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여의 회의가 끝난뒤 김행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정몽준 대표가 민주당과의 대북정책에 대한 의견 조율이 반드시 있어야만 성공적으로 단일화 의도를 살릴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김 대변인은 이어 “일반 유권자들이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 대해 걱정하는 대목이 분명히 있고 이는 우리의 책임이기도 하다”는 정 대표의 말도 덧붙였다. 전성철 정책위의장도 기자회견을 갖고 “우리 당이 제시한 15대 정책과제 가운데 대북, 대미정책과 재벌정책이 최우선 조율과제”라며 “노 후보를 좌파로 페인팅하려는 세력이 있는 만큼 정책조율이 그런 페인팅을 무력화하고 승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 의장은 “양당이 15대 정책과제 전부에 대해 1백% 일치할 수는 없으나 유럽연정에서 보듯 당의 정체성과 직결된 핵심부분에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전제한 뒤 “정책 조율이 끝나면 정 대표가 지방유세도 함께 다니고 회의도 주재하는 등 1백% 선거공조를 할 것”이라고 강조,
사실상 대북정책 조율이 노 후보-정 대표 회동을 통한 선거공조체제 공식 출범의 전제조건임을 선언했다. 정몽준 대표가 단일후보를 노무현 후보에게 넘겨준 뒤 어떤 꿈을 꾸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5년후 대선 재도전이라는 것은 이미 정치권에서 상식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대표가 이를 위해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후보단일화 결과에 승복한 이후 어떤 포석들을 깔고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정 대표측이 대북정책 조율을 들고 나온 것과 관련, 사실상 노 후보 선거지원 의사가 없음을 밝힌 것이라는 성급한 해석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정 대표는 불과 이틀 전인 지난달 30일 상근 당직자회의에서 “노 후보를 그냥 도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당선을 위해 열심히 뛰러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고 이어진 기자간담회에서는 노 후보와의 회동에 대해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만나겠다”고 말했다. 또 이날 회의에서는 민주당에서 넘겨받은 선대위 전국 조직책을 바탕으로 국민통합21측 조직책 인선을 마무리지었다.
이에 관여한 한 당직자는 “정 대표가 조직책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체크하는 등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고 말했다. 그럼 정 대표가 후보단일화 결과에 흔쾌히 승복한 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명예선대위원장제’에 이어 대북정책 등 핵심정책 조율 등을 대선공조체제 전제조건으로 잇따라 내놓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1일 회의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날 회의의 주제는 후보단일화 정신을 살려 노 후보 당선을 위해 적극 지원하되 이 과정에서 정 대표의 정치적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하는 방안이었다. 정 대표측이 후보단일화 이후 제일 먼저 민주당측에 요구한 것은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안 수용이었다.
특히 정 대표는 2004년 개헌안 발의에 비중을 두었다. 노 후보가 당선된 뒤 정 대표측 요구대로 2004년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개헌이 이뤄지면 노 후보의 권한은 통일, 외교, 국방 등의 외치로 축소되고 경제, 치안, 복지 등 내치를 담당하는 총리는 정 대표가 맡게 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안을 민주당이 대선공약으로 내건다면 이는 정 대표를 차기 정권의 공동후보로서 추대하는 정치적 효과를 낳게 된다.
물론 개헌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 만큼 실현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정 대표가 개헌안 수용 요구를 통해 노리는 것은 총리 자리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런 ‘정치적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2004년 분권형대통령제 개헌발의 수용 직후 발효시점은 2008년이 돼도 상관없다고 밝힌 것도 이 때문이다. 정 대표의 이같은 정치적 의지는 양당 공동선대위 구성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 후보단일화가 이뤄진 지난달 25일 정-노 양자 회동. | ||
우선 명예선대위원장은 선거업무 전반을 후보와 상의해 통할토록 했고 보좌기구 역시 별도의 비서실, 대변인, 특보단을 두되 그 구성을 명예선대위원장이 결정토록했다. 결국 정 대표는 후보단일화 이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안’과 ‘명예선대위원장직’이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일단 단일후보인 노 후보에 근접하는 정치적 위상을 확보한 셈이다.
정 대표가 정책조율의 핵심과제로 제기한 것은 대북정책이다. 전성철 의장은 대미관계와 재벌정책도 주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전 의장은 “정 후보 지지자들이 후보단일화 후 상당한 정치적 허탈감을 느껴 투표에 참여하지 않거나 이회창 후보 지지로 돌아서고 있다”며 “정 대표의 정치적 위상을 업그레이드하고 정책조율을 시도하는 것은 후보단일화의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말했다.
실제 이같은 주장에 대해서는 민주당도 어느 정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정 대표측 일부 인사들도 정책조율 요구가 정 대표에게는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정 대표가 만약 이같은 조율없이 노 후보 지원에 나선다면 정 대표를 지지했던 많은 유권자들이 정 대표는 정체성도 없는 정치인이라고 인식할 수 있고 이는 정 대표가 노 후보에게 흡수돼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정체성과 직결되는 정책에 대한 조율 요구는 한편으로는 정 대표 지지자들을 노 후보 지지로 유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 대표 지지층을 유지하는 효과도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의 포석은 선대위 구성에서도 드러난다. 정 대표는 통합21측 선대위원장으로 유력한 신낙균 전 선대위원장을 민주당 출신이란 이유로 배제시켰다. 또 현장에서 뛸 선거 조직책 선정에서는 호남지역은 포기하고 영남지역 조직에 집중했다. 대선 출마선언 이후 후보단일화 과정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세(勢)부족과 지역기반 부재로 어려움을 겪었던 정 후보로서는 당연히 영남지역을 향후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 할 수 있다.
정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이같은 기반을 확보하더라도 대선 이후 정치적 정체성과 위상을 지킬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 노 후보가 당선될 때와 낙선할 때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통합21측 상당수 핵심당직자들은 몸값이 가장 높은 대선 과정서 민주당과의 당 대 당 통합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 대표는 일단 통합21을 유지하는 쪽을 선호하고 있다.
민주당처럼 과거의 오너(구동교동계) 후보단일화 직전 오너(신동교동계), 현재의 오너(노무현계)가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민주당과의 합당은 직계세력이 없는 정 대표로서는 모험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현역의원 1인 정당을 대선후에 유지하는 것도 무리다. 따라서 정 대표는 대선에서 확고한 정체성을 유지하고 당선에 상당한 역할을 한 뒤 이를 바탕으로 대선후 진로를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
노 후보가 당선될 경우에는 민주당과 합당, 특정계파와 연대해 당권과 차기후보 역할분담을 추진할 수 있고 통합21을 유지하면서 분열가능성이 높은 한나라당 일부와 연대를 모색할 수도 있다. 노 후보가 낙선할 경우 역시 분열될 가능성이 높은 민주당 일부 정파와 연대 제1야당을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필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