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골의 증언’으로 드러난 마각
현장에 남겨진 단서를 기초로 하는 수사의 특성상 모든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 현장에 남아있는 증거도 없고 사건발생 당시의 정황은 물론 목격자 하나 찾아낼 수 없는 상황에서 범인을 추적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청주흥덕경찰서 강력 3팀 한성동 팀장이 전하는 사건은 7개월 만에 밝혀진 한 노인의 죽음에 얽힌 얘기다.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던 막막한 상황에서 범인을 특징짓기까지 6일간의 긴박했던 수사기록을 따라가보자.
“으아악!”
2005년 3월 27일 오전 7시경. 충북 진천군 덕산면 용몽리의 지방국도 옆 풀숲에서 느닷없이 사람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한 남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풀숲에서 혼비백산 뛰쳐나왔다. 남자는 이날 오전 국도변 풀숲에서 풀을 깎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무언가 못 볼 것을 본 양 벌벌 떨면서 풀숲만 가리킬 뿐이었다. 다음은 당시 상황에 대한 한 팀장의 얘기.
“사건 당일 오전 국도변에 사체가 있다는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현장에는 사람의 것이 분명한 사체가 풀에 덮여 있었는데 죽은 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듯 완전히 백골 상태였다. 육안상으로는 변사자의 신원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자살인지 타살인지였다.”
하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국도변 풀숲에서 발견된 의문의 백골 사체만으로는 사건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체가 발견된 곳이 차량이 오가는 국도변이라는 점에서 누군가 야밤에 뺑소니 교통사고를 내고 도주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을 샅샅이 살펴본 수사팀은 단순 사고사나 자살이 아닌 타살일 것으로 가닥을 잡고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현장이 일부러 찾아가지 않는 한 발견되기 어려운 곳이고 평소 인적이 잘 닿지 않는 곳이라는 점과 머리와 몸통 부분이 일정 간격이상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특히 두개골이 심각하게 함몰되어 있다는 국과수 부검결과는 수사팀으로 하여금 타살 쪽으로 가닥을 잡게 했다. 다른 부위의 손상 없이 두개골만 함몰되어 있다는 것은 교통사고는 아니라는 얘기. 즉 피살자가 누군가에게 머리를 둔기 등으로 맞아 살해된 후 유기됐을 가능성을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백골 사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또 그의 죽음에는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수사팀은 피해자를 찾기 위한 탐문수사에 들어갔다. 다음은 한 팀장의 얘기.
“진천군 일대에 가출인과 실종자로 신고된 사람들의 명단을 일일이 확인하며 피해자의 신원확인에 들어갔다. 특히 사체가 완전히 부패되어 백골 상태라는 점을 감안, 상당히 오래 전에 접수된 기록들까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수일간 발품을 팔며 집중적인 탐문수사를 벌인 결과 그때까지 행방이 묘연한 60대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문제의 인물은 덕산면 용몽리에 살고 있던 안달식 씨(가명·65). 수사결과 안 씨는 서울에 살고 있는 친형에 의해 지난 2004년 9월 중순경 가출신고가 되어 있는 상태였는데 그때까지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안 씨의 형에 따르면 안 씨와 도무지 연락이 되지 않을 뿐더러 집을 오랫동안 비운 것이 심상치 않아 가출신고를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백골상태의 사체에서 신원을 확인할 방법은 단 하나. 수사팀은 변사자를 특징지을 수 있는 의치와 보철을 가지고 진천에 소재한 치과를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내가 의치를 해줬다’는 의사의 진술을 확보, 변사자는 6개월 전 행방불명된 안달식 씨임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안 씨에 대해 수사팀이 수집한 정보라고 해봤자 너무 간단했다. 그가 가족과 떨어져 오랜시간 홀로 살아왔으며, 마을과 멀리 떨어진 독립가옥에서 다른 사람의 별장을 관리하며 지냈다는 것, 또 건강이 좋지 않아 농사일을 낮에만 간간이 했을 뿐 주로 야간에 회사 경비원으로 일하며 생활했다는 것 정도였다. 온다간다는 말도 없이 어느날 갑자기 사라졌지만 그 누구도 안 씨의 안부를 궁금해하거나 그의 행방을 짐작하는 사람이 없었다. 안 씨가 사라진 지 6개월이 훨씬 지나 백골로 발견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팀은 안 씨의 전화 역발신 추적을 통해 그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진행했다. 그러다 안 씨에 대해 알고 있던 인물을 가까스로 찾아낸 수사팀은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포착하게 된다. 평소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안 씨가 사채로 돈을 불리고 있었으며 실종되기 전까지 진천군 덕산면에 위치한 한 공장의 경비원으로 근무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안 씨가 평소 돈에 대해 상당한 집착을 보여왔다는 중요한 진술도 확보됐다. 다음은 한 팀장의 얘기.
