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 ||
연초부터 한일 국교정상화와 ‘문세광의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외교문서 공개, 광화문 현판 교체 등 가히 시리즈로 이어지고 있는 여권의 ‘3공(共) 때리기’가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7대 사건 진상조사 결정(3일)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시점도 절묘하다. 설 연휴를 앞두고 사랑방 정치토론의 ‘절대 화두’를 던진 것으로 비치기도 한다. 여권의 공세는 때마침 당 지지도 하락과 리더십에 대한 비판, 정권 창출에 대한 회의론 확산 등 한나라당 내부 사정과 맞물려 박 대표가 스스로 재신임을 묻겠다고 나서는 상황을 만들었다.
박 대표와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타깃으로 한 여권의 공세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며 이전에도 ‘단골 메뉴’였다. 예를 들어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2004년 3월24일 전날 개최된 전당대회에서 ‘탄핵 후폭풍’에 허우적대는 한나라당의 ‘구원투수’로 등극한 박 대표를 ‘친일파의 딸’ ‘유신독재 주역의 딸’이라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한때 한나라당에서 같은 비주류로 박 대표와 각별한 관계였던 이부영 전 의장은 박 전 대통령을 ‘남로당 프락치 총책’(8월20일, 당 의장 취임기자회견)이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여권은 또 MBC 주식 30%, 부산일보 주식 100%를 갖고 있는 정수장학회가 5·16 군사쿠데타 직후 부산지역 실업인인 김지태씨의 개인 재산을 ‘강탈’했다는 주장을 펴며, 장학회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박 대표를 괴롭히기도 했다. 심지어 열린우리당은 이 문제와 관련해 당에 진상조사단까지 만들 정도였다.
이 당시 여권의 공세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극적인 말을 총동원해 박 대표를 맹공했지만 그다지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오히려 전략적 고려와 제대로 된 사실 확인 없이 상황을 끌고 가면서 논란을 스스로 정쟁 수준으로 몰아 갔고, 그 결과 여권에 대한 비판은 높아지고 박 대표에 대한 동정론은 확산시키는 최악의 상황을 낳았다.
그러나 최근 여권의 움직임은 이전과는 여러 면에서 확연한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공세의 주체와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열린우리당이 전면에 나서 ‘의혹’ ‘주장’을 제기하던 이전과 달리 이번엔 정부기관이 ‘법적 절차에 따라’ 박정희 정권 시절의 여러 의혹 사건에 대한 ‘사실’(fact) 규명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만약 일련의 과정이 여권의 기획하에 이뤄지는 정쟁으로 읽힐 경우 또다시 여론이 등을 돌릴 것이란 우려가 감안된 결과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라 수순이 진행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일종의 ‘음모론’이라 할 수 있는 이같은 주장은 국정원의 자체 과거사 규명과 관련한 정치적 의도와 맞물려 증폭되고 있다. 당장 정치권에서 지난 연말 과거사 규명과 관련한 입법을 놓고 여야 합의가 상당부분 이뤄진 마당에 국정원이 굳이 이 시점에서 ‘단독 플레이’에 나선 배경이 뭐냐는 주장이 대두된다. 특히 7건의 조사 대상 사건 중 ▲부일(정수)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 ▲1~2차 인민혁명당, 민청학련 사건 ▲동백림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실종 등 5건이 박정희 정권 하에서 이뤄진 사건이란 점은 음모론에 힘을 실어주는 결정적 근거가 되고 있다.
