. 화성 일대에는 흉흉한 소문도 끊이지 않고 있는 상태다. 주민들은 “수원이나 오산에서 발생하는 사건까지 무조건 화성과 연관지으려 한다”며 불쾌해하면서도 이번에도 그간 실종자들이 화성 인근에서 사체로 발견된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고 몹시 염려하는 표정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오죽하면 실종 3일이 지나면서 이미 살해됐다는 얘기까지 나돌고 있다”며 “하지만 이번 사건만은 예외이길 바란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점을 들어 또 다시 동일범이 범행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냐는 섬뜩한 추측도 내놓고 있다.
경찰은 500여 명의 병력과 헬기까지 동원, 비봉IC와 자안리, 양노리 일대에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다. 또 비봉면과 매송면 일대 서해안고속도로와 39번 국도 등 주요 도로에 설치된 CCTV 화면자료를 확보해 용의자를 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하지만 범인이 범행 후 일부러 비봉면 일대에서 휴대전화 전원을 껐을 가능성도 있어 휴대폰이 끊어진 지점을 실종자들의 최종 위치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실정. 범인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이 미제로 남아 있다는 점을 노려 다른 지역에서 범행을 하고 일부러 화성 일대에 범행의 흔적을 남겨놓았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일각에서 비봉면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무위로 끝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종된 세 여인의 휴대전화 전원이 모두 같은 지역에서 끊긴 것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열흘 간격으로 벌어진 부녀자 실종사건은 어쩌면 또 다른 화성발 ‘살인의 악몽’을 예고하는 신호탄일지도 모른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