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보다 더 나쁜 건 뉘우치지 않는 당신!
지난 3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7부(송영천 부장판사)는 열 살 연하의 옛 내연남(이 아무개 씨·당시 46세)을 잔인하게 살해한 후 승용차에 불을 질러 범행을 은폐하려 한 혐의(살인 및 사체손괴 등)로 기소된 50대 주부 홍 아무개 씨(56)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20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1심에 이르기까지는 사전에 치밀한 범행을 준비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으나 항소심에 이르러서 범행 준비 과정과 동기, 경위 등에 관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술을 번복하는 등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결 배경을 밝혔다. 비양심적인 피고인의 진술이 ‘가중처벌’을 불렀던 셈이다.
홍 씨는 이러한 판결에 또다시 불만을 품고 지난 3월 19일 상고장을 제출했다가 며칠 만에 자진 취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조사에서 “잘한 것은 아니지만 (내연남을) 죽일 만했다”고 진술했다는 홍 씨. 과연 그에게 살인조차 정당하다고 주장할 만한 어떤 곡절이 숨어 있었던 걸까.
지난해 8월 8일 밤 11시경 경기도 평택시 구 1번 국도변. 공터에 세워져 있던 한 승용차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마침 인근을 지나던 차량 운전자가 소방서에 신고를 했고 긴급 출동한 소방관들에 의해 화재는 금방 진압되었다. 그런데 시커멓게 변한 승용차 안에서 반쯤 불에 탄 40대 남성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시신의 목에는 밧줄이 감겨져 있었다. 타살의 흔적이었다. 경찰은 사체의 신원 파악에 나서는 한편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사고 승용차는 앞뒤 번호판이 떨어져나가 있었지만 다행히 시신의 몸에서 나온 단서들로 신원을 파악할 수 있었다. 피살자는 전직 운전기사 이 아무개 씨였다.
원한 관계에 의한 살해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경찰은 곧 이 씨와 주변 인물들에 대해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이 씨는 사망 당시 건축 현장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의 동료들로부터 ‘수상쩍은 여인’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일전에 한 여자가 나타나서 ‘돈을 갚지 않으면 죽이겠다’며 욕을 퍼붓고 간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빚 문제로 빚어진 살인일까. 경찰이 이 씨의 통장 기록을 조사해본 결과 2년여 전 홍 아무개 여인으로부터 2000만 원이 입금된 사실이 확인됐다. 홍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본 경찰은 일단 참고인 자격으로 홍 씨를 불러 사건과의 연관성을 조사했다.
그러나 홍 씨는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주장하며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 하지만 당시 마을버스 운전기사로 일하던 홍 씨가 사건 당일 차고지에 예정보다 훨씬 늦게 들어온 정황이 포착됐고 자신의 당일 행적에 대한 홍 씨의 진술 또한 자꾸 오락가락했다.
홍 씨를 의심한 경찰은 그의 집에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런데 호적상에는 장성한 자식을 두고 있는 가정주부로 기록돼 있던 홍 씨가 다른 남성과 동거 중인 데다 그의 집에서 범행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휘발유통과 밧줄 등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사건 당일의 행적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받은 동거남과 그의 진술이 서로 맞지 않았다.
경찰은 이 씨의 통장에서 홍 씨로부터 2000만 원이라는 뭉칫돈이 입금된 사실 외에도 50만~100만 원씩 수시로 입금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홍 씨와 이 씨가 보통 관계가 아니었을 것으로 보고 이 부분을 추궁했다. 이들의 내연관계는 금방 밝혀졌다. 조사 결과 두 사람의 인연은 직장동료로 시작된 것이었다.
