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내대표 주자들 ‘오글오글’ 스킨십 경쟁
중진들의 ‘자리 지키기’는 결코 녹록지 않다. 중진 의원들은 많이 있지만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서는 계파 리더의 역할까지 하며 명확한 존재감을 확립해야 한다. 거기에다 당 내외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정치적 비전’도 확실히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치권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한 정치 평론가는 “중진 의원들은 대부분 공천 때마다 불안해한다. 핵심 당직을 거치거나 국회활동 혹은 지역에 가시적 성과를 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을 오래하다 보면 공천권 등의 이유로 지역 정가에서 ‘적’이 많아진다. 지역에 가서 정치적 비전을 보여줄 수 있어야 명분이 선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차기 대권주자나 시장과 도지사 등 광역단체장 후보 물망에 오르는 ‘정치적 비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도당 위원장에서부터 최고위원, 원내대표와 당대표 등의 핵심 당직을 거쳐야 한다. 중진의원들의 명분을 살려주는 주요 당직으로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도 있다. 상임위원장 자리도 한 번씩은 거쳐야 지역에서 ‘할말’이 생긴다는 분위기다.
중진 의원들의 ‘역할론’에 대한 초·재선 의원들의 기대감도 높다. 한 새정치연합의 초선 의원은 “19대 국회에서 중요한 이슈가 있을 때마다 초선들이 나서서 위험부담을 안고 오히려 중진들이 뒷짐을 지고 있는 경우가 있었다. 중요 상임위나 특위 등을 할 때 중진들의 역할이 더욱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같이 중진들에 대한 기대와 요구는 많지만 정작 그들은 그 역할에 그리 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자연스레 내년 총선 불공천 등 위기감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내내표 자리는 그야말로 앞서의 위기의식을 단번에 날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5월 7일 원내대표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의 물밑 움직임이 치열하다. 왼쪽부터 이종걸, 김동철, 박기춘, 설훈, 조정식, 최재성 의원.
그래서 원내대표 후보자들의 물밑 움직임도 더욱 절박해 보인다. 오는 5월 7일 열리는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선거는 4선의 이종걸 의원과 3선의 김동철 박기춘 설훈 조정식 최재성 의원 등이 준비중이다. 실제 해당 의원들은 다른 의원들과 활발히 접촉하며 2주 앞으로 다가온 원내대표 선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원내대표 선거는 계파 세력이 강하지 않은 무난한 후보 집단이라는 것이 특징으로 꼽힌다. 친노계 수장인 문재인 새정치연합 당대표가 계파청산을 주창하면서 지난해 박영선 전 원내대표와 치열한 경선을 펼쳤던 친노계 노영민 의원도 참여하지 않아 3파전 이상이 예고되고 있다. 이번 원내대표 선거가 내년 4월 총선 전까지 유지되는 19대 마지막 당직 자리다. 당내서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던 중진 의원들이라면 핵심 당직에 도전해볼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다.
4선의 이종걸 의원은 누구보다 원내대표 자리 도전에 고군분투하고 있다. 지난해 박영선 전 원내대표가 사퇴하고 치러진 10월 원내대표 선거에 도전한 이후 현재까지 주변에 줄기차게 원내대표를 향한 열정을 드러내고 있다. 의원들과의 약속에 자주 늦곤 한다는 평판을 의식해 지난해 원내대표 도전 이후부터 각종 회의와 약속에 30분 먼저 참석하는 등 ‘신뢰’ 이미지를 구축 중이다. 최근에는 매일 아침마다 의원실을 방문해 그들과 독대하는 등 의원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노력중이다.
김한길-안철수 지도부에서 사무총장을 지낸 조정식 의원도 도전 의사를 밝히면서 의원들과 활발히 접촉하고 있다. 최근에는 의원들에게 임진왜란 회고록인 유성룡의 <징비록>을 선물하며 스킨십을 강화하고 있다. 설훈 의원도 지난 23일 자신의 생일떡을 의원실마다 돌려 화제를 모았다. 그는 129명의 의원들에게 친필로 “20대 국회에서 다시 만나자”고 의미심장한 편지를 썼다는 후문이다. 김동철 최재성 의원도 의원들과 오찬, 저녁 약속을 독대로 잡으며 적극 ‘관리’에 들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8 전당대회 때도 ‘공천’을 향한 중진 의원들의 물밑 움직임이 심상찮았다. 공천에 대한 영향력이 강한 당대표를 선발하는 과정에서 친노 수장인 문재인 의원과 호남 맹주인 박지원 의원이 맞붙었다. 치열한 계파 싸움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중도·비노계 의원들은 박지원 의원을 지지하던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부 비노계 중진 의원들은 문재인 대표가 당선되도록 도우며 당직 혜택을 노렸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비노계로 분류되는 A 중진 의원의 해당 지역구 구의원들은 호남권 출신들이 많아 박지원 의원 측을 지지했지만 A 의원은 문 의원을 적극 지지했다는 것. 과거 그가 친노계와의 친분이 깊지 않았기에 주변에서는 그에 대해 “당직(공천)을 얻기 위한 속셈”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중진 의원들의 위기감이 가장 높은 곳은 호남권이다. 호남 지역은 야당에서 공천 혁명의 바로미터로 작용하는 상징성이 있는 만큼 공천 때마다 ‘물갈이’ 움직임이 강하게 일었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 2012년 당 쇄신을 위해 호남 지역 공천에서 김영진 강봉균 최인기 김재균 신건 조영택 의원 등 6명을 공천에서 탈락시켜 무소속 출마 등 반발이 일기도 했다.
물갈이 후폭풍 속에 15대부터 18대까지 전북을 지켜오던 정세균 의원이 19대에는 서울 종로구에 도전해 자리를 잡은 것 또한 호남에 새 인물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한 ‘성공케이스’라는 평가가 많다. 최근 호남권에서는 호남 중진 의원들을 향해 “이제 수도권 등으로 정 의원처럼 자리를 내놓고 탈호남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대 국회에서는 호남 위기론이 더 부각되고 있다. 친박 핵심인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순천 지역에서 호남 최초로 국회의원 배지를 달면서 더 이상 호남이 야당의 텃밭이 아니라는 위기감이 커졌다. 여기에 전북 출신의 정동영 전 의원이 4·29 재·보궐 선거 관악을 지역에, 천정배 전 의원이 광주 서구을에 출마하면서 더 이상 경쟁자가 새누리당뿐이 아니게 됐다.
서구을 지역에 출마한 천정배 전 의원은 호남 홀대론을 강조하며 “광주에 7명의 DJ(김대중 대통령)를 키워낼 것”이라고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국민모임을 이끌고 있는 정동영 전 의원이 다음 총선에서 전북 지역에 출마할 것이라는 분위기 또한 팽배하다.
정동영 전 의원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정동영 전 의원은 국민모임을 위해 관악을에 갑자기 출마하게 된 것이다. 그 직전까지는 자신의 지역구였던 전북 전주에 의원할 때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번에 재·보궐에서 2위만 하더라도 출마할 것이다. 그리고 호남 물갈이는 항상 있어왔다. 올해 말에도 한바탕 시끄러울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