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사실 숨기려고…
▲ 한남대교 | ||
“또 누가 쓰레기를 여기다 몰래 갖다 버렸군. 에잇! 양심도 없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넣지 않고 후미진 곳에 아무데나 놓고 사라지는 일은 평소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다. A 씨는 투덜거리며 쇼핑백을 리어카에서 꺼내들었다. 쇼핑백은 뭐가 들어있는지 한 손으로 들어 올릴 수 없을 만큼 묵직했다. 낑낑거리며 간신히 쇼핑백을 끌어낸 A 씨는 화를 억누르며 쇼핑백 안을 살폈다. 쇼핑백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뭔가가 쓰레기봉투에 담긴 채 들어 있었다.
잠시 후 무심코 봉투 안을 들여다 본 A 씨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저앉고 말았다. 대형 쓰레기봉투에 들어있는 것은 피투성이 상태의 사체토막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김원배 경찰청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사건은 지난 1997년 발생한 일명 ‘나이트클럽 여종업원 토막살인사건’이다.
우선 당시 상황에 대한 김 연구관의 얘기를 들어보자.
“사체는 여러 토막으로 잘려진 채 쓰레기봉투에 담겨 있었다. 아무렇게나 잘려진 사체는 정말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끔찍했다. 더욱이 신체 일부는 없는 상태였다. 이는 범인이 다른 곳에 나머지 사체 조각을 유기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장 시급한 일은 사체의 신원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손과 발, 특히 머리 부분이 없어 피해자를 확인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토막난 사체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피해자의 성별과 연령대에 불과했다. 수사팀은 사체의 몸통 등으로 보아 피해자가 여성이고 40대로 추정된다고 판단했다. 또 혈액응고 및 신체조직 상태, 그리고 상당히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부패가 거의 진행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범행이 발생한 지는 며칠 안되는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그날 오후 2시경. 서초구 잠원동의 수상 스키장 부근에서 또다시 사체 일부가 발견된다. 한강 물에 떠다니던 검은색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놀랍게도 잘려진 여인의 머리 부분이었다.
수사팀은 같은 날 인접지역에서 사체 토막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동일인의 사체일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여인의 머리부분 역시 부패가 크게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수사팀은 우선 발견된 사체 일부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식을 의뢰하는 동시에 여인의 신원을 파악하는 작업에 주력했다. 수사팀은 사체 토막들이 강남에도 발견됐다는 점과 이쪽 지역에서 사용되는 쓰레기봉투에 담겨 있었다는 점 등을 토대로 탐문 수사를 진행하는 한편 이 지역 일대의 가출인과 실종자 명단 파악에 들어갔다. 감식결과 사체조각들은 모두 동일인의 것으로 판명됐다.
수사팀은 사체 발견 직후 작성한 몽타주 대신 화가에게 정밀한 몽타주를 의뢰해 배포하는 등 신원 확인에 박차를 가했다. 강남지역을 발칵 뒤집어놓을 사건의 엽기성 때문이었을까. 사람들은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이며 제보를 해왔다. 수사는 초기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수사팀은 토막 사체가 발견되기 하루 전 청담동의 주택가에서 흉측한 물건들이 담긴 비닐봉투가 있다는 신고가 들어온 사실을 파악했다. 동네에 사는 한 할머니가 발견한 비닐봉투에는 온통 피로 범벅이 된 수건 4장과 고무장갑, 그리고 맥주병이 들어있었다. 혈흔이 어찌나 많이 묻어있던지 도저히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수사팀은 피묻은 수건과 장갑이 분명 살인 등 강력범죄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했고 이번 여인 토막살인 범행에 사용됐을 것으로 판단했다. 최근 청담동 일대에는 토막살인 사건 외에는 별다른 강력사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비닐봉투가 발견된 곳은 공교롭게도 사체가 발견된 곳과 인접한 곳이었다.”
수사팀은 문제의 피묻은 수건과 장갑을 수거해 서울대 병원에 혈흔 분석을 의뢰했고 비닐봉투와 맥주병에서도 지문을 채취, 용의자 추적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수사팀은 중요한 제보를 듣게 된다. 피살된 여인의 몽타주를 본 청담동의 한 목욕탕 종업원이 여인을 자주 봤다는 증언을 한 것이었다. 목욕탕 종업원은 “몽타주 속의 여인은 올 1월까지 우리 목욕탕에 자주 왔었다. 확실하다”고 말했다. 수사팀은 목욕탕 종업원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언급한 “마른 체형이고 얼굴은 둥근편이다. 턱이 길지 않다”는 피살 여인의 인상 착의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이 목욕탕에 수시로 들어왔다는 점으로 보아 피살된 여인은 청담동 인근에 거주하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무도 이 여인의 신원이나 개인사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수사팀은 살해된 여인의 얼굴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한 컬러전단 2만여 장을 제작해 강남 일대에 배포, 신원확인 작업에 총력전을 펼쳤다.
하지만 언제까지 동네주민의 제보만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사팀이 주목한 것은 따로 있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피살된 여인의 얼굴에는 쌍꺼풀 수술을 한 흔적이 있었다. 또 코에서도 실리콘 보형물이 발견됨에 따라 코 수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전문의에게 확인결과 이 여인은 1~2년 전에 코 수술을 한 것 같다는 소견이 나왔다. 수사팀은 이 여인이 강남일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것으로 보고 이 지역 일대 성형외과를 일일이 돌아다니며 탐문 수사를 진행했다. 또 여인이 흰머리가 많은 데다가 주기적으로 염색을 해왔다는 점을 밝혀내고 인근 미용실 등을 찾아다니며 여인의 행적을 추적해나갔다.”
