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권 쥔 ‘무대’ 앞에 줄서기
중동 순방, 리퍼트 대사 피습 여파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급등했지만 여당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반박’ 기류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박 대통령이 3월 9일 세브란스병원 리퍼트 대사 병실을 방문한 모습. 사진제공=청와대
최근 청와대 분위기는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끝 모르게 떨어질 것만 같았던 박 대통령 지지율이 조금씩 상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동 순방에 대한 긍정적 평가,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으로 인한 보수층 결집 등이 그 이유로 꼽힌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지지율이 바닥을 찍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겠느냐. 이제는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할 때다. 여의도(국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여야 대표를 청와대에서 만나기로 한 것 역시 이러한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관측이 나온다.
친박 인사들에게 박 대통령 지지율은 단순한 수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친박이라는 계파를 뭉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분석이다. 지난해 박 대통령 지지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자 친박 진영이 흔들렸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 결과 친박은 정권 창출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집권 2년째에 비주류로 전락했다. 당대표·원내대표 등 주요 선거에서 ‘박심’이 작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친박 성향 후보들이 모두 패했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한 친박 중진 의원은 “(친박은) 이제 끝난 것 아니냐는 말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 박 대통령 지지율 상승이 와해 직전까지 갔던 친박의 재결집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과 핵심 친박들에게 당내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아 보인다. 초·재선 의원들을 중심으로 ‘반 박근혜 기류’가 수그러들기는커녕 확산될 조짐이 감지되고 있는 까닭에서다. 이미 지난해 ‘탈박’했던 의원들은 물론 여전히 친박으로 분류되는 의원들도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 대통령 지지율 상승이 친박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총선을 1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움직임은 향후 당이 청와대와 본격적인 거리두기에 나설 것임을 추측케 한다. 이는 박 대통령 국정 운영에 또 다른 변수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요신문>이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초·재선 의원들 역시 ‘반박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증언들을 털어놨다. 친박계 한 재선 의원은 이렇게 귀띔했다.
“3월 초 친하게 지내던 의원들끼리 식사를 했다. 굳이 계파를 나누자면 친박이 셋, 비박이 셋이었다. 그런데 평소 대화와는 조금 달랐다. 모두 박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를 했다. 수위가 높았다. 이병기 비서실장 발탁을 놓고서는 ‘최악의 인사’라는 말도 나왔다. 당이 공식적으로 호평을 내놨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지금 당에 소장파라고 불리는 인물이 누가 있느냐. 그동안 너무 무기력했다며 서로 반성했다. 이제는 계파를 떠나 초·재선이 행동해야할 때라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 대척점엔 당연히 박 대통령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비슷한 시기 열린 한 친박 의원 주최 비공개 조찬 모임에서는 더욱 강도 높은 발언들이 쏟아졌다고 한다. 한 참석자가 “박 대통령 뽑은 것을 후회한다. 수도권뿐 아니라 텃밭인 영남 정서가 뒤숭숭하다”는 말을 꺼내자 당시 그 자리에 있던 또 다른 친박 의원은 “충분히 공감한다. 나뿐 아니라 동료 의원들 중에서 친박이라는 꼬리표가 이제는 걸림돌이라는 얘기를 많이 한다”면서 “박 대통령이 탈당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대통령 탈당이라는 민감한 내용이 비박도 아닌 친박 내에서 거론됐던 것이다. 행사를 주최했던 의원도 “박 대통령 스스로 더 이상 친박이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느냐. 우리도 거기에 얽매일 필요 없다. 각자도생(제각기 살아갈 방법을 도모함)하자. 초·재선이 뭉쳐 당을 새롭게 혁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계파를 막론하고 새누리당 초·재선 의원들이 박 대통령과 선을 그으며 대립각을 세우는 것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내년 총선과 연관을 짓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내년 총선에서 고전할 것이란 위기감의 발로라는 얘기다. 실제로 새누리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은 지난 2월 초 ‘총선 필패’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총선이 1년여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의원들은 대통령에 대한 스탠스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의원 입장에서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대통령은 부담스럽기 마련”이라면서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박 대통령 집권 3년차다. 지금의 친박 모습은 다소 빠른 측면이 있다. 이는 박 대통령에게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친박 일각에서는 초·재선 배후에 특정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기류도 읽힌다. 박 대통령 지지율 상승이 친박 결집으로 이어지는 것을 걱정하는 비박계가 움직이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친박계 시선은 비박 정점에 있는 김무성 대표를 향하고 있다. 실제로 정치권에서는 대부분 초·재선 의원들이 ‘무대’를 따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의원들로선 일단 예선을 통과해야 한다. 공천을 못 받으면 본선에 출전하지도 못 하는 것 아니냐. 현재 당대표이자 최대 계파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 대표에게 힘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초·재선 의원들은 말을 아끼면서도 김 대표 측과 공감대를 갖고 있다는 것에 대해선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인다. 한 비박계 초선 의원은 “김 대표가 직접 나서서 현직 대통령과 각을 세우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이 크다. 그렇다고 김 대표가 과거 황우여 대표 체제 때처럼 청와대 거수기 노릇을 할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소장파 의원들 역할론이 부각되는 이유”라고 전했다. 친박계 재선 의원 역시 “김 대표는 지난해 대권주자 김문수를 보수혁신위원장으로 임명해 당을 장악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김문수 위원장과 불협화음을 내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김 대표가 초·재선들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