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출 수 없다면 죽어’ 잔혹한 이별통보
▲ 영화 <밀애> | ||
그리고 실종 나흘째 되던 날 한 씨는 경기도 양평의 한 야산에서 처참한 사체로 발견된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약 13년 전 발생한 일명 ‘강남 음악학원 원장 피살사건’으로 11년간이나 이어온 불륜이 야기한 비극에 대한 얘기다.
무슨 일인지 밤이 돼도 한 씨는 귀가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곧 돌아오겠지’ 하는 심정으로 기다렸지만 한 씨로부터는 끝내 아무 소식이 없었다. 여지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한 씨의 남편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통상적으로 성인의 경우 실종신고가 접수되면 먼저 실종이냐, 가출이냐를 가리는 작업을 한다. 한 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수사팀은 우선 가족들과 주변인물들의 진술을 토대로 한 씨가 스스로 가출하거나 잠적했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명문음대 출신으로 바이올린 학원을 운영하고 있던 한 씨는 미모와 실력을 겸비한 엘리트 여성이었다. 한 씨는 결혼 후에도 전공을 살려 음악학원을 경영해온 커리어우먼으로 주변에서 상당히 평판이 좋았다. 겉으로 볼 때 한 씨가 자발적으로 가출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했다. 한 씨는 명문대 출신 공무원 남편과 두 아들을 둔 주부였다. 수사팀이 조사한 결과 한 씨는 가정사도 원만했으며 타인과의 금전거래 관계에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한 씨의 가족과 측근들은 “한 씨가 갑자기 잠적할 이유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도 한 씨에게서는 특이한 조짐이 없었으며 당일도 한 씨는 여느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수사팀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바로 사건 당일 한 씨의 은행거래 내역이었다. 조사결과 한 씨가 학원을 나선 지 약 4시간 만인 오후 2시 30분께 그녀의 통장에서 거액이 인출된 것이 확인됐다. 돈이 인출된 곳은 뜻밖에도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한 은행이었는데 무려 2200만 원이 인출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발적인 가출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는데, 2000만 원이 넘는 금융거래 내역이 드러남으로써 강도에 납치당했을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예금이 전액 현금으로 인출됐다는 것은 범행연루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주기에 충분했다. 수사팀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은 한 씨가 학원을 나선 지 불과 4시간 만에 거액이 인출됐다는 사실이었다. 만에 하나 한 씨가 범죄에 연루됐다면 한 씨의 생사조차 확신할 수 없는 셈이었다.
한 가지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한 씨가 사건 당일 오전 10시 30분께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학원을 나섰다는 사실이었다. 이날 한 씨가 만난 사람이 한 씨의 실종에 개입됐거나 그녀의 행방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한 씨가 만난 사람이 누군지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씨가 누구를 만나러 나갔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한 씨의 음악학원을 살펴보던 수사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책상위에 있던 달력이었다. 한 씨는 평소 약속이 정해지면 그 내용을 개인달력에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실제로 달력에는 약속과 관련된 여러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수사팀은 사건 당일인 25일자란에 적혀 있는 ‘10:30’이라는 메모에 주목했다. 10시 30분은 바로 한 씨가 ‘약속이 있다’며 학원을 나선 시각이었다. 이상한 것은 이날 달력에 적힌 메모가 다른 메모들과 달랐다는 점이었다. 다른 메모에는 약속시간은 물론 약속장소와 만나는 사람 등에 대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으나 유독 이날 메모에는 달랑 시간만 적혀 있었던 것이다.”
장소와 대상이 없는 의문의 메모. 분명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달력에 적힌 과거 메모들을 샅샅이 살펴보던 수사팀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포착하기에 이른다. 시간만 남겨져 있는 메모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확인 결과 시간만 표기된 의문의 메모는 매달 한두 번꼴로 적혀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메모에는 약속대상을 일차적으로 남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수사팀은 실종당일 한 씨가 만난 인물이 그동안 한 달에 한두 번꼴로 만나왔던 사람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했다. 베일에 싸인 메모형식으로 짐작건대 한 씨가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사람과 은밀한 만남을 가져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단순 강도사건이 아니라 치정에 얽힌 사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대체 한 씨와 비밀리에 만남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일까. ‘떳떳할 수 없는 관계라…?’ 수사팀은 한 씨가 가정이 있는 유부녀라는 사실에 근거, 불륜관계를 의심했다. 하지만 한 씨가 학원을 운영하면서도 평소 남편과 자녀들에게 일체의 소홀함이 없었다는 주변의 증언을 들어보면 섣불리 판단할 부분도 아니었다.
수사팀은 한 씨의 동창들로부터 예기치 못한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바로 한 씨에게 대학교 때부터 사귀어 온 ‘연하의 내연남’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박창익 씨(가명·30). 그가 한 씨의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내연남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박창익 씨는 전과 하나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유부남이었는데 당시 그의 부인은 출산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한때 제조회사에 근무하다가 퇴직한 바 있던 박 씨는 특정한 직업이 없었다. 충격적인 것은 박 씨는 한 씨가 대학시절부터 사귀어 온 인물로 아주 오래된 사이였다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여대생과 고등학생이었던 11년 전에 처음 만나 연인으로 발전했는데 각자 결혼한 후에도 불륜관계를 이어온 것으로 드러났다.”
