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 이름에 왜 내 이름 써” 항의도 줄줄줄
아무리 사건의 홍수 속에 파묻혀 사는 강력팀 형사들이라지만 유독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사건이나 범인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잔혹하고 엽기적인 사건이나 수사과정에서 지독히 애를 먹였던 피의자일수록 그 기억은 오래 가는 법이다.
사건 선정은 과거 국내에서 발생한 사건들 중 엽기적이거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들 위주로 이뤄졌는데 95% 이상이 살인사건이었다. 3년여에 걸쳐 연재된 수사백서를 마치면서 연재 과정에서 발생한 각종 에피소드와 뒷얘기 등 못다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정리했다.
수사백서에서는 90년대 이전에 발생한 사건들이 많이 다뤄졌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게임 등 외적인 면에서는 화려한 성과를 거뒀지만 내적인 면에서는 민주화 운동과 함께 각종 욕구와 불만이 분출되면서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80년대에는 시대적 혼란과 맞물려 유독 엽기적인 범죄들이 자주 일어났다. 당시 서울경찰청 강력계에서 근무했던 김원배 연구관은 이 시기를 “역동적인 사회발전의 이면에서 지능적인 범행수법들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때”라고 진단했다.
그 시절 모든 강력사건들을 취합하는 자리에 있었던 김 연구관은 무려 7000여 건의 강력사건 수사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수사경험을 집대성해 <한국의 살인범죄 실태와 수사>라는 방대한 파일을 작성, 기자에게 제공해줬다. 여기엔 사건 발생부터 범인 검거에 이르기까지의 수사의 전 과정이 담겨있다. 당시 담당 형사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진행했던 수사백서는 82화부터 김 연구관의 사건 파일을 토대로 재구성됐다.
사실 수사백서는 기획부터 적잖은 회의감을 들게 했다. ‘과거 사건을 굳이 다시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건들은 피해자들에게는 물론이고 피의자와 형사들에게도 두 번 다시 돌이키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기억임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우리 사회에서 터지는 강력사건 내용을 파악한 결과 수사백서를 진행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겠다는 판단을 내리게 됐다. 시대가 변해도 유사한 유형의 범행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초 수사백서의 기획 의도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과 유사한 범행을 예방하고 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 당시 사건해결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로 뛰며 고생한 수사관들의 회고와 함께 끈질긴 수사 끝에 범인을 검거하는 과정을 리얼하게 그려냄으로써 결국 완전범죄란 없음을 범인들에게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한 독자들과 사건관계자들의 반발에 부딪히는 등 연재과정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등장인물이 모두 가명임에도 불구하고 “범인(혹은 피해자) 이름에 왜 내 이름을 쓰냐” “왜 그렇게 잔인하게 묘사하느냐” “범인을 두둔하는 거냐” “엄연히 강간을 당했는데 무슨 강간미수냐” “그 여자의 행실을 보면 죽을 만했다” “소개팅이 아니라 조건 만남을 하다 벌어졌다” 등의 항의로 기자는 적잖게 시달렸다. 심지어 “왜 전라도에서 발생한 사건만 다루느냐” “기자는 대구랑 원수졌냐”는 식으로 딴지를 거는 독자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수사백서에 등장한 인물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돌이켜보면 수사백서에는 ‘나쁜 녀석들’과 ‘독한 놈들’이 참 많이 등장했다. 모녀를 토막내고 장기와 뼈를 낱낱이 발라 라면박스에 담고 정화조에 버린 전직 승려, 사체 위에 콘크리트를 깔고 3년을 산 노인, 수십 명의 부녀자를 유린한 전도사, 동물마취제를 이용한 연쇄강간범, 노파의 유두를 도려내고 목에 칼을 꽂은 세입자, 내연녀에게 독극물을 먹인 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찍어둔 사진작가 지망생, 아버지를 살해한 대학교수, 애첩을 살해한 교회장로, 초등학생 친딸의 아킬레스건을 자르고 둔기로 폭행해 살해한 아버지, 심지어 자신이 살해한 여성의 사체와 성관계를 한 청년과 살인과정을 비디오로 찍어둔 남자도 있었다.
기자의 가슴을 섬뜩하게 만들었던 피의자들 중에는 여성도 상당수였다. 연모하던 교사를 교실에서 칼로 찔러 살해한 여학생, 평범한 가정주부의 탈을 쓰고 자신의 주변인물 5명을 차례로 독살한 연쇄살인마,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고 마약 구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남편 등 3명을 살해하고 부모와 형제의 눈을 바늘로 찔러 실명시킨 여성, 친구 남편을 사랑한 나머지 친구와 그 아들을 살해한 여고 동창생, 8살 여아를 유괴·살해한 만삭의 임산부, 유학시절부터 교제한 대학강사를 찾아 국내에까지 원정 와서 살해한 대만여인 등등.
먼지가 가득 쌓인 수사기록을 들추거나 당시 범인들과 대질하던 상황을 떠올리며 형사들은 범인에 대한 기억과 수많은 어록들을 쏟아냈다. 대부분 소줏잔을 기울여가며 털어놓은, 하지만 기사에는 차마 쓸 수 없었던 뒷얘기들이었다.
