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묻은 신기루 쫓다 망친 ‘모래알 인생’
▲ 지난 2004년 2월 경기도 포천의 광덕고개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된 피해자의 시신을 경찰들이 옮기고 있다. 연합뉴스 | ||
혹시나 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유 씨는 실종 33일 만에 경기도의 외진 낭떠러지에서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이번에 포천경찰서 영중파출소 이재택 형사가 전하는 사건이 바로 4년여 전 여중생 엄현아 양 실종·살해사건과 맞물려 포천 주민들을 살인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보험설계사 납치살인사건’이다. 당시 사건을 담당한 이 형사는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조사 결과 고소득자였던 유 씨는 평소 보험 건으로 알게 된 한 남성과 그 일당에게 납치돼 실종 당일 살해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는 엄현아 양 사건으로 관할서에 비상이 걸려 있던 상황이었는데 같은 동네에서 또 한 건의 사건이 터져서 막막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범인들은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평소 알고 지내던 고소득 여성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해 치밀하게 범행을 저질렀다. 그간 돈 몇 푼 쥐어보자고 살인도 서슴지 않는 악랄한 사람들을 많이 상대해왔지만 이런 사건을 다룰 때마다 깊은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대체 인간이 얼마나 더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인지….”
우선 유 씨가 실종됐던 당시 상황에 대한 이 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기다리다 못한 유 씨의 딸이 실종 5일째 되던 날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더라. 이혼 후 전문 보험설계사로 경력을 쌓은 뒤 완벽하게 ‘홀로서기’에 성공한 유 씨가 가출할 정황은 어디에도 없었다. 특히 유 씨는 경제력을 책임진 ‘가장’으로서 매일같이 힘들게 일하면서도 두 자녀들까지 묵묵히 잘 키워낸 터였다. 이상한 점은 범죄에 연루됐을 경우 가족들에게 금품을 요구하는 협박전화가 있는 것이 보통인데 유 씨의 경우에는 가족들에게 그런 협박전화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수사팀은 유 씨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채무, 치정 등의 문제로 유 씨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유 씨 주변 인물 중에서 이렇다 할 의심스러운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특히 유 씨가 실종된 이후 일체의 금융거래 내역이 없다는 사실은 가장 큰 의문이었다. 수사팀은 탐문 대상을 점점 넓혀가며 수사를 펼쳤으나 용의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유 씨 휴대폰의 통신내역을 조사하면서 한 명의 남자가 마침내 용의선상에 떠오르게 된다. 이어지는 이 형사의 얘기.
“휴대폰 위치추적을 한 결과 유 씨가 실종 당일 오후 6시 50분께 포천시와 인접한 강원도 화천군 화내면 사창리 광덕고개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유 씨와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사람은 심광식(가명·34)이라는 남자였다. 우리는 유 씨와 마지막으로 접촉한 심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심 씨의 행적을 추적한 결과 유 씨 실종과 연관 지을 수 있는 의심스러운 정황들이 하나둘씩 포착됐다. 특히 심 씨는 특정 인물과 유난히 잦은 통화를 한 것으로 드러났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은 오달수(가명·35)라는 남자였다.
조사 결과 오 씨는 심 씨와 같은 교도소에서 복역한 전력이 있었는데 오 씨의 행적에서도 심 씨와 마찬가지로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발견됐다. 특히 유 씨가 사라지기 전 두 사람 은 유난히 통화가 잦았지만 웬일인지 어느 순간부터 이들 사이에는 일절 통화내역이 없었다. 그리고 심 씨와 함께 유력한 용의자로 올라있던 오 씨는 경찰 수사망이 좁혀 들어오던 11일 서울 강북구 수유 4동의 한 모텔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유력한 용의자였던 오 씨는 범행 후 경찰 수사망이 좁혀지자 심적 부담감을 안고 자살한 것으로 확인됐다. 수사팀은 유 씨가 이미 살해됐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수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실종 23일 만인 2월 12일 유 씨가 타고 나간 승용차가 포천시 군내면의 청성공원 주차장에서 발견됐다. 조사 결과 이 차량은 유 씨가 실종된 다음날부터 이곳에 주차돼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실종 당일 유 씨가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난 뒤 다른 곳으로 이동했거나 범인들이 범행 후 차량을 이곳으로 옮겨놨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유 씨가 범행에 희생됐을 만한 정황이 더욱 명확해졌다. 16일 오전 포천시 군대면 작두리의 한 국도변 배수로에서 유 씨의 명함과 10여 개의 통장, 신용카드, 수첩, 볼펜 등 유류품이 발견된 것이다. 수사팀은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에서 유 씨의 휴대전화 마지막 발신이 있었던 점과 유류품이 발견된 지역을 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예상 가능한 범인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했다. 동시에 수사팀은 남은 용의자인 심 씨를 찾는 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심 씨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심 씨에게는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심 씨가 약혼녀를 만나기 위해 대구에 내려왔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경찰에 체포된 이후 심 씨는 끝까지 범행을 부인하며 애를 먹였다고 한다. 이어지는 이 형사의 얘기.
