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채정 당 의장을 세우는 데 물밑 조율한 열린우리당 중진그룹이 이미 양대 경선에 대한 밑그림까지 마련해 놓았다. 사진은 지난 1월5일 당 중앙위원회의에서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출된 임채정 의원이 인사말을 하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국가보안법 폐지 등 4대 입법 ‘불발’의 여파로 사상초유의 지도부 총사퇴-임시 집행위원회 체제 가동을 계기로, 그동안 숨죽여 지내던 중진그룹들이 ‘대반격’에 나서고 있다. 원내대표(1월28일)-당 의장 등 지도부 경선(4월2일) 등 권력재편의 공간을 맞아 중진들이 계파구분을 뛰어넘어 `합심’해 원내외 소장-강경파들로부터 주도권을 빼앗아 오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다.
중진그룹의 ‘잰 걸음’은 천정배 전 원내대표 사퇴(12월31일), 이부영 전 의장 등 상임중앙위원단(김혁규 한명숙 이미경 의원) 일괄사퇴(1월3일)를 전후해 본격화됐다. 당내 상황이 소장-강경파의 ‘지도부 전원사퇴’ 요구를 비켜갈 수 없게 되자 중진들이 새 체제를 놓고 물밑조율에 나서면서다.
우선 이 전 의장은 새해 첫날 친노그룹의 핵심인 유인태 의원에 사퇴결심을 알리며 “중진들이 지도부 공백의 후유증이 없도록 나서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유 의원은 각 계파 중진들에 새 지도부 구성을 위한 논의를 제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일엔 이 전 의장과 문희상 임채정 배기선 의원 등이 회동해 임시 지도부 수장으로 임채정 의원이 적임이라는 선에서 의견이 모아졌다는 후문.
이후 상황은 중진들이 마련한 시나리오대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1월3일 열린 상임중앙위원회의에선 이 전 의장 등 지도부의 일괄사퇴와 의원총회-중앙위원 연석회의를 5일 열어 임시 지도부를 구성키로 결정이 났다. 4일 밤엔 여의도 한 호텔에서 김한길(당권파) 장영달(재야파) 유재건 의원(안개모) 등 중진들과 참여정치연구회(개혁당 그룹 주축)의 유시민 의원 등 계파 대표들이 최규성 사무처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회동을 가졌다.
4일 심야 회동은 다음날로 예정된 연석회의에서 임시 지도부 구성안이 원활히 통과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사전조율이 목적. 원내외 소장-강경파의 ‘중핵’인 참정연의 유 의원을 참여시킨 것은 중진들간 묵계를 ‘계파간 합의’로 격상시켜 당내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의도였다. 회동에선 결국 중진들이 조율한 안이 별다른 이의없이 통과됐다.
한 참석자는 “회동에선 비상사태를 맞아 계파 갈등이 전면화되어서는 곤란하다는 대전제 아래 중진들이 제시한 안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한때 유 의원이 이 전 의장이 전날 당내 강경파를 ‘과격 커머셜리즘(상업주의)’이라 비판한 것을 성토하며 ‘내일 그에 대한 얘기가 좀 있을 것’이라고 말해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론 순탄하게 합의가 이뤄졌다”고 상황을 전했다. 계파간 막후조율의 덕택으로 5일 열린 연석회의는 당초 예상과 달리 ‘조용히’ 전날(4일) 계파 대표 모임 결정을 추인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임시집행위 구성을 전후한 중진들의 물밑 조율 과정에서 계파간 이해관계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양대 경선(원내대표-상임중앙위원단)에 대한 ‘밑그림’도 상당부분 마련됐다는 점이다. 중진들의 ‘의기투합’이 일시적 현상이라기보다는 당내 권력질서를 구조적으로 바꾸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이뤄졌음을 의미하는 지점이다.
중진들이 계파의 틀을 떠나 뭉치기 시작한 징후는 우선 임채정 의장의 행보에서 확인된다. 임 의장은 자신이 속한 재야파의 요구를 뿌리치고 중진들의 ‘중론’을 좇아 임시집행위의 수장을 맡았다.
재야파의 한 의원은 “내부적으론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해 상당수가 임 의장이 임시집행위를 맡는 데 반대했다. 김 장관은 일찍부터 이 같은 의사를 전달했고, 4일 저녁엔 직접 임 의장에 전화로 ‘비상대책기구를 맡지 말고 당 의장 선거에 나가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임 의장은 ‘당내 상황이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리고 내게는 그런 욕심도 없고, 60대 중반에 경선을 치르긴 너무 지친 데다, 가족들도 반대한다’며 거부했다”고 말했다.