끈질긴 탐문수사 결과 드디어 여인의 신원이 밝혀졌다. 사체가 발견된 지 꼭 일주일 만이었다. 피살된 여인은 강애경(가명·36). 강남구 논현동의 한 나이트클럽 종업원으로 근무하던 여인이었다.
피살자의 신원이 밝혀지자 수사는 활기를 띠었다. 수사팀은 범행 수법이 잔혹하다는 점으로 미뤄 치정이나 원한살인으로 추정하고 강 여인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1차조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가족이나 친구 등 강 여인과 가장 가깝다고 판단되는 인물들 중에는 강 여인의 죽음과 연관지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알리바이가 정확했을 뿐 아니라 강 여인을 그토록 잔혹하게 살해할 만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들은 대부분 강 여인이 잔혹하게 살해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동안 강 여인과 교류를 하지 않고 지내온 탓이었다.
이에 수사팀이 주목한 대상은 강 여인이 근무했던 나이트클럽 관계자들이었다. 이들은 강 여인과 직장동료로 사건 발생 직전까지 강 여인과 접촉했던 사람들일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수사팀의 예상은 적중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강 여인은 사체로 발견되기 직전까지 나이트클럽에서 근무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클럽 관계자들에 따르면 강 여인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8월 22일이었다. 사체가 발견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이날 새벽 2시경 강 여인은 영업을 마치고 클럽 동료 6명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강 여인은 클럽에 출근하지 않았고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동료들과 헤어진 후 강 여인에게는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동료들은 강 여인의 행방에 대해 모두들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클럽 관계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팀은 의심스런 인물을 포착하게 된다. 바로 클럽 종업원으로 근무하던 고한석 씨(가명·24)였다.
동료들의 진술에 따르면 고 씨는 22일 새벽 술자리에 참석한 일행 6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고 씨는 동료들이 모두 자리를 뜬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강 여인과 자리에 남아 있었다. 더욱 이상한 점은 고 씨 역시 다음날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고 씨는 그날 이후 연락이 두절된 상태로 수일동안 잠적해 있었다. 고 씨가 다시 나타난 날은 나흘 후인 8월 27일. 하지만 고 씨는 돌연 클럽을 그만둔 것으로 드러났다.
고 씨가 어떤 식으로든 강 여인 피살사건과 연관 있을 것으로 판단한 수사팀은 고 씨의 가족과 친인척, 동료 등을 상대로 고 씨의 소재파악에 들어갔다. 또 고 씨가 해외로 도피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수사팀은 법무부에 고 씨의 출국금지를 요청했다.
수일 동안 두문불출하던 고 씨가 수사팀의 레이더에 포착된 것은 8월 30일. 이날 오후 3시경 청량리역 인근에서 친척을 만나기 위해 배회하던 고 씨는 첩보를 입수하고 잠복 중이던 수사팀에 의해 검거됐다.
고 씨는 경찰에서 자신의 모든 범행 사실을 순순히 인정했다. 강 여인을 살해한 후 시신을 토막내 유기했다는 것이었다. 사건은 클럽 동료들과 술자리가 있었던 22일 새벽에 일어났다.
그렇다면 고 씨는 왜 강 여인을 살해한 것일까.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 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늦은 새벽까지 술자리에 남아 있었다. 술을 마신 고 씨는 상당히 취기가 오르자 강 여인을 청담동에 소재한 자신의 애인 집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이날 고 씨는 강 여인과 성관계를 가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에 일어났다. 고 씨에 따르면 관계를 가진 후 강 여인이 갑자기 태도가 돌변했다는 것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고한석은 ‘강 여인이 갑자기 나를 성폭행범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고 씨가 자신을 강간했다며 난리를 피더라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고한석이 강 여인의 고소 얘기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시 고한석은 몇 달 전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고한석은 강 여인을 붙들고 몇 시간을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한다. 강 여인과 싸우던 고한석은 강 여인이 너무도 강경한 모습을 보이자 결국 살해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집유 기간인 자신의 처지에서 강간으로 고소를 당하면 형이 집행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강 여인을 살해했다는 것이 고한석의 얘기였다.”
고 씨는 강 여인의 목을 흉기로 찔러 살해한 뒤 욕실에서 사체를 6등분으로 토막낸 뒤 쓰레기봉투에 담아 한남대교 쓰레기장 등지에 유기했다. 수사팀은 청담동의 한 아파트 부근에서 강 여인의 팔과 다리 등 남은 사체 부분을 회수했으며 인근 야산에서 범행에 사용된 쇠톱을 찾아냄으로써 수사를 종결지었다.
경찰에서 고 씨는 “내가 살려면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진술해 수사팀을 경악케했다. 또 범행수법이 잔혹한 것에 대해서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고 씨는 손가락의 지문을 지우고 사체를 토막내 여러 곳에 유기하는 등 나름 완전범죄를 꿈꿨지만 수사팀에게는 스물네 살 청년의 어설픈 범행에 불과했다.
조사결과 고 씨는 강 여인을 클럽에서 알게 됐는데 두 사람이 안지는 불과 열흘 정도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두 남녀의 하룻밤 잠자리의 대가치고는 너무도 잔혹한 사건이었다.
김원배 연구관의 사건 회고
20대 청년 살인 동기 기막혀
김원배 수사연구관은 이 사건을 얘기하면서 최근 한순간의 감정을 누르지 못해 발생하는 우발 살인사건이 유독 자주 발생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옛 말에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살인사건들을 들여다보면 그 말이 진리예요. 당시에는 도저히 참지 못할 일들도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순간 무력으로라도 사건을 해결하거나 당장 매듭지어야 한다는 생각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에게 더욱 위험하다고 생각됩니다. 순간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의 일생이 한순간에 구렁텅이로 빠지는 경우를 저는 많이 봐왔습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