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나 옷이 탐나는지 때론 마네킹에게 질투가 날 지경이다. 그러나 옷 가격을 생각하면 ‘그림의 떡’. 그래도 전직 기자 출신이라 당당하게 문을 밀치고 들어가 디자이너들과 얘기를 나눌 정도의 배짱은 있는 처지. 그런데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들을 보는 순간 ‘으악’.
쇼윈도 옷과는 전혀 동떨어진 마담사이즈(사이즈 77, 88 정도)의 마담풍 디자인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티크’라고 쓰여진 라벨만 없었다면 누구의 디자인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다. 하나같이 미국과 유럽의 상류부인들에게 인기 있다는 ‘셍 죤’이라는 브랜드의 카피라는 인상을 주는 옷들이다.
‘셍 죤’이라는 브랜드는 마치 부인복의 교과서 같은 옷이라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 등 재래시장의 옷들도 거의 같은 스타일이다. 다시 말해 고급 부티크나 시장 옷이나 디자인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얘기다. 차이가 있다면 고급 부티크는 이태리나 프랑스산 수입천을 쓴다면 시장 옷은 중국산 천을 쓴다는 것과 바느질, 디테일의 차이 정도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경원대 의상디자인학과 김정희 교수의 분석. “돈이 정말 많다면 3백만∼4백만원대하는 ‘셍 죤’ 투피스를 입겠죠. ‘그래도 옷 한 벌에 3백만∼4백만원은 지나치다’ 싶은 중상류층은 1백만원을 약간 웃도는 정도의 ‘셍 죤 카피’ 디자이너 부티크의 투피스를 입는 것이고요. 그리고 보통 주부들은 30만∼40만원대의 내셔널 브랜드 ‘셍 죤 카피’나 5만원 내외의 ‘동대문표 셍 죤’을 입는 것이죠.”
톱 디자이너에게 물어보았다. “요즘 부티크를 운영한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나마 현재 톱 디자이너들은 70년대를 전후로 한 ‘맞춤복 전성시대’에 명동에서 양장점을 운영했던 분들이라 몇 십 년 된 단골고객이라도 있습니다.
당연히 옷도 고객과 함께 늙은 것이죠. 최고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 패션쇼를 준비해봤자 20대의 늘씬한 모델들에게 어울리는 옷이 50대 이상의 중년부인들에게 어울릴 수가 있나요. 결국 ‘패션쇼 따로, 파는 옷 따로’입니다.
우리 숍에서 판매용으로 44, 55사이즈의 옷을 만들어봤자 실제로 그 옷의 구매가 가능한 경제력을 갖춘 20∼30대들은 조금 더 보태 ‘샤넬’이나 ‘프라다’ 같은 외국브랜드 옷을 삽니다.
심지어 저희 숍에 오시는 몇 십 년 된 단골 사모님들도 딸이나 며느리에겐 외국 브랜드의 옷을 사줍니다. 결국 부티크장사는 인맥장사로 바뀐 것이지요. 때문에 고급부티크들은 상류층부인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 ‘옷도 맞추고, 집안 얘기도 하고, 서로간에 혼담도 나누고, 적당히 허영심도 부리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톱 디자이너들도 이들 가정사의 시시콜콜한 것까지 알고 얘기를 나눌 정도가 되어야만 숍이 운영됩니다. DJ 정권 때의 옷로비사건도 다 그래서 나온 것 아닙니까. 고객들 중 디자이너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정도의 예의를 갖추는 고객도 몇 안돼요.”
지금 이 시간에도 A재벌의 상무님 사모님은 회장님 사모님을 만나기 위해 청담동 부티크 숍에 간다. (주)서령창작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