바로 안 씨가 근무하던 회사의 총무과장 김영춘 씨(가명·37)였다. 절도전과 외에는 이렇다할 강력 전과는 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진술 등을 종합해볼 때 김 씨는 분명 뭔가 석연찮은 인물이었다. 이어지는 한 팀장의 얘기.
“피해자 주변인물들을 찾아다니며 단서를 찾아내고 있을 때 수사팀의 귀에 그럴싸한 얘기가 들려왔다. 안 씨가 전화로 누군가와 돈 문제를 놓고 심하게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상대방이 바로 김영춘이었다는 것이었다. 또 김영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안 씨가 흥분해 돈을 갚으라고 소리치는 모습을 봤다는 진술도 있었다. 정황상 두 사람 사이에는 채무관계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나는 그순간 이 사건이 분명 돈이 얽혀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단서를 잡기 위한 탐문수사가 수일간 계속됐다. 서울과 인천, 강원 등에 포진해 있는 통화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던 수사팀은 안 씨와 10여 일간 동거를 했던 한 여성을 찾아냈고 그녀로부터 안 씨의 채무관계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진술을 듣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회사 동료인 김 씨가 안 씨에게 1800만 원을 차용해갔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은밀히 김 씨에 대해 내사하는 과정에서 김 씨가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들을 포착하게 된다.
그러나 여느 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김 씨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내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범행 당시 피가 튄 안 씨의 옷가지를 이미 확보해둔 상태였다. 순순히 혐의를 인정하지 않는 김 씨 앞에 수사팀이 피묻은 옷가지를 증거물로 들이밀며 추궁하자 김 씨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백골로 변한 사체가 발견된 지 꼭 엿새 만이었다.
그렇다면 김 씨는 왜 같은 회사 동료인 안 씨를 살해한 것일까. 김 씨의 자백으로 밝혀진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청주에 살고 있는 김 씨는 진천군 덕산면에 위치한 공장의 총무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안 씨를 알게 됐다. 주식투자 등으로 거액을 탕진한 김 씨는 생활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오던 중 여유자금이 있었던 안 씨에게 1800만원을 빌리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김 씨에게 돈을 변제할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변제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자 안 씨는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김 씨는 조금만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하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다음은 한 팀장의 얘기.
“시간이 지날수록 안 씨의 빚독촉은 점점 심해졌다고 한다. 김영춘이 돈을 갚지 않자 안 씨는 수차례에 걸쳐 강력하게 독촉을 해댔고 둘 사이에 고성과 싫은 소리도 오가고 했던 것 같다. 갚을 요량으로 큰돈을 빌리기는 했지만 변제능력이 없었던 김 씨로서는 막막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힘들게 모은 돈을 빌려준 안 씨로서는 무작정 기다려줄 수만 없었을 터. 특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변제약속을 지키지 않는 김 씨를 믿고 기다리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채무관계를 둘러싼 두 사람 간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그리고 이는 얼마 후 돌이킬 수 없는 참극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어지는 한 팀장의 얘기.
“사건 당일인 2004년 9월 6일 오후 5시경 김 씨는 안 씨를 찾아갔다고 한다. 도저히 2000만 원에 달하는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던 김 씨는 안 씨를 붙들고 사정을 했다고 한다. 한 달에 100만 원씩 나눠서 변제하게 해달라고 사정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하지만 김 씨의 말은 안 씨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고 한다. 안 씨는 김 씨의 사정을 봐주기는커녕 당장 돈을 갚지 않으면 경찰에 고소를 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더라는 거다. 이에 더할 수 없는 심적 압박을 받은 김영춘은 급기야 안 씨를 없애버려야겠다는 무서운 생각을 하게 된다. 김 씨는 안 씨네 방 출입문에 있던 쇠망치로 안 씨의 머리를 수차례 내리쳤고 그 결과 안 씨는 두개골이 함몰되는 중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김 씨는 경찰 조사에서 안 씨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항변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수사팀은 김 씨의 범행을 우발살인이 아닌 계획적인 범행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범행 후 김 씨가 보인 치밀한 범행은폐 때문이었다. 안 씨를 잔인하게 살해한 김 씨는 그 와중에도 현장을 정리하고 자신의 채무를 증명할 차용증을 찾아 불태워버리는 치밀함을 보였다. 또 피투성이가 된 안 씨의 사체를 이불로 싼 뒤 자신의 봉고차에 싣고 안 씨의 집으로부터 약 50미터 떨어진 국도 옆 풀숲에 사체를 유기함으로써 범행을 숨기려했고, 그것도 모자라 안 씨의 남방 주머니에 들어있던 현금 75만 원까지 훔쳐갔다는 것이 경찰 관계자의 얘기다. 이 같은 정황을 보면 채무변제를 감당할 수 없었던 김 씨가 가족은 물론 주변인들과도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던 안 씨를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 유기할 생각을 진작부터 해왔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사건 당일에 있었던 일들을 피의자인 김 씨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감안해볼 때 세부적인 상황들은 김 씨의 진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 수사관계자의 얘기였다. 살인 및 사체유기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 씨는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