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번을 왜 눌러… 우린 그냥 뚫는다’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이번에 춘천경찰서 강력1팀 허필국 형사가 전하는 사건이 그런 경우다. 이 사건은 전국 방방곡곡의 고급 아파트만을 상대로 6억 원이 넘는 금품을 훔쳐온 3인조 도둑을 검거하기까지 벌인 힘겨운 숨바꼭질에 대한 얘기다. 범인들은 디지털도어록이 설치되어 있는 신축 고급아파트만을 골라 전기충격기와 드릴을 사용해 집안으로 침입하는 신종수법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범행은 피해자들조차 그 사실을 며칠간 몰랐을 정도로 감쪽같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해 11월 7일 오후 7시 30분경. 강원도 춘천시 퇴계동의 한 아파트에 사는 정미숙 씨(가명·40)는 한참동안 머리를 갸웃거리며 ‘이상하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었다. 이날 오후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온 정 씨는 필요한 서류를 찾기 위해 안방 서랍을 뒤적거렸는데 거기에 놓아뒀던 패물 등 고가의 금품이 ‘이상하게도’ 안 보였던 것이다. 없어진 금품은 롤렉스 시계를 포함해 무려 2000만여 원에 달했다. 결국 정 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허 형사의 얘기를 들어보자.
“당연히 제자리에 있어야 할 금품이 없어지긴 했으나 경찰에 신고를 할 때까지도 정 씨는 긴가민가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에는 도둑이 든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금품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지기는커녕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고층에 위치한 정 씨의 집은 가스관을 타거나 발코니 창문을 뜯고 칩입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외부인의 발자국이나 지문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집주인의 착각은 아닐까. 안방 서랍에 있던 고가의 금품만 사라졌다는 것도 그랬지만 초저녁 시간 아주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도 의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사라진 금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 ‘내부인’의 소행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집안 곳곳을 살펴보던 수사팀은 이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집안에 있던 금고에 누군가 손을 댄 흔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지문 등은 나오지 않았지만 수사팀이 보기엔 그것은 금고를 뜯으려고 시도한 흔적이 분명했다. 그리고 잠시 후 허 형사는 외부인이 침입한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게 된다.
“출입문에 장착되어 있는 디지털도어록 옆에 작게 뚫린 구멍을 발견했다. 빨대구멍 정도의 아주 작은 크기였는데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눈치챌 수 없을 정도였다. 범인들은 집주인이 미세한 구멍이 뚫린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그 위에 음식점 광고 전단지 같은 것을 붙여놨더라. 보아하니 전기드릴을 사용해 구멍을 뚫은 뒤 철사를 집어넣어 문을 열고 침입한 것 같았다.”
전문 절도범이 아니라면 사용할 수 없는 신종수법이었다. 특히 집안에 범인이 남긴 흔적이 없다는 것은 수사팀을 막막하게 만들었다. 유일한 희망은 아파트 CCTV. 범행 추정 시각 CCTV를 확인하던 수사팀은 범인으로 보이는 수상한 인물들이 찍힌 화면을 확보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녹화된 CCTV 화면이 좋지 않은 데다가 위에서 찍힌 것이라 범인들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수사팀이 확인한 것은 범인이 한 명이 아닌 3명이라는 점, 그리고 일당 중 한 명이 원형 탈모증을 앓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범인들을 찾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다음은 허 형사의 얘기.
“작은 단서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현장을 살피던 중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새로 지은 고급아파트에는 아파트 복도에 사람이 들어서면 자동으로 조명이 켜지는 센서가 장착돼 있다. 그런데 피해자의 집 복도에는 아무리 사람이 들락날락거려도 불이 켜지지 않더라. 아니나다를까 자동점멸 센서등은 침이 잔뜩 묻은 휴지로 틀어막혀 있었다. 범행 당시 복도의 조명이 켜질 경우 외부에서 알아차릴 것을 우려해 범인들이 머리를 쓴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휴지에 묻어있던 침의 DNA를 확인하기 위해 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해놓고 수사를 진행했다.”
그런데 3일 후 또 한 건의 절도신고가 접수됐다. 춘천의 한 아파트에서 마주보고 있는 두 집이 동시에 털린 사건으로 디지털도어록 옆에 드릴로 작은 구멍을 뚫고 침입한 범행 수법은 3일 전 정 씨 집에서 발생한 사건과 동일했다. CCTV 확인 결과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피해자들 집에 도둑이 든 날은 신고가 접수되기 이미 사흘 전이었으며 범인이 정 씨 집에 침입한 이들과 동일한 일당이었던 것. CCTV에 찍힌 3명의 남자들은 사흘 전 아파트 CCTV에 찍힌 원형탈모증 범인이 포함된 삼인조가 분명했다.
범인들은 앞서 정 씨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집안을 어지럽히거나 뒤지지 않고 값나가는 금품과 현금만 가지고 유유히 달아난 것으로 확인됐다. 도난당한 지 사흘이 지나서야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을 피해자들이 알아챘을 정도로 범인들의 수법은 감쪽같았다.