“수사팀은 이미 유 씨가 살해됐다고 보고 있었다. 심 씨는 조사 내내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지만 수사팀이 조사한 여러 정황들은 심 씨와 오 씨가 범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심 씨를 앉혀놓고 ‘사체는 어디 있나. 여자는 왜 죽였냐’라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심 씨는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했다. ‘했다, 안했다’가 아니라 ‘죽어도 나는 모른다’는 거였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라. 그 여자 남편과 이혼한 후 어떻게든 열심히 살려고 했던 여자다. 불쌍한 여잔데 왜 그랬나’라고 추궁했다. 그랬더니 심 씨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이더라. 그리고 얼마 후 심 씨의 입에서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이 나왔다. 하지만 심 씨는 범행 가담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살인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모두 (자살한) 오달수가 한 짓이다. 나는 차만 운전했을 뿐이다’는 게 심 씨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를 계속 추궁한 결과 심 씨의 입에서 또 다른 공범 신현철(가명·35)의 이름이 나오더라.”
곧바로 신 씨의 행방을 추적한 수사팀은 22일 오전 서울 도봉구의 집에 머물고 있던 그를 추가로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조사 결과 이들의 범행 동기는 돈 때문으로 밝혀졌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심 씨와 오 씨는 교도소에서 만나 알게 된 사이로 출소 후 저마다 이 일 저 일에 손을 댔으나 잘 되지 않았던 듯하다. 심 씨는 의류업에 종사하면서 거래처 관계에 있던 신 씨와도 안면을 트게 됐는데 신 씨 역시 잇따른 사업실패로 1억이라는 빚을 지고 자금난에 허덕이던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들 셋은 여기저기서 끌어들인 사채로 인해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고 급기야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처지가 된다. 특히 심 씨는 몇 개월 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상태였다. 즉 당시는 세 명 다 돈이 급박하게 필요했던 시점으로, ‘한탕 해서 지긋지긋한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좀 벗어나보자’는 강력한 욕구가 공통적인 범행동기로 작용했던 셈이다.”
모여서 신세한탄을 하던 이들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위험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범행 대상을 물색하던 중 심 씨는 평소 보험관계로 알고 지내던 유 씨를 떠올리게 된다. 고액 연봉을 받으며 풍족한 생활을 해오던 유 씨가 현금을 많이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안면이 있던 심 씨가 앞장서 유인할 경우 범행이 순조롭게 이뤄질 거라는 계산에서였다. 이들은 각자 역할을 나눠 유 씨를 납치, 금품을 빼앗기로 공모한다. 그리고 마침내 사건 당일 심 씨는 ‘화재보험을 하나 더 들려고 한다’는 말로 유 씨를 불러냈다. 심 씨가 이미 한 차례 자신을 통해 보험에 가입한 적이 있었던 터라 유 씨는 아무 의심 없이 약속장소로 나갔다. 이들은 유 씨를 인적이 드문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의 한 창고로 유인했다. 다음은 이 형사의 얘기.
“아무도 없는 창고 안으로 유 씨를 끌고 간 이들은 이내 강도로 돌변했다. 뒤늦게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 유 씨가 도망치려 했으나 건장한 남성 세 명을 당할 재간이 있었겠는가. 유 씨의 통장과 신용카드를 뺏은 이들은 유 씨에게 비밀번호를 말하라며 협박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 씨는 예상과 달리 끝까지 비밀번호를 알려주기를 거부한 채 소리를 지르며 거세게 반항했다고 한다. 유 씨를 그대로 풀어줄 경우 금세 신원이 드러날 것을 깨닫고 다급해진 이들은 결국 청테이프로 유 씨의 손발을 묶은 뒤 나일론 끈으로 유 씨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말았다.”
범행 후 이들은 사체를 유 씨의 승용차에 싣고 유기할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들은 당일 오후 6시경 인적이 드문 포천시 이동면 광덕산 계곡 300m 아래로 사체를 던져버리고 사체 유기 현장에서 10㎞ 정도 떨어진 청송공원에 유 씨의 차를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이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 도주과정에서 신용카드 등 유 씨의 유류품들을 길가에 뿌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의 진술을 토대로 수사팀은 유 씨의 사체를 유기했다는 곳으로 가서 사체를 발굴했다. 실종 33일 만에 발견된 유 씨는 실종 당일 입고 나갔던 밍크코트와 바지를 그대로 입고 있었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의 미처 부패가 진행되지는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경찰 조사과정에서 신 씨 등은 “경제적으로 살길이 막막했다. 하지만 정말 죽일 생각은 없었다. 돈만 뺏으려 했는데 유 씨가 너무 심하게 저항을 해서 죽이게 됐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들이 저지른 범행의 결과는 더없이 허무했다. 유 씨가 비밀번호를 끝까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범행 후 이들이 손에 쥔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는 게 수사 관계자의 얘기다. 강도살인 및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 두 사람은 법정에서 각각 15년(심 씨)과 무기징역(신 씨)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