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지기 경남기업 전직 임원 한씨 ‘비장의 카드’로 급부상
구속된 박준호 전 경남기업 상무.
그렇다면 검찰이 말하는 그 ‘증거’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해 ‘비밀장부’라는 데 이견이 없다. 금품공여자가 사망한 상황에서 메모의 실체를 밝혀줄 주요 증거로 장부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검찰이 이 장부를 찾아내기만 하면 수사는 급물살을 타면서 리스트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장부가 끝내 인멸됐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할 경우 사건의 실체는 미궁에 빠지면서 검증되지 않은 각종 리스트가 난무하고 정치적 공방만 가열될 가능성이 높다.
# 특명, 비밀장부를 찾아라
지난 17일 한 신문이 ‘여야 인사 14명 성완종 장부 나왔다’고 보도하자 특별수사팀은 발칵 뒤집혔다. 수사팀이 보지도 못한 장부, 더구나 여당뿐 아니라 야당 인사들까지 포함한 장부가 있다고 하니 도대체 어디에 장부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을 하느라 수사팀 내부에서 상당한 혼선이 있었다는 전언이다. 해당 기사에선 이니셜로 보도했는데 정치권에서는 야당 의원들 중 일부가 자신을 겨냥한 근거 없는 보도라며 반발하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언론발 ‘성완종 리스트’로 인해 혼선을 빚던 검찰이 차츰 수사의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특히 성완종 전 회장의 금고지기로 알려진 전직 임원 한 씨가 검찰의 비장의 카드로 떠오르고 있다.
다른 검찰 관계자는 “그날 아침 수사팀 분위기가 심각할 정도로 살벌했다”며 “아무리 자료를 뒤져도 그런 장부가 없는 것을 최종 확인한 후에도 오보라고 공식적으로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어서 많이 답답했다”고 전했다. 수사팀은 해당 보도 직후엔 “확인해줄 수 없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가 오후에서야 비로소 “수사팀이 알지 못하는 자료”라고 정정했다. 그러면서 “확인 당시에는 유의미하지 않지만 추후 유의미한 경우도 있기 때문에 모든 자료를 쌓아놓고 분류·관리하고 있다”며 “(비밀 장부나 추가 리스트가) 아직은 없지만 장담할 순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수사팀이 이런 애매한 스탠스를 취한 이유는 자신들이 아직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자료 중에 혹시 장부가 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수사팀은 서울고검 청사 12층에 본부를 차려놓고 그동안 압수해온 모든 자료들을 거의 대부분 종이 형태로 보관해놓고 내용을 분석 중이지만, 수십만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들을 모두 들여다보는 데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수사팀 관계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현 시점에서 우리가 장부나 추가 리스트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며 “‘(장부가 없다고) 장담할 순 없다’고 얘기하는 것도 유동적인 상황을 감안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의 말처럼 수사팀은 현재 비밀장부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현 시점에서 공식·비공식 발언들을 종합해보면 검찰은 증거인멸보다는 증거은닉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른 수사팀 관계자가 “증거인멸과 관련해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면서 “증거인멸에는 증거은닉도 포함된다”고 강조한 것도 사실상 이 같은 가능성을 염두에 뒀기 때문이라는 관측이다.
이 경우 누가, 왜, 어디에 증거를 은닉했는지를 찾아내는 게 최대 관건이다. 검찰이 성 전 회장 최측근들을 구속 또는 긴급체포하면서 전방위로 압박하는 것도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판단된다. 일각에서는 최측근이 아닌 성 전 회장 일가에서 비밀장부 등을 보관중일 것이란 관측이 나오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적지 않다.
경남기업의 한 관계자는 “성 전 회장이 회사 일을 집으로 가져가는 성격이 아니라서 측근들에게 자신의 인터뷰를 뒷받침할 자료를 맡겼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면서도 “측근이라는 사람들도 결국엔 한 다리 건너면 다 ‘남’인 만큼 그 정도로 중요한 자료라면 피붙이에게 잘 갖고 있다가 대응하라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 검찰 최악 시나리오는 ‘빈손’
검찰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비밀장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이 경우 측근들의 진술 등을 바탕으로 금품을 받은 시점과 정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드러난 이완구 국무총리나 홍준표 경남도지사 정도를 기소하는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국민들이 이를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결국 특별검사제 도입 요구가 거세지면서 검찰 수사의 공정성 또한 도마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특검을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경우 검찰은 사실 존립 근거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어차피 이 사건의 성격상 특검은 불을 보듯 빤하다”며 “특검에서 수사를 하더라도 검찰에서 한 것 이상 나오는 게 없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천천히,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단계별로 가고 있고 나름 ‘빅카드’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있다”고 말했다.
현 시점에서 빅카드는 성 전 회장의 ‘금고지기’였던 전직 경남기업 임원 한 아무개 씨일 가능성이 있다. 이 사건 초기 한 씨가 비밀장부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이미 나온 데다, 성 전 회장 비자금 출금 내역을 통째로 검찰에 넘겨준 장본인으로 지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체 250억 원의 비자금 중 32억 원의 사용처는 회장님이 안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이도 한 씨다.
이 때문인지 한 씨는 두 차례에 걸친 특별수사팀의 압수수색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일각에서는 한 씨가 이미 검찰에 비밀장부 등 이 사건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들을 넘겼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특히 한 씨가 현재 자신의 자택에서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이 확인되면서 서초동 내에선 검찰과 이미 모종의 약속을 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성 전 회장 측 인사는 “한 씨가 성 전 회장의 출금 내역을 검찰에 통째로 넘긴 이유는 성 전 회장이 자신을 책임져 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수 있다”며 “지금은 그 연장선상인 만큼 한 씨가 검찰에 다른 자료를 넘겼을 가능성은 언제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검찰 간부 출신의 법조인도 “비밀장부를 찾지 못하면 수사팀 입장에선 추후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본인들의 노력을 입증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수사를 하는 입장에서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이 바로 그 때다. 한 씨는 그런 의미에서 검찰이 나중을 대비해 마련한 ‘빅카드’일 수 있다”고 전했다.
김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