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악마 등잔 밑 누볐다
▲ 부산 여중생 강간살인 피의자 김길태. 연합뉴스 | ||
하지만 김 씨는 10일 오후 3시께 부산 사상구 관할경찰서 방범순찰대가 수색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견돼 격투 끝에 검거됐다. 김 씨의 납치와 살해, 사체유기와 도피, 은신까지 모두 현장에서 직선반경 500m 내에서 이뤄진 것으로 드러나 열흘 이상 지속된 경찰의 수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작은 동네 안에 숨어있던 김 씨를 잡기 위해 무려 2만 명 이상의 경찰력이 동원된 기막힌 사건의 전말과 ‘아날로그형 범죄자’ 김길태 검거과정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사실은 근래 덕포시장에서 음식물과 현금이 자주 없어진다는 제보가 있었다.” 한 수사 관계자가 뒤늦게 털어놓은 얘기다. 최근의 삼엄한 경계를 감안하면 좀도둑의 소행으로 넘길 일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상인들이 “시장통에서 사고를 치던 양아치와 좀도둑들이 씨가 말랐다”고 했을까. 한 상인은 “대통령의 특별지시 때문인지 분위기가 엄중했다. 간첩이 나타났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앞서 지난 7일 경찰은 한 건의 중요한 제보를 받았다. 덕포시장 인근에 소재한 미용실 주인이 가게에 있던 현금 27만 원이 없어졌다고 신고했던 것이다. 김길태에 대한 공개수배가 떨어진 후 도둑들도 몸을 사리고 있는 상황에서 관내 절도사건은 그냥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길태는 생존을 위해 절도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김길태의 낌새를 알아챈 경찰은 이때부터 덕포시장 일대에 경찰병력을 집중시켰다. 실제로 조사결과 김 씨는 검거 3∼4일 전부터 덕포시장 일대에서 훔친 음식물로 배를 채워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인근에 김 씨의 부모가 거주하고 있는 데다가 번잡한 시장통의 특성상 사람들의 집중적인 시선을 받지 않는 덕포시장에 주목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덕포시장 인근의 한 빌라 옥상에 숨어있던 김 씨를 결국 체포했다.
사건은 지난달 24일 오후 7시께 덕포동 자택에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이 아무개 양(13)이 사라지면서 시작된다. 실종 사흘 만에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앰보경고(실종아동 공개수배 프로그램)를 발령한 경찰은 이 양의 집 형편이 넉넉지 않은 데다가 소지품 등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미뤄 성범죄를 위한 납치로 판단했다. 그리고 다음날 경찰이 용의자로 지목한 인물은 사상구 일대에서 아동 성폭행 등의 전과를 갖고 있었던 김길태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찰은 김 씨가 다수의 전과가 있기는 하지만 살인 전과가 없다는 점에서 이 양의 생존 가능성에 한가닥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이 양은 6일 밤 집에서 직선거리로 불과 50여m 떨어진 다세대 주택의 물탱크 안에서 싸늘한 사체로 발견됐다. 실종 11일 만이었다. 발견 당시 이 양은 나체상태로 포장용 비닐봉지에 담겨있었는데 사체는 석회가루로 덮여 있었다. 경찰은 이 양의 사체에서 발견된 타액 등을 근거로 김 씨를 이번 사건의 피의자로 확정지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부산경찰 전체를 동원해 사건현장을 중심으로 저인망식 수사를 펼쳤지만 김 씨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지 못했다. 지난 9일 기자가 방문했을 때도 덕포동 일대는 검문검색을 하는 경찰들과 전경차들로 빈틈이 없었다. 마을 전체를 포위하듯 에워싸고 곳곳에 포진해있는 경찰들과 수시로 떼지어 이동하는 호송차,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헬기는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 이 양 주검 발견장소.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기자가 현장을 돌아다녀 본 결과 이곳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골목에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며 미로처럼 뒤엉킨 골목길에 누가 다니는지 확인하기도 불가능해 보였다. 또 이웃간 교류도 거의 없었다. 한 주민은 “골목에서 마주치기도 쉽지 않고 주민인지 아닌지도 모른다”고 했으며, 이 양의 옆집에 사는 소년은 “그동안 이 양을 제대로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 씨가 이 점을 악용해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채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김길태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김 씨는 두 살 무렵 주례동의 한 교회 앞에 버려졌다가 현재의 부모에게 입양됐다. 사춘기를 거치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한 그는 상고마저 중퇴하고 1994년부터 절도 등의 혐의로 소년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후 폭행과 절도 등의 범죄를 반복하면서 사회와 단절된 삶을 살았다.
주목할 것은 그의 성폭력 전과다. 1996년 폭력혐의로 기소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김 씨는 집유기간이던 1997년 7월 9세 여아 강간미수 혐의로 검거돼 징역3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01년 4월 출소한 김 씨는 출소 한 달 만에 30대 여성을 납치해 10일간 끌고 다니며 성폭행한 혐의로 또다시 8년을 복역했다. 김 씨가 교도소에서 보낸 기간만도 무려 11년. 하지만 지난해 6월 만기출소한 김 씨는 출소 7개월 만인 지난 1월 23일 또다시 30대 여성을 감금·성폭행한 혐의로 수배를 받아오던 중이었다.
놀라운 것은 정작 주민들은 김 씨가 이토록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딸을 출가시키고 성실하게 살고 있던 김 씨의 부모는 주변에서 ‘정직하고 반듯한 양반들’이라는 좋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형사들이 종종 들락거리는 탓에 불량스런 ‘망나니’ 아들이 노부부의 속을 꽤나 썩인다는 것은 대충 알고 있었지만 오랜 수감생활 탓인지 실제로 김길태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주민들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김 씨네 부모를 알고 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한 이웃은 “몇 달 전 폭력사건으로 그 집에 형사들이 온 것을 봤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며 혀를 내둘렀다.
한 상점 주인은 “소문날 만큼 질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항상 혼자 고개를 끄떡거리며 다녔는데 얌전한 청년이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상인은 “그 늙은 부모는 무슨 죄인가. (입양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옛말에 검은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하더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현재 김 씨는 자신의 혐의에 대해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검거 직후에도 김 씨는 기자들의 질문에 “라면만 끓여먹었다” “그런 거(DNA) 모른다” “앞 사건 때문에 도망다녔을 뿐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찰은 이 양의 몸에서 채취한 DNA와 김 씨의 것이 일치함에 따라 혐의를 밝히는 데는 문제없다고 보고 있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DNA 일치는 성폭행의 증거는 될 수 있지만 살인의 직접 증거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