홍 씨와 이 씨는 한때 한 운수회사에 함께 다닌 적이 있었고 서로 마음이 맞아 연인 관계로 급속히 발전했다. 당시 이 씨는 혼자 살던 처지. 반면 홍 씨는 평범한 가정에 남편과 장성한 자식들까지 두고 있던 상태였지만 뒤늦게 불타오른 열정을 주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내연 관계는 깊어졌고 가정을 등한시했던 홍 씨의 불륜 사실은 결국 남편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아예 집에서 나온 홍 씨는 이 씨와 살림을 차리고 이후 이 씨에게 용돈(?)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 씨는 다른 운수회사로 옮겨 버스 운전을 계속했지만 돈이 궁해질 때마다 홍 씨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때 홍 씨가 이 씨에게 새로운 여자를 소개시켜줄 정도로 두 사람은 무덤덤한 관계가 되는 듯했다.
하지만 홍 씨는 내심 이 씨에게 빌려준 2000만 원을 빨리 돌려받을 생각뿐이었다. 홍 씨와 함께 살고 있던 동거남도 이 씨에게서 돈을 받아오라고 재촉했다. 사랑을 전제로 빌려줬던 돈은 사랑이 식은 뒤 오히려 증오의 씨앗이 됐다. 홍 씨는 헤어진 지 2년이나 지났지만 돈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이 씨에게 원한을 품게 됐고 결국 이 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게 된다.
경찰관계자에 따르면 홍 씨는 범행 2주 전부터 휘발유, 망치, 밧줄, 펜치, 비닐 테이프 등을 마련하고 현장을 사전 답사하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건 당일 야간 운전을 하다 말고 이 씨와 만나기로 한 곳으로 가 이 씨의 승용차 안에서 그를 살해했다.
범행 수법은 50대 여성이 혼자서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너무 치밀하고 잔인했다. 이 씨의 목에 밧줄을 걸면서 망치로 머리를 수차례 가격한 후 올가미를 잡아당겨 이 씨를 완전히 저항 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던 것. 홍 씨는 이 씨가 사망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차 밖으로 나와 앞뒤 번호판을 떼고 차에 휘발유를 부은 뒤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차량 등이 불에 타면 증거가 남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로변에서 훤히 보이던 곳에서 불길이 치솟자 지나던 운전자가 곧바로 신고했고 범행 흔적이 미처 다 사라지기 전에 화재가 진압되면서 결국 경찰에 덜미가 잡히고 말았다. 홍 씨는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살인 혐의를 자백한 후에도 이 씨에 대한 증오심을 거두지 않고 “죽어 마땅한 나쁜 인간”이라는 둥 죄를 뉘우치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홍 씨가 동거남과 공모해 이 씨를 살해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를 폈지만 동거남에 대한 직접적인 혐의 사실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홍 씨 역시 동거남은 아무 연관이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홍 씨의 동거남은 사건 직후 조사를 받던 중 잠적하기도 했으며 검찰에서도 추가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뚜렷한 혐의점을 찾을 수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살인 등의 혐의로 기소된 홍 씨는 수원지방법원의 1심 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홍 씨는 형량이 너무 무겁다며 국선 변호사를 통해 항소했고 검찰 측에서도 형량이 너무 가볍다며 쌍방 항소한 결과 서울고법 항소심에서 오히려 더 엄중한 처벌을 받고 말았다.
판결문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홍 씨는 교통사고특례법위반죄로 1회 벌금형을 선고받은 외에 범죄 전력이 없고 처음엔 범행을 뉘우치는 듯하여 1심에선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홍 씨는 항소심에서 “(내가) 정신 병력이 있다, 단지 돈을 갈취당한 일에 대한 다짐을 받고자 나갔다가 얼떨결에 이 씨를 살해하고 말았다”는 등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술을 번복하였고 재판부는 홍 씨가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있는 점, 피해자의 유족들과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용서받지도 못한 점 등을 참작해 원심보다 5년을 추가한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자신을 배신하고 피해를 주었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고 사체를 훼손하기까지 한 홍 씨에게 판결문을 통해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므로 이를 해치는 범죄는 엄중한 처벌을 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장유지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