▲ 정세균 의원(왼쪽), 문희상 의원 | ||
당권파가 최대 라이벌인 재야파의 임 의장이 임시집행위를 맡는 데 동조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 내부적으론 한때 임 의장 대신 정동영 통일부 장관의 고교-대학 선배로 계파 핵심인사들과 두루 돈독한 관계인 조세형 고문(전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밀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김한길 의원 등 3선 그룹을 중심으로 “그러면 재야파-참정연이 다수인 소장-강경파와의 갈등이 전면화된다”고 반론을 펴 ‘없던 일’이 됐다.
한 재선 의원은 이를 “‘천-신-정’의 연이은 낙마로 당 의장 후보도 내지 못하게 된 상황을 반영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이 의원은 “이전까진 당권파가 핵심 포스트를 차지하며 당 운영을 주도했지만 이제는 그럴 형편이 아니다. 당분간은 중진들과 연대해 소장-강경파들이 주요 현안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막으면서 차분히 세력을 확대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 장악’을 위한 중진들의 행보는 양대 경선의 구도를 입맛에 맞게 몰아가려는 움직임에서도 뚜렷히 드러난다. 우선 원내대표 경선의 경우 정세균 의원(3선)이 중진그룹의 전폭 지원 아래 ‘독주’하고 있다. 정 의원은 ‘천-신-정’이 주도하는 ‘바른정치실천연구모임’의 멤버란 점에서 당권파로 분류되지만 계파색이 옅은 데다 당내에서 계파-선수 구분 없이 두루 신망을 얻고 있는 것이 강점이다.
그러나 ‘정세균 대세론’이 일찌감치 형성된 데는 중진들간 거중 조정이 절대적이었다는 분석. 당장 경쟁상대로 여겨졌던 배기선 김한길 의원(이상 3선)이 불출마 선언과 함께 지원을 약속했고, 친노 그룹의 문희상 유인태 의원도 같은 대열에 선 것으로 알려졌다. 오죽하면 원내대표 선거관리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재건 의원마저 기자들에게 “경선이 정 의원에 집중돼 재미가 없지”라며 농담조로 ‘흥행’에 대해 걱정할 정도다.
아직 80여 일이나 남은 당 의장 경선도 사정은 비슷하다. ‘문희상 대세론’이 단적인 예다. 친노 그룹의 좌장인 문 의원이 연말-연초 지도부 총사퇴 이후 중진그룹 내 의견조율을 주도하면서 어느덧 당 의장 ‘영순위’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 장영달 의원 | ||
문 의원은 참여정부 초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내는 등 노무현 대통령과의 ‘특수관계’인 것이 결격사유로 거론되자 한때 주저했지만, 중진그룹에서 “지금 당내 상황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하다”며 적극 권유해 출마로 방향을 완전히 잡았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이광재 서갑원 백원우 의원 등 친노 386들의 결집체인 의정연구센터도 문 의원을 당 의장으로 밀기로 내부논의를 마친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양대 경선이 이처럼 중진그룹의 ‘선택과 집중’에 의해 일찌감치 특정 후보 독주체제로 흘러가자 소장-강경파 그룹의 반발과 대응도 점차 표면화되고 있다. 우선 중진으로선 드물게 연말 국회 농성을 주도했던 재야파의 장영달 의원은 중진그룹의 움직임을 “토끼몰이식 파당정치의 음모”라고 격렬히 성토하며 소장-강경파들의 세 결집에 나섰다.
장 의원은 “원내대표 경선과 전당대회를 앞두고 양지만을 좇는 기회주의적 습성에 젖어 의원들을 줄세우기하려는 중진들의 작태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며 원내대표 경선에 나설 뜻을 천명, 중진그룹에 맞서 노선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뜻임을 밝혔다. 그동안 원내대표 경선 출마에 부정적이었던 장 의원이 돌연 출마쪽으로 선회한 것은 소장-강경파 내에서 “중진들의 뜻대로 경선이 흘러가면 국보법 폐지 등 개혁입법은 죽도 밥도 안된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다.
참정연도 예상치 못한 중진들의 ‘연합작전’에 당혹해 하면서 전열정비에 나섰다. 참정연은 일단 원내대표 경선이 ‘정세균 대 장영달’의 2강 구도로 전개될 경우 장 의원을 지원하기로 하는 한편 현재 김원웅 의원과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이 출마의사를 밝힌 지도부 경선도 후보를 단일화해 임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양 김’의 경쟁력에 대한 의문이 당내외에서 제기되면서 본인의 고사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리더인 유시민 의원을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올 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형편이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