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갈아타기’ 일주일간의 폭주 막 내렸다
▲ 고속도로 연쇄살인 피의자 이 아무개 씨가 경찰에 구속되는 모습. 이 씨에겐 충북 진천 여대생 살인 혐의도 추가됐다. | ||
세 명을 살해하고 두 명을 중태에 빠트린 흉악한 범죄자라고 하기에 이날 이 씨의 모습은 너무나 ‘온순’했다. 이 씨는 이전에 몇 차례 감옥에 드나들긴 했지만 대부분이 단순강도나 마약투여 등의 혐의였다. 이 씨는 경찰 조사 과정에서 “내가 피해자들 대신 죽었어야 했다. 너무나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하지만 후회해 봐야 이미 엎질러진 물. 대체 무엇이 이 씨를 잔인무도한 살인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인지 그 비극의 순간들을 뒤쫓아가봤다.
지난 7월 24일 새벽 2시 40분쯤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수리 중부고속도로 하행선. 소나타 승용차 한 대가 갑자기 속력을 내더니 앞서 가던 카렌스 차량을 순식간에 들이받았다. 갑작스런 사고에 놀란 카렌스 운전자 진 아무개 씨(28)와 진 씨의 친구는 차에서 내려 사고 부분을 살펴봤다. 바로 그때 소나타에서 내린 한 중년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알루미늄 야구방망이로 이들 두 사람의 머리를 느닷없이 수차례 내리쳤다. 무방비 상태이던 진 씨 일행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고 이 사내는 재빨리 자신이 타고 온 소나타를 버리고 카렌스로 옮겨 타 도주했다. 심야의 ‘고속도로 습격’을 감행한 이 사내는 바로 이번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 이 씨였다.
다행히 의식이 있던 진 씨 일행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단순 차량 절취 사건인 줄 알고 출동한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이 씨가 놓고 간 소나타 차량을 조사하던 중 뜻밖의 사실을 밝혀낸다. 차적 조회 결과 소나타 차량의 소유주로 확인된 인물은 정 아무개 씨(28). 경찰은 휴대폰 위치추적을 통해 정 씨의 현재 위치를 찾아내 접근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정 씨는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안성휴게소 뒤쪽 도로에 서 있던 또 다른 소나타 차량 밑에서 살해된 채 발견됐다. 둔기로 머리 부위를 심하게 가격당한 상태였다.
경찰을 더욱 경악케한 것은 정 씨가 발견된 차량의 트렁크에 다른 사람의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한 양의 혈액이 고여 있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추측한 경찰은 즉시 전담 수사팀을 구성하고 이 차량의 소유주를 찾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차량의 소유자인 이 아무개 씨(여·39)도 하루 전인 23일 밤 평택에 있는 한 여성회관에서 스포츠댄스 수업을 받은 후부터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수사팀은 이 씨 역시 살해된 것으로 보고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이 씨는 25일 오전 정 씨의 사체가 발견된 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논길에서 싸늘하게 식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 씨의 머리 부분 또한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정 씨의 사체가 발견된 직후 소나타 차량과 현장에 남겨진 단서, 주변 도로 CCTV 화면 등을 취합해 분석한 수사팀은 앞서 카렌스 차량을 탈취해 간 이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비공개 수사를 벌였다. 그러나 피해여성 이 씨의 사체가 추가로 발견되자 더 많은 피해자가 나올 것을 우려해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이 씨를 공개수배하기에 이른다.
한편 이즈음 이 씨는 진 씨로부터 탈취한 카렌스를 타고 전라도에 있는 한 사찰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다시 경기도 이천으로 올라와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 씨는 한때 신호위반으로 경찰차에 적발되기도 했으나 안성에 위치한 고삼저수지로 도주해 이곳에서 차를 불태우고 범행 때 사용한 야구방망이를 버렸다. 이 야구방망이는 지난 7월 31일 진행된 현장검증에서 피 묻은 채 발견되기도 했다.
그 뒤 이 씨는 저수지에서 나와 근처에 세워져 있던 밴을 훔쳐 타고 대전으로 이동, 다시 그 곳에서 밴을 버리고 기차와 버스 등을 이용해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도피를 계속했다. 이 씨는 자신이 검거된 7월 27일에는 전주에서 기차로 천안까지 온 뒤 지하철 등을 이용해 자신의 집이 있는 평택으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팀은 이 씨가 전라도로 잠입한 사실을 파악하고 추가 범행의 우려 때문에 전라도 일대의 경계를 강화하며 노심초사했으나 다행히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도피생활을 하던 중 이 씨는 예전에 마약투여 혐의로 자신을 붙잡았던 평택경찰서의 한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많이 힘들다”며 자수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또 이 씨의 부인 역시 남편을 자수시키겠다며 경찰서에 연락하기도 했다. 이에 수사팀은 이 씨가 한 번은 집에 들를 것으로 예상하고 이 씨가 살고 있던 연립주택 주변에서 잠복을 시작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 씨는 피해여성 이 씨에게 주차 문제로 시비를 걸어 차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야구방망이를 휘두르고 금품을 빼앗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피해자 정씨의 경우에도 비슷한 수법으로 범행이 이뤄졌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일부 언론에서는 이번 사건을 ‘묻지마 살인’이라며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연쇄적으로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씨는 체포되고 난 후 범행의 동기를 묻는 질문에 “그저 돈이 필요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평택경찰서 측도 이 사건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이 씨가 돈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접근을 해 일으킨 사건이라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