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죽인 ‘모자’ 9년만에 단죄
피해자 부인인 백 씨의 내연남 최 씨의 진술 기록. 최 씨는 조수석의 김 씨가 사고 직전 미동도 없었다고 자술해 이미 살해됐을 가능성을 암시했다.
사건은 지난 2006년 12월 25일 오후 9시 전북 정읍시 칠보면 칠보 삼거리에서 발생했다. 차량통행도 거의 없던 논밭근처의 한적한 도로에서 SUV가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던 승용차의 뒤 범퍼를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운전자 둘째아들(당시 28세), 뒷좌석에 타고 있던 어머니 백 아무개 씨(당시 51세)는 가벼운 부상을 입었으나 조수석에 타고 있던 아버지 김 아무개 씨(당시 54세)는 숨지고 말았다. 당시 경찰은 사고 흔적 외에 특별한 정황이 없어 단순 교통사고 사망사건으로 처리했고, 부검도 없었다. 병원에서 사망 진단을 받은 유가족들은 사고 발생 이틀 뒤 숨진 김 씨를 화장했다.
그런데 2007년 1월, 정읍경찰서에 익명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부인 백 씨와 승용차 운전자가 내연관계다. 고의 사고의 의심이 많다”라는 내용이었다. 정읍경찰서 강력계는 부인 백 씨의 통화내역을 추적했고 그녀가 승용차 운전자 최 아무개 씨(당시 49세)와 자주 통화를 한 정황을 파악했다. 하지만 부인 백 씨와 최 씨는 “우연히 아는 사람과 사고가 난 것”이라며 고의 사고 의혹에 대해 부인했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상황. 수사에 진전이 없자 최 씨는 종적을 감췄다. 결국 사건 수사는 지난 2007년 10월 내사 종결처리가 됐다. 부인 백 씨는 보험금과 퇴직금 등으로 7억 2000만여 원을 지급 받았다.
최 씨가 자취를 감춰 수사가 더 이상 진전되지는 않았지만, 그 뒤 정읍경찰서는 이 사건을 일단 전북 광역수사대로 이첩했다.
“‘보험금’ 이 단어가 계속 떠올랐다.”
광역수사대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전북지방경찰청 형사과 광역수사대 광역 2팀 유태영 반장(45)은 숨진 공무원 사체 사진에서 석연치 않은 정황을 발견하고 단순 교통사고 사망사건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고사가 아닌 타살’이라는 확신을 가진 경찰은 관련기관에 과학적 분석을 의뢰했다. 도로교통안전공단이 분석한 추돌당시 SUV 속도는 37.6㎞에 불과했다. 또 숨진 김 씨가 머리를 부딪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 앞 유리창에서도 김 씨의 혈흔 등 흔적이 검출되지 않았다. 이와 함께 경찰은 숨진 김 씨의 시반 사진을 국립대학 법의학자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법의학자들은 “부검 없이 단정할 수 없으나 사체에 보이는 시반은 사망한 지 3~4시간 뒤에 나타나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2009년 11월, 경찰은 도피했던 최 씨를 체포했다. 고의 사고 의혹으로 수사가 진행된 지 3년 만이었다.
경찰이 밝힌 최 씨 진술에 따르면 최 씨와 백 씨는 2006년 9월 정읍의 한 스포츠 토토방에서 처음 만났다. 교통사고가 일어나기 보름 전인 12월 10일. 백 씨는 최 씨에게 위장 교통사고를 제안했다. 최 씨는 경찰 조사에서 “백 씨가 둘째아들과 이미 이야기를 다 해뒀다. 뒤에서 교통사고를 낼 테니 서 있기만 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2009년 11월 최 씨의 진술을 근거로 백 씨가 긴급체포 됐다. 하지만 백 씨 검거 후에도 수사는 난항을 겪었다. 백 씨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진술을 거부했고 유치장에선 손목을 물어뜯어 벽에 ‘나는 억울하다’는 문구를 쓰며 자해를 하기도 했다. 결국 최 씨와 백 씨는 최 씨의 진술을 근거로 살인혐의를 제외한 보험사기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최 씨는 징역 1년, 백 씨는 징역 5년이 선고됐다.
2014년 4월 14일 둘째아들이 호주에서 추방돼 인천공항에서 체포됐다. 둘째아들은 최 씨를 모른다고 주장하며 살해혐의도 부인했지만 2014년 11월 백 씨는 살인혐의로, 둘째아들은 존속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그리고 지난 2월 4일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 형사합의부(재판장 박 현)는 기소된 백 씨와 김 씨 모자에게 각각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최 씨가 백 씨와 공모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며 “백 씨는 숨진 김 씨에 대해 월 급여로 감당이 어려울 만큼 보험금을 납입한 점 등을 고려하면 보험금을 편취하기 위해 불상의 방법으로 살해한 뒤 교통사고로 위장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선고 뒤 법정을 나선 백 씨는 비명을 지르며 실신했다. “나 어떡해, 인정 못해”라며 소리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법정을 가득 채웠다.
정읍=문상현 인턴기자
피고 측 막내아들 일문일답 “빚도 없는데…우리가 왜?” 재판부는 ‘사형선고’ 가능성을 언급할 정도로 판결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피고인 측은 자신들의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일요신문>은 지난 4일 선고공판이 끝난 뒤 피고인 백 씨의 막내아들 김 아무개 씨(36)를 만나보았다. ―선고 후에도 무죄를 주장하는 근거는. “먼저 범행 동기부터 명확하지 않다. 보험금을 노린 범행이라고 하는데, 우리 집은 빚도 없고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를 살해하면서까지 보험금을 탈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 명의로만 보험이 14개 가입돼 있었다. “나와 큰형 역시 가입한 보험이 8~10개 정도다. 사고가 나기 5~6년 전부터 가입했다. 어머니도 모두 상황 가능한 보험 위주로, 재테크 목적으로 가입한 것이다.” ―보험료가 매달 280만 원이 청구됐다. 아버지 월 급여만으로는 납입하기 어려웠을 텐데. “나를 비롯한 형제들이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송금했다. 나는 일주일에 60만 원씩 월 200만 원 내외를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화장을 서둘러 한 이유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경찰 조사를 기다렸다. 그래서 장례식도 하루밖에 치르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둘째 형이 선고공판 전 교도소에서 자살을 시도하려고 하다가 의식을 잃었다. 응급실에 찾아갔을 때 나도 힘들어 많이 울었다. 6년 간 재판과 뒷바라지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다. 그래도 항소를 생각 중이다.” [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