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예지원의 국회 월장 사건 으로 홍보효과를 톡톡히 올렸다. 공동주연 임성민과 함께 의사당을 배경으로 법전을 펼쳐든 예지원(작은 사진). | ||
하긴, 미니스커트에 뾰족 구두를 신고 대한민국 국회의 높다란 철문을 기어오르는 것쯤 영화판에서도 알아주는 여걸(女傑) 예지원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지원은 지난 4일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촬영현장에서 계속되는 국회측의 촬영 거부를 무릅쓰고 국회 정문을 온몸으로 ‘껴안는’ 열정을 보였다. 이 모든 웃지 못할 해프닝은 미니스커트 차림의 예지원이 국회 철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사진과 함께 각종 스포츠지 일면을 장식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단지 해프닝일 뿐일까.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사창가의 윤락녀가 어찌어찌 국회의원에 당선된다는 시사풍자코미디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해 볼 수도 있다. 윤락녀의 국회 입성 장면이 꼭 실제 국회에서 찍혀져야 한다면, 대통령이 출연하는 장면도 꼭 청와대에서 찍혀져야 하는지 말이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국회측과의 실랑이 과정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이미 원하든 원치 않든 세간의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됐다. 국회에 맞서는 여배우. 권위적인 정치판을 신랄하게 풍자한다는 영화 내용과 딱 맞아떨어진다. 홍보 효과? 측정 불가다.
충무로에 흔히 ‘노이즈 마케팅’(noise marketing)이라 불리는 신종 마케팅 기법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근 반년쯤 전부터다. 노이즈 마케팅이란 실상, 영화에 대한 화제성 내용을 침소봉대해 유포함으로써 마구잡이로 인지도를 높이는 홍보 방법. 따라서 그에 따른 역효과를 우려한 영화사들은 함부로 이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었다.
이런 상황을 반전시킨 영화가 바로 지난해 9월 개봉해 전국 1백만 관객을 끌어 모은 코믹물 <보스상륙작전>. 당초 <보스상륙작전>은 대통령 후보가 병역 비리에 연루돼 곤란을 겪고 있고, 이를 정치 깡패가 이용한다는 ‘뜬구름 잡는’ 설정 이외에 뚜렷한 흥행 성공 요소가 없는 영화였다.
그런 <보스상륙작전>이 비로소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던 건 개봉 전날 터진 이른바 ‘영풍(映風)사건’ 때문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은 “(대통령 후보의 병역비리 의혹을 설정해 놓은) <보스상륙작전>이 사실상 이회창 후보를 비방하고 있어 명백히 선거법에 저촉된다”면서 “<보스상륙작전>의 김성덕 감독이 한나라당과 불편한 MBC PD출신인 점도 의심스럽다”는 ‘고단수’ 음모이론을 들고 나왔다.
▲ 왼쪽의 <보스상륙작전>이나 <주글래 살래> 같은 영화들 도 노이즈 마케팅에 기댄 대표적 사례다. | ||
바꿔 말해 성공한 영화 마케팅이란 영화를 사회적인 이슈로 만드는 것이란 얘기다. 어떻게 해서든 영화를 ‘9시 뉴스’에 등장시켜야 하는 것. ‘노이즈’든 아니든 상관없다. ‘노이즈 마케터’가 가장 얽혀 들고 싶어하는 사회적인 이슈는 우선 ‘정치’다.
지난해 10월 개봉한 안성기, 최지우 주연의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 대표적인 경우. 때마침 선거철이라 만인의 관심이 정치 이슈에 쏠릴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당시 이 영화의 홍보사는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에서 모두 미움을 받고 있다”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젊은 대통령의 이미지가 특히 한나라당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 듯하다”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해댔다.
최근에는 ‘정치 이슈’ 이외의 문제를 공략하기도 한다. 특히 영상물등급위원회는 노이즈 마케팅을 노리는 관계자들에게는 가장 만만한 단골 상대다. 최근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 결과 현실적으로 상영이 불가능한 ‘제한상영가’ 등급을 받았다며 유난을 떨었던 <주글래 살래>가 대표적인 경우.
<주글래 살래>측은 즉시 보도자료를 통해 “현재 제한 상영가 등급 영화관이 없는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이라 더욱 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제작사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북 정상들의 패러디가 혹시나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런 추측’을 하고 있기도 하다”고 밝혔다. 등급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더 나아가 정치 문제로까지 비화시키려는 ‘고도의’ 전술이랄까.
노이즈 마케팅은 ‘비록 부정적인 정보일지라도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심어주지만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영화 흥행에 도움이 된다’는 영화 비지니스의 속성상 합리적으로 선택 가능한 마케팅 방법이기도 하다. 한 충무로의 제작자는 “노이즈 마케팅도 어차피 홍보의 수단일 뿐”이라며 “과격하게만 이용하지 않는다면 한 번쯤 시도해보고 싶은 방식”이라고까지 말했다.
영화 마케팅 담당자들은 “영화 제작비와 더불어 홍보 마케팅비도 10억원을 훌쩍 넘어가는 최근의 추세에 비추어 작은 영화들은 이런 식의 마케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며 “노이즈 마케팅은 바꿔 말해 아이디어 마케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사회의 트렌드를 영화에 끌어들인다는 측면에서 노이즈 마케팅은 어쩌면 충무로 마케팅의 ‘첨단’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앞으로도 영화판에서 들려오는 ‘잡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또 어느 여배우가 청와대 담장을 넘게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신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