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돈 토해내라고?’ 돌아버린 공사업자
극장 3층에 위치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간 A 씨는 다급하게 극장 대표 탁중근 씨(가명·74)를 불러댔다. 사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탁 씨를 찾던 A 씨는 잠시 후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나자빠지고 말았다. A 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싸늘하게 식어있는 탁 씨의 주검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18년 전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던 일명 ‘애관극장주 살인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 보자.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전화도 안 받고….” 이날 오전 8시가 조금 넘은 시각. A 씨는 수십 분째 전화통을 붙들고 있었다. A 씨가 전화를 걸고 있는 사람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애관극장 대표 탁중근 씨였다. A 씨는 이날 탁 씨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약속시간이 한참이 지나도록 탁 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탁 씨는 평소 약속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매사에 철두철미했던 탁 씨의 성격으로 봐서 그가 약속을 잊어버렸을 리도 만무했다. 더욱 이상한 점은 이날 따라 탁 씨와 전화연락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A 씨는 결국 탁 씨가 기거하는 곳으로 직접 찾아갔던 것이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발견 당시 탁 씨는 소파 위에 엎어진 채 이불에 덮여 있었는데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체의 목 주위에 나있던 자국이었다. 탁 씨의 목에는 둔탁한 끈으로 두 번 감긴 흔적이 있었는데 누군가 탁 씨를 제압하고 목을 조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체에는 이렇다 할 큰 외상이 없었다. 왼쪽 무릎 부분에 주먹 크기의 멍이 들어 있고 피부가 살짝 벗겨진 것 정도였다. 탁 씨의 사체에서는 심한 구타의 흔적이라든지 반항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사체의 상태로 보아 탁 씨는 사망한지 10시간이 채 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됐다. 즉 이날 늦은 밤에서 새벽 시간대에 변을 당했을 확률이 높았다. 이날 탁 씨에게는 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사팀은 우선 탁 씨에 대한 기초조사에 들어갔다. 특이한 점은 탁 씨가 그 당시 인천지역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는 사실이었다. 인천 최대의 개봉관인 애관극장의 소유주였던 탁 씨는 극장 외에도 인천·경기지역에 무려 열 개가 넘는 주유소와 냉동회사 등을 소유하고 있는 수백억 원대의 재력가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였지만 탁 씨는 뛰어난 사업수완을 지니고 있는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고, 나름의 확고한 경영철학에 입각해 사업을 운영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탁 씨의 갑작스러운 피살소식은 지역주민뿐 아니라 그를 알고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도 충격 그 자체였다.
부검 결과 탁 씨의 사인은 경부압박질식사로 판명됐다. 수사팀은 탁 씨의 사체가 발견된 사무실이 비교적 깨끗하고 물건을 뒤진 흔적이 없는 점 등으로 볼 때 적어도 금품을 노린 단순강도에 의한 범행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가장 유력한 것은 면식범에 의한 범행가능성이었다. 수사팀이 면식범의 범행이라고 판단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사체에 이렇다 할 큰 외상이나 반항흔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통상적으로 강도에게 변을 당했을 때 피해자에게서는 심하게 반항한 흔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추정 범행시각으로 볼 때 범인은 야밤에 탁 씨의 사무실에 침입했는데 이는 범인이 탁 씨가 평소 집이 아닌 극장내 사무실에 혼자 기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근거였다. 단순히 금품갈취를 목적으로 한 침입이 아니라 애초부터 탁 씨를 타깃으로 한 범행일 가능성을 높았다는 얘기다. 수사팀은 건장한 체격의 탁 씨를 순식간에 목졸라 살해한 것으로 보아 범인은 2명 이상의 면식범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수사를 진행해 나갔다.”
수사 과정에서 탁 씨는 극장 인근에 부인, 맏아들 내외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 따로 있었으나 주로 극장 3층에 마련한 개인 사무실에서 혼자 기거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이 발생한 날도 마찬가지였다.
극장 관계자에 따르면 사건 당일 이 극장에서 마지막 영화상영이 끝난 시각은 밤 9시 10분경이었다. 그리고 이날 마지막 영화를 본 관람객은 대략 50여 명이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난 후 모든 관람객이 극장 밖으로 빠져 나갔고 바로 출입문이 봉쇄됐다고 한다. 수사팀은 이날 오후 9시 40분께에도 탁 씨가 극장 안에 있었다는 극장 직원의 말에 따라 폐관 이후의 출입자를 밝혀내는 작업에 집중했다. 하지만 마지막 영화상영 이후 극장에 들어왔거나 남아있었던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극장에는 또 외부인이 강제로 출입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수사팀의 애를 먹였다. 수사팀은 목격자를 찾는 전단지 2000장을 배포하는 동시에 탁 씨의 주변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병행했다.
범인을 찾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범행동기를 찾는 일이었다. 범행목적에 따라 용의자를 좁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은 사건이 발생하기 전 탁 씨 주변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과 정황 등을 일제히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를 벌였다.
