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서거 뒤 돌멩이 하나도 못 건들게 했다
1967년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 신당동 가옥. 사진제공=서울시
서울 중구 신당동 다산로 36가길 25번지. 현대식 건물이 늘어선 골목 끝에 시간이 멈춘 듯 붉은 기와를 얹은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담장 밖으로는 향나무와 목련나무 대추나무 등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대문 옆에 서있는 ‘등록문화재 제412호 신당동 박정희 대통령 가옥,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안내판이 이곳이 한국현대사의 주요한 한 장면인 5·16군사정변의 산실임을 나타내고 있다.
굳게 닫혀있던 박정희 전 대통령 신당동 가옥의 대문이 오는 3월 중 일반에 개방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는 박 전 대통령이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신당동 가옥의 모습을 복원하는 막바지 작업을 하면서 관람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신당동 가옥은 박 전 대통령이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육영수 여사를 비롯해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3남매, 육영수 여사의 어머니인 이경령 여사와 함께 생활했던 집이다. 박 전 대통령이 신당동 가옥에서 거주한 것은 채 4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신당동 가옥이 서울시 등록문화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 서재에서 박 전 대통령이 5·16군사정변을 계획하고 지휘한 데다 박 전 대통령이 살았던 집들 중 거의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당동 가옥은 대지면적 341㎡(103평), 본관 건물 128㎡(42평) 정도의 크기다. 이 집은 일제강점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자회사인 조선도시경영주식회사가 1930~40년대 장충동과 신당동 일대에 일본인들을 위한 주택 보급을 위해 지은 일본식과 서양식을 절충한 ‘문화 주택’ 가운데 하나다.
박 전 대통령은 이 집을 제7사단장에 재직 중이던 1958년에 매입했다. 평평한 골목길 끝에 완만한 오르막길 끝 부분에 위치한 이 집을 선택한 이유는 “부엌에 물이 들지 않는 곳에 살고 싶다”는 육영수 여사의 바람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요신문>은 박 전 대통령의 가옥에 얽힌 사연을 보다 자세히 취재하기 위해 박근령 전 육영재단 이사장을 어렵사리 섭외해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가옥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일요신문>과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가 전근이 잦아 타지로 이사하는 일이 많았다. 신당동 가옥은 이사가 잦던 부모님이 처음으로 마련한 ‘내 집’이라 두 분 모두 애착이 많으셨다. 물론 은행융자가 반이었지만 어머니는 형편이 닿는 대로 고치고 다듬어 집을 사용하셨다”라며 “큰 대문 옆에 쪽문을 내고 ‘ㄱ’자 화단과 꽃 터널을 만드셨던 것도 모두 어머니 아이디어였다. 마당에 있는 향나무는 아버지가, 목련나무는 어머니가 심었다. 신당동 집에는 어머니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육영수 여사는 신당동 가옥으로 이사 온 뒤 7개월 만인 1958년 12월 아들 박지만 회장을 낳았고, 제7사단장이던 박 전 대통령은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에 박 전 대통령 가족들은 신당동 가옥을 “좋은 집터”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박근령 전 이사장은 “동생(박지만 회장)이 태어나던 날 안방 옆에 있는 방에서 언니(실제로는 VIP라고 칭함)와 함께 밥을 먹고 있었는데 어머니 진통이 시작됐다. 그 작은 방에서 언니와 함께 어머니 진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그 때를 기억했다.
육영수 여사가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모습. 사진제공=서울시
무엇보다 신당동 가옥 개방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곳 서재가 5·16 군사정변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은 신당동 가옥 서재에서 5·16 군사정변을 계획하고 지휘했다. 당시 신당동 가옥에는 군 장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61년 5월 15일 밤에는 장태화, 김종필, 이낙선 등이 모두 신당동 가옥에 모였다.
거사 하루 전 육영수 여사는 안방에 근령·지만 남매를 재운 뒤 집을 나서는 박 전 대통령에게 작은 가방에서 권총을 꺼내 줬다. 박 전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가 꺼내 주는 권총을 차고 마루에서 군화를 신으면서 “내일 아침 5시 라디오를 틀어보오”라는 말을 남기고 신당동 가옥을 나섰다. 박 전 이사장은 “당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머니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버지와 주고받은 편지를 모두 태워 묻었다고 한다. 지금도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 전 대통령은 1962년 10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했다. 박 전 대통령이 최고회의 의장으로 취임한 뒤 의장관사로 가족이 이주하면서 신당동 가옥은 한동안 이경령 여사가 혼자 지키게 된다.
1963년 박 전 대통령과 그 가족들은 청와대로 들어간다. 하지만 청와대에 머무는 동안에도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는 종종 신당동 가옥을 찾았다. 특히 육영수 여사는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신당동 가옥을 찾아 집을 둘러보고 갔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몸이 약한 박 전 이사장을 데리고 신당동 가옥 거실에서 요가를 함께 하기도 했다.
박 전 이사장은 “아버지는 워낙 바빠 신당동 가옥에 자주 들르시지 못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청와대 생활이 끝나면 돌아갈 곳이라며 신당동 가옥을 자주 데려가셨다. 어머니와 신당동 가옥 거실에서 요가를 하며 체력을 관리하기도 했다. 1974년 어머니가 서거하기 전까지 이곳에 어머니 없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박 전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 서거 이후 신당동 가옥 관리인에게 “집을 함부로 고치지 말라. 돌 하나 옮기더라고 꼭 알려 달라”고 한 것도 육영수 여사의 손길이 집 곳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시가 신당동 가옥을 1960년대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려고 한 것도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거주 시절 모습을 최대한 복원하기로 유족 측과 협의했기 때문이다.
서울시 김수정 문화재연구팀장은 “박 전 대통령이 집을 매입했던 1958년부터 5·16이 일어나기 직전인 1961년까지 가족과 함께 생활했던 신당동 가옥의 모습으로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며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유족이 사용했던 가구들과 물품들을 빼고, 박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등이 사용했던 탁자와 가구들을 최대한 원형에 가깝게 재현해 내려고 하고 있다. 3~4월 중에는 개방이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