박 대표가 “국정원이 이런 일을 조사하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을 지난 30년간 겪어 왔지만 이번처럼 정권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한 것은 처음 겪는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한다는데 힘 없는 야당이 막을 수는 없다”며 국정원측 발표에 강한 불쾌감을 토로한 것도 이면에 담긴 여권의 ‘저의’를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다. 일부에서는 대상 사건 중 유일하게 박 대표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는 정수장학회 문제가 당초 조사대상에서 제외됐다가 막판에 추가된 것을 두고 “여권의 속셈이 뭔지 분명히 드러낸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한나라당 내엔 박 대표에 대한 여권의 흠집내기를 현 정권의 보수층 분리·견인과 한나라당 내분 조장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론 차기 대선구도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박 대표의 핵심측근인 전여옥 대변인은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할 수 없지만 최근 박정희 정권 시절의 사안이 잇달아 논란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배경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박 대표를 겨냥한 정교한 시나리오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한 핵심 당직자는 최근 한 사석에서 구체적으로 여권 수뇌부 몇몇을 배후로 거명해 눈길을 끌었다. 이 당직자는 “여권의 공세가 박 대표 본인이 아닌 박정희 시대의 부정적 사건을 전방위로 들춰내는 ‘간접 타격’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고, 정부기관이 중심역을 맡고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의 활동에서 보듯 진보적 성향의 시민-사회단체 인사들까지 일부 가세해서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며 “과거 여당 시절 경험에 비춰 이 정도 기획이라면 현재 여권 내 최고의 전략·기획통으로 꼽히는 2~3명 이내의 인사들이 주도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며, 주요 내용은 여권 수뇌부가 공유하다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전의 박 대표에 대한 공세와 달리 이번엔 열린우리당이 뒤로 빠지고 정부 사이드에서 상황을 주도하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의 여권 권력구조상 정보가 집중되고, 국정원까지 아우를 수 있는 곳이 어딘지는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금방 짐작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여권은 한나라당과 일부 언론의 ‘박근혜 때리기’ 배후 주장에 대해 공식적으론 전면부인하고 있다. 특히 청와대는 <중앙일보> 정진홍 논설위원이 1월28일자 칼럼을 통해 한일국교정상화 문서 공개와 광화문 현판 교체가 “노무현 대통령의 박정희 전 대통령 때리기, 지우기라는 의심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며 ‘의도성’을 거론한 데 대해 “어처구니가 없다. 정직하게 표현하면 이런 글이 대한민국 유력 신문에 버젓이 실리는 현실이 한심스럽다”며 공개반박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여권 내에선 지난 연말 국가보안법 폐지안 등 4대 입법 처리가 박 대표의 태클로 무산된 후 “박 대표를 지금대로 둬서는 안된다”는 기류가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일부 중진들은 박 대표와 김덕룡 원내대표간 알력을 거론하며 “한나라당 내에도 이념·노선 갈등이 있고, 차기 대권주자들간에 각축전이 벌어지고 있는 만큼 이러한 지점들을 여권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여권 수뇌부의 한 인사는 정수장학회 문제와 관련 “박 대표 본인의 결단에 의해 손을 떼는 모양새를 갖춰서는 안되며 비판여론에 의해 내쫓기듯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말해 박 대표에 대한 공세가 임박했음을 예고하기도. 이 인사는 한나라당측으로부터 박 대표와 관련한 최근 상황전개를 ‘기획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작금의 ‘박근혜 때리기’가 핵심부의 정교한 기획에 따른 것이란 의혹에 대한 여권의 반응은 사안의 민감함 때문인지 직접 언급 대신 “상식선에서 생각해 볼 일 아니냐”는 류가 대부분이다.
친노 직계로 분류되는 열린우리당 한 의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어두웠던 과거’는 과거사 규명 과정에서 어차피 걸러져야 할 사안이다. 이번에 국정원이 스스로 진상규명에 나서겠다고 나선 것도 큰 맥락에서 보면 시대적 흐름의 반영으로 봐야 하며 왜 지금 이 시점이냐는 문제는 어찌 보면 부차적인 사안이다. 기획이나 의도를 둘러싼 논란은 부인한다고 해소될 것도 아니고, 긍정할 수도 없는 일 아니냐”고 말했다.
이 의원은 “연말 이후 당내는 물론 청와대, 내각 내에서도 박 대표를 계속 대화상대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광범위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중 핵심인사들간에 ‘구체적으로 대책을 고민해 보자’는 얘기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그 이후 논의가 어떻게 진전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진행된 상황으로 봐선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해 눈길을 끌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박근혜 때리기’를 기획한 실체가 존재할 것이란 데 무게를 둔 얘기라 하겠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