수사팀은 탁 씨가 내로라하는 재력가였다는 점에 주목하고 그의 재산을 노린 면식범이 야밤에 침입, 탁 씨를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또 탁 씨가 극장경영 외에도 주유소 등 다양한 사업을 벌였던 점으로 보아 금전이나 채무, 사업상 원한 및 치정에 의한 범행 가능성도 열어놓고 수사를 진행했다. 우선 탁 씨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조사에 들어간 수사팀은 특히 평소 탁 씨와 사업관계로 접촉했거나 금전거래를 해온 인물들을 상대로 집중적인 탐문수사를 벌였다.
“탁 씨는 지난해 초 인수한 부천시내의 한 관광호텔 건물을 증축하고 있었는데 고령임에도 직접 현장에 나와 공사를 감독하는 등 무척 열의를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호텔을 둘러싸고 여러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정황이 포착됐다. 탁 씨는 관광호텔의 전 소유주에게 6억여 원을 빌려준 후 호텔을 자신의 명의로 가등기한 뒤 양도소송을 거쳐 소유권을 이전시킨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시비가 많았으며 최근까지도 전 소유주와 적잖은 마찰을 빚어왔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진술이었다. 하지만 조사결과 관광호텔의 전 소유주에게서는 아무 혐의도 드러나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수사는 점차 미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수사팀에게 또 다른 첩보가 입수됐다. 이어지는 김 연구관의 얘기.
“호텔 증축과정에서 탁 씨가 공사 관계자 및 사무실 임대업자들과 갈등을 빚어왔으며 자주 말다툼을 벌여왔다는 새로운 증언들이 나온 것이다. 주변인들은 공사 관계자들이 탁 씨가 피살되기 수 일 전부터 탁 씨의 사무실에 자주 드나들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종종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수사팀으로서는 공사를 둘러싼 청부살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탁 씨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는 인물에 대한 첩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수사는 공사에 개입한 여러 하청업자들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진행됐다. 하지만 특별한 혐의가 있는 인물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고 알리바이도 확실했다. 하지만 수사팀의 레이더에 포착된 젊은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수사과정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은 김정식 씨(가명·31)였다. 인테리어업체 대표인 김 씨는 탁 씨가 증축하는 호텔의 내부수리 공사를 수주해 맡아오던 인물이었다. 조사 결과 김 씨는 탁 씨로부터 착수금조로 3000만 원을 받고 공사를 진행해왔으나 탁 씨가 얼마 전부터 공사 부진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공사를 중단시킨 상황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김 씨로서는 탁 씨에게 섭섭한 감정을 품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수사팀은 주변인들을 통해 김 씨가 공사계약 문제로 탁 씨와 심한 갈등을 빚어왔으며 김 씨 어머니 소유로 된 부동산 가압류 문제로 잦은 말다툼을 벌여온 것을 확인하기에 이른다. 수사팀이 조사한 결과 탁 씨는 김 씨 어머니 소유로 된 빌라 6가구에 대해 가압류조치를 해 놓은 상태였다.
더구나 김 씨는 사건당일 행적에 대한 알리바이도 명확하지 않은 상태였다. 범행동기가 충분하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즉시 김 씨에 대한 조사에 들어갔고 얼마 후 김 씨로부터 범행 일체를 자백받는 데 성공했다.
자백 내용은 수사팀의 예상대로였다. 김 씨는 지난해 탁 씨로부터 호텔 내부수리 공사를 1억 3000만 원에 계약했다. 김 씨는 탁 씨에게서 착수금조로 3000만 원을 건네받고 공사를 진행했으나 공사가 부진하다는 것을 이유로 탁 씨는 공사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공사 진행을 두고 갈등을 빚던 두 사람은 그 후 사이가 틀어지게 됐고 계약문제로 인해 잦은 다툼을 벌여왔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탁 씨는 공사 착수금 3000만 원을 내가 개인적으로 빌려간 것으로 서류를 꾸민 뒤 나도 모르게 내 어머니 소유로 된 빌라 여섯 채를 가압류했다”는 것이 김 씨의 주장이었다. 공사 진행을 두고 시작된 두 사람의 갈등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김 씨와 탁 씨가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주변인들에게 포착되기도 했다.
김 씨는 경찰에서 “그동안 무려 20여 차례나 탁 씨를 찾아가서 가압류를 풀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고 항변했다. 결국 김 씨는 21일 밤 10시경 탁 씨를 다시 한 번 찾아가기에 이른다. 그리고 당장 압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탁 씨는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이에 격분한 김 씨는 탁 씨를 주먹으로 때려 쓰러뜨린 뒤 넥타이로 목을 졸라 살해한 것이었다.
조사 결과 김 씨는 탁 씨를 살해한 후 단순 강도살인 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해 사무실에 있던 극장 수입금 1200만 원을 훔쳐 달아난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팀은 김 씨가 훔친 1200만 원 가운데 쓰고 남은 800만여 원을 김 씨의 자택 피아노 밑에서 찾아 압수함으로써 수사를 종결지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