“사체랑 그 짓을 하고나서 한번 더 하고 싶어서 또다시 현장을 찾아갔대” “단발머리를 하고 딱 쳐다보는데 심은하보다 더 예쁘더라니까. 그런 여자가 범인일 줄 누가 알았겠어?” “사체토막을 정화조에 버리고 물을 얼마나 많이 내렸던지 다음날 그 일대가 단수됐다는 거 아냐” “추궁에도 불구하고 염불만 외우는데 미치는 줄 알았어” “가방에 사체가 들어있었는데 돼지고기인 줄 알았어” “은밀한 부분을 다 도려냈더라니까”
형사들과의 뒷담화는 ‘과연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하고 악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수사백서를 연재하면서 기자가 가장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기사작성시 피해자와 피의자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사건과 무관한 기자의 입장에서 한쪽의 편을 드는 것은 분명 아닐진대 독자들의 오해를 사지 않게끔 이 경계를 지키는 것은 보통 예민하고 피곤한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여러 사람을 죽인 ‘잔혹 살인마’라 해도 기사를 작성할 때는 상당히 조심해야 한다. 기자는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뉴스의 한 면을 차지했던 피의자들 중에는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이들도 있고 여전히 죗값을 치르고 있는 이들도 있는데,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눈물로 참회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가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사건 당사자와 주변인들에게는 그 사건을 다시 끄집어내는 행위 자체가 상처라는 사실이다. “겨우 잊고 살아가고 있는데 과거 사건을 다시 들춰내는 저의가 뭐냐” “유가족의 고통을 알기나 하는 거냐” 등의 항의를 3년 동안 지치도록 받았다. “우리 딸이 하늘나라로 간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생생합니다. 기자님이 쓴 기사를 본 아내는 하루종일 밥도 못 먹고 울고만 있습니다”고 하소연한 50대 가장의 원망 섞인 전화에는 무조건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했다.
기사가 나간 후 사건의 주변 인물들로부터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의 뒷얘기나 감춰진 진실에 대해 추가로 듣게 된 경우도 많았다. 부모를 잔혹하게 살해한 패륜 살인사건 범인의 한 지인은 “사춘기 시절 OO가 교회수련회에서 눈물을 떨구며 기도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본성이 착한 친구다. 제발 그런 식으로 매도하지 말라”는 메일을 기자에게 보내기도 했다. 부인을 토막살인한 남자의 자녀는 “저는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를 이해합니다”라며 하염없이 흐느꼈다.
가정폭력과 성적 유린을 일삼는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에 대해 그녀의 딸은 “법은 엄마를 용서하지 않았지만 불쌍한 우리 엄마는 무죄”라고 기자에게 의미있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다.
치정문제에 얽혀 청부살인을 당한 딸을 둔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악을 써가며 항의를 하다 울고불고 하기를 무려 몇날 며칠을 반복했다. 꽃다운 나이에 살해당한 것도 억울한데 자신의 딸이 남의 남자를 뺏은 것으로 묘사됐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우리 OO(딸)의 남자였어! 당신이 그 둘의 관계를 어떻게 알아!”라는 어머니의 항변은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독자들의 수많은 항의에 대한 뒤늦은 기자의 변은 이렇다. “단순 살인사건일지라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입에 담기 힘들 만큼 경악스러운 부분이 많고 공개할 수 없는 영화 같은 사연들을 담고 있다. 즉 기사에는 알고서도 담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이다. 또 과거사건을 다루는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피의자와 피해자에 대한 신상이나 정보들을 바꿔서 써야 하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3년여의 수사백서 연재는 기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줬을 뿐 아니라 사건 기자로서의 자세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과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피해자와 피의자, 또 그들의 주변 인물들의 고통을 등한시한 채 어쩔 수 없이 자극적이고 엽기적인 사건을 찾아 그 뒷얘기들을 끄집어내려 했던 것에 대해선 자책감도 들었다. 또 수사백서로 인해 또다시 악몽을 되새겨야 했던 많은 분들께는 이 자리를 빌어서 사과를 드리고 싶다.
끝으로 2004년 경관 두 명을 살해한 혐의로 수감 중인 이학만 씨로부터 최근 받은 서신을 일부 공개할까 한다.
“영등포구치소에서 만난 목사님이 저에게 천금보다 귀한 생명을 해쳤으니 그분들의 몫까지 살아 빚을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속죄하고 회개하며 정말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종교에 귀의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며 장기기증을 하고 훗날 자원봉사를 하며 살기 위해 갖가지 기술과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기자님, 자기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괴로운 순간을 되새기게 하는 건 매우 잔인한 일입니다. 물론 제가 평생 지고 가야할 짐이고, 죗값이지만 순간의 기억을 되살려 저와 가족이 받는 심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못난 저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만인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그 고통 차라리 제가 받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또 유가족의 마음은 어떨까요? 저는 지금도 제 목숨을 바꿔서라도 저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이 살아 돌아오신다면 백번, 천번 그렇게 할 것입니다. 기자님,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죠. 이런 제 마음을 조금만 이해해주시고 앞으로 기사 쓰실 때 기사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주세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이제 베테랑 형사들이 세월의 갈피 속에 꼭꼭 담아두었던 사건들에 대한 얘기가 끝났다. 아무쪼록 수사백서 연재가 우리 사회의 범죄를 경계하고 사회의 빛과 그늘을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