경찰은 비상이 걸렸다. 하루에 같은 동네 아파트에서 세 차례나 범행을 저지를 간 큰 일당들은 누구일까. 설상가상으로 뒤늦게 도난 사실을 알게된 다른 피해신고도 줄을 이었다. 현장을 확인한 수사팀은 이들 일당이 모두 디지털도어록이 장착된 고급 아파트만을 상대로 전기충격기와 드릴을 이용해 침입했다는 공통점을 밝혀냈다.
범인이 세 명이라는 점은 이들이 각기 역할분담을 해가며 철저한 계획에 의해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세 명이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주목한 수사팀은 범행시간대 인근 통신 기지국 기록을 뽑아 세심한 분석작업에 들어갔다. 다음은 허 형사의 얘기.
“무려 10만여 건에 달하는 통신기록들을 분석한 수사팀은 통화가 중복된 휴대폰 전화번호 세 개를 찾아냈다. 하지만 그 번호는 일명 ‘대포폰’이었고 외국인 명의로 돼 있었다. 문제의 휴대폰 통화내역을 추적하던 수사팀은 통화가 최종적으로 이뤄진 지역이 공통적으로 중랑구 묵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나는 이들이 영상파일을 다운받고 문자메시지도 수시로 주고받은 것으로 보아 외국인이 아니라 중랑구에 거주하는 내국인이라고 확신했다. 수사 결과 이들은 이 휴대폰을 매일 사용하지는 않았다. ‘작업’ 시간에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수사팀의 추적 결과 이들은 주로 강원도 일대에서 범행을 했지만 실제로 거주하는 곳은 서울 중랑구 묵동으로 드러났다. 기지국 기록을 조사한 결과 춘천에서 범행이 발생한 날도 이들은 최종적으로 묵동 일대로 이동한 흔적이 포착됐고 또 다른 고급아파트 절도사건 피해신고가 접수된 날 역시 이들의 최종 종착지는 서울 중랑구였다. 이어지는 허 형사의 얘기.
“수사팀은 조급해졌다. 검거가 늦어질 경우 피해자는 더욱 늘어날 것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CCTV에서 확인된 일당 중 한 명이 심각한 원형탈모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수사팀은 범인이 가발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휴대전화 통화기록을 정밀 분석해보니 착신지 한 곳이 가발회사더라. 묵동에 소재한 가발업체를 몽땅 찾아다니며 고객명단을 확보했다. 30~40대 원형탈모증으로 가발을 의뢰한 고객은 1000명이 넘었다. 하나하나 용의자를 압축해나가던 수사팀은 마침내 일당 중 한 명으로 보이는 김양민(가명·39)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때가 12월 말경이었다.”
첫 신고를 받은 후 한 달 반 넘게 발품을 팔며 돌아다닌 결과 얻어낸 소중한 수확이었다. 하지만 수사팀에게는 나머지 일당 두 명도 검거해야 하는 의무가 남아 있었다. 김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지은 수사팀은 이날부터 조를 나눠 김 씨를 따라붙었다. 특별한 직업이 없는 김 씨는 PC방을 전전하며 하루를 보내거나 경마장을 들락거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루한 잠복수사가 계속됐다. 이어지는 허 형사의 얘기.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시작된 잠복수사는 이듬해 봄까지 계속됐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넉 달째 밤낮없이 이어진 미행과 잠복에 팀원들이 지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양민이 한 PC방에서 나오는 것을 본 우리는 그가 앉았던 자리로 급히 들어가 그가 남기고 간 담배꽁초를 수거해 국과수에 DNA 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예전에 춘천 아파트 자동점멸 센서등에 부착되어 있던 휴지에서 나온 침의 DNA와 동일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양민 일당이 범인이라는 것이 더욱 확실해진 셈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일당을 검거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자신했던 수사팀의 기대와 달리 다른 두 명의 실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4월 14일 통신수사 등 최첨단 수사기법을 동원해 공범 두 명의 동선을 파악한 수사팀은 김 씨는 물론 경마장에서 도박을 하고 있던 일당 두 명까지 모조리 검거, 특가법상 절도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무려 5개월여 동안 이어진 수사였다.
조사결과 밝혀진 이들의 범행은 이렇다. 같은 동네 선후배로 알고 지내온 김 씨 등은 사업 실패 등으로 큰 빚을 지고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지내오고 있었다. 생활비와 빚 등에 시달리던 이들은 2006년 4월경 ‘돈 될 만한 일’을 찾던 중 위험한 범행을 공모하게 된다. 절도 전과가 있었던 김 씨는 자신이 개발한 신종 수법을 이용한 범행을 제안했다. 이들이 범행 장소로 택한 곳은 모두 디지털도어록이 설치돼 있는 새로 지은 고급아파트.
문을 따는 일, 망을 보는 일, 금품을 훔치는 일 등 역할분담을 한 이들은 주민들의 경계가 심하지 않은 낮이나 초저녁 시간을 택해 사전에 벨을 눌러보고 빈집임을 확인한 후 범행에 착수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디지털도어록의 잠금장치만 믿고 외출한다는 사실을 간파했던 이들은 드릴로 디지털도어록 옆에 미세한 구멍을 뚫고 그 사이로 구부린 철사를 넣어 눈 깜짝할 사이에 문을 따고 집안에 침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열을 가하면 디지털도어록의 회로가 쉽게 망가진다는 사실을 알고 전기충격기를 이용해 디지털도어록의 센서를 무력화시키는 지능적인 수법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