한 씨의 주변인물로부터 두 사람이 최근까지도 부적절한 만남을 이어왔다는 진술을 확보한 수사팀은 사건 당일 한 씨가 만난 사람이 박 씨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박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본 수사팀은 즉시 그의 행적을 쫓기 시작했다. 특히 한 씨의 책상에서 발견된 박 씨의 전화번호는 두 사람이 계속 연락해왔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하지만 박 씨가 유부남인 데다가 그의 부인이 출산을 앞둔 임산부라는 점에서 수사팀은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박 씨를 범인으로 확신할 만한 증거가 부족했다. 박 씨가 내연남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범인으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수사팀이 박 씨의 집을 찾아갔을 때 예상대로 그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다. 한 씨와 알고 지낸 것은 사실이지만 한 씨의 행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수사팀은 박 씨가 범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우선 그는 한 씨가 실종된 25일 하루 동안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 명확히 설명하지 못했다. 또 한 씨와 관계된 수사팀의 질문에 그는 상당히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초조해했다.
특히 수사팀은 사건 당일 오후 한 씨의 예금통장과 도장을 들고 경기도 하남시의 은행에 찾아와 2200만 원을 인출한 사람이 모자를 눌러 쓴 젊은 남성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은행 직원에 따르면 그는 ‘직원들에게 월급으로 줄 현금이 필요하다’며 전액을 현금으로 찾아갔다는 것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박 씨의 금융거래 내역이었다. 사건 당일 박 씨는 자신과 부인 명의로 된 6개 은행 9개 계좌에 100만~200만 원씩 총 1750만 원을 분산입금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한 씨의 계좌에서 2200만 원이 출금된 직후 벌어진 일이었다. 단순한 우연으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을 더 끌 경우 한 씨의 생사가 위험하다는 판단에 수사팀은 황급히 박 씨를 추적했다. 그리고 박 씨가 강원도 화천의 친구 집에 머물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수사팀은 강원도로 형사대를 급파, 28일 오후 3시 반경 화천읍 평화의 댐 근처에 세워진 박 씨의 차량을 발견했다. 오후까지 자신의 차 안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던 박 씨는 수사팀이 출동한 것을 알아채고 인근 강으로 투신을 시도했으나 격투 끝에 수사팀에게 검거됐다.
박 씨의 차량에서는 먹다 남은 소주 10여 병이 뒹굴고 있었다. 검거된 후 박 씨는 심히 괴로운 표정으로 일관했을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얼마 후 수사팀의 추궁 앞에 박 씨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자신의 범행 일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건은 잘못된 만남에서 야기된 전형적인 치정살인극이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무려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강남의 한 교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처음에는 ‘누나 동생’으로 지내다가 자연스레 연인으로 발전했다. 당시 한 씨는 대학교 3학년, 박 씨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둘은 연상연하라는 현실적인 걸림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풋풋한 사랑을 키워나갔고 대학생이었던 한 씨는 박 씨에게 “서울대에 진학하면 결혼해주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하지만 이후 박 씨는 전문대에 진학했고 몇 년 후 한 씨는 서울대 출신의 공무원과 결혼을 하게 된다. 박 씨 역시 한 씨가 결혼한 이듬해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결혼한 후에도 관계를 끊지 못했다. 박 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한 달에 한두 차례씩 서울 근교 유원지 등에서 몰래 비밀스런 만남을 이어나갔다. 수사팀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한 씨의 달력에 표기돼 있었던 의문의 메모는 바로 박창익과의 밀회를 약속한 시간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박 씨의 진술에 따른 내용이다.”
박 씨는 왜 한 씨를 살해한 것일까. 사건 당일 오전 11시경 한 씨의 동네 근처에서 만난 두 사람은 한 씨의 승용차를 타고 양평으로 향했다. 오후 1시 30분께 양평의 한 야산에 도착한 두 사람은 승용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말다툼을 하게 된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박창익은 한 씨에게 ‘둘 다 가정도 있으니 이제 그만 만나자’고 이별을 통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 씨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불륜관계로 인한 갈등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싸움은 돈 얘기로 이어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박창익에 따르면 한 씨가 ‘빌려간 돈 500만 원이나 갚아라. 안 그러면 니네 아버지와 부인에게 우리 불륜사실을 폭로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으며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결국 한 씨의 말에 격분한 박창익은 한 씨를 폭행해 실신시킨 뒤 자동차 트렁크에 가뒀다가 목졸라 살해하고 사체를 야산에 유기했다. 한 씨를 살해한 후 박 씨는 한 씨의 핸드백에서 통장과 도장을 꺼내 2200만 원을 인출했다. 조사결과 한 씨는 한 씨의 승용차를 세차한 뒤 한남대교 인근의 한강시민공원에 버리는 치밀함을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양평군 강하면의 한 야산에서 자동차 커버에 덮여있는 한 씨의 사체를 찾아내고 수사를 종결지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