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님의 사진 앞에 선 박근혜 대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집과 육영수 여사의 부드러운 미소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평이다. | ||
이 같은 대중적 이미지와 달리 정치권에서 불리는 박 대표의 별명은 ‘얼음 공주’다. 미소 속에 가려진 차가운 면을 가리키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공주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은 ‘황소고집’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연약해 보이는 여성 당수인 박 대표에게 고집은 소신과 원칙주의자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박 대표의 고집은 청와대 시절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도 적지 않다.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지낸 한 인사에 따르면 박정희 전 대통령도 박 대표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고 한다. 박 대표가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고 난 뒤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할 때 일이다. 하루는 박 전 대통령이 박 대표를 불러 놓고 박 대표가 가까이 했던 한 인사에 대한 소문이 좋지 않으니 더 이상 만나지 말라며 크게 꾸짖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아무리 호통을 쳐도 “그런 소문이 무섭다고 만나지 못할 이유가 없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후에 “내 고집도 웬만한데 저 애는 나보다 더하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이 인사는 “청와대에서 박 전 대통령의 고집을 이긴 사람은 박 대표가 아마 유일할 것”이라며 “평소에는 다소곳하다가도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아무도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박 대표를 끔찍히 사랑했던 것 같다. 박 대표가 지난 98년 청와대 시절의 일기를 모아 발간한 수필집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를 보면 ‘아침 진지를 드신 후 아버지는 잠시 울음을 터뜨리셨다.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려고 너를 두셨는가 봐” 그러시며, 어머니를 회상하셨다(1974년 9월 14일)’라고 적고 있다.
박 대표의 고집은 98년 정치권 입문 후에도 화젯거리가 됐다. 지난 99년 1월 국회를 떠들석하게 했던 이른바 ‘국회 529호실’ 사건은 박 대표의 고집이 빚은 작품이었다. ‘529호실 사건’이란 국정원이 국회 529호실을 사용하며 국회의원 등 정치사찰을 했다는 의혹과 함께 야당 의원들이 529호실 문을 부수고 들어간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야당 당직자들이 기물파손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되기도 했다.
박 대표는 당시 남성 의원들이 529호실 문 밖에서 목소리만 높일 뿐 별 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자 “이런 일은 그냥 둬서는 안된다”며 구둣발로 문을 걷어찼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사무실 난입 사건으로까지 번졌다는 것이다.
2000년 9월 대구 두류공원 규탄대회 불참도 박 대표의 고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얘기다. 당시 이회창 총재는 국회를 보이코트하고, 전국을 순회하며 ‘김대중 독재정권 범국민 규탄대회’를 열고 있었다. 그러나 당 부총재였던 박 대표는 ‘상생의 정치’를 내세우며 규탄대회 등 극한투쟁에 반대했다.
하지만 박 대표가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 규탄대회는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당시 한나라당 출입기자단 사이에선 박 대표의 참석 여부를 놓고 내기를 걸 정도였다. 자신의 지역구인데다 한나라당 근거지인 TK(대구경북) 규탄대회마저 불참할 경우 박 대표는 ‘배신자’로 찍혀 엄청난 정치적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 대표는 불참을 선언했다. 전날 밤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박 대표는 “등원해서 민생을 살펴야 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지난해 말 국가보안법 등 4대 입법 최종 처리를 위한 여야 지도부 ‘4자회담‘은 박 대표 고집의 하이라이트였다.
열린우리당 천정배 전 원내대표가 “벽을 보고 말하는 느낌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박 대표는 자기 주장을 꺾지 않았다. 열린우리당은 박 대표가 사전에 메모한 수첩만 보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 한다며 ‘수첩 정치’ ‘공포의 수첩’이라는 말로 박 대표를 몰아세우기도 했다.
박 대표는 “광화문에서 인공기를 흔들고 김정일 위원장을 찬양하는 것은 막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지 않을 거면 젊은이들이 왜 군대에 가냐”며 국보법의 찬양고무죄 유지 입장을 고수했다.
또 지난해 국보법를 둘러싼 여야 공방이 치열할 때의 일이다. 당 소속 최연희 법사위위원장이 비공식 회의석상에서 “더 이상 여당의 공세를 버터내기 힘들다”며 협상론을 들먹이자, 박 대표는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그것도 막지 못하느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당직자는 “박 대표가 그처럼 화를 낸 것은 처음 보았다”며 당시 살벌했던 분위기를 전했다.
박 대표는 한 번 정한 결정은 쉽게 바꾸지 않는 편이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1시간 가량 단전호흡을 10여 년 넘게 해온 것도 이 같은 박 대표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당사 이전에 대해 박 대표가 적극성을 띠지 않는 것은 천막당사의 초심을 잃는다는 비판을 의식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관성’에서 비롯된 측면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한 번 믿거나 정을 주면 변함이 없다고 한다. 서울 삼성동 자택에서 키우던 강아지가 나이 들어 죽은 뒤 마음이 너무 아팠던 박 대표는 그런 아픔을 다시 겪는 게 싫다며 한동안 개를 키우지 않았다. 지금은 동생 지만씨가 장가가면서 진돗개 두 마리를 선물해 키우고 있지만 쏟는 정은 이전만 못하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전여옥 대변인은 “고집 때문에 종종 외골수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면 원칙과 소신이 분명할 뿐 상당히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다”며 “제1 야당의 여성 당수로서 그 정도의 고집과 뚝심은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박 대표의 고집이 정치적으로는 득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박 대표 한 측근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고, 아버지마저 잃은 박 대표로서는 어지간한 의지 없이는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라며 “외롭고 힘든 삶이 성격 형성에 상당히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냐”고 말했다.
박 대표의 청와대 일기에는 이런 그의 심경을 묘사한 글이 있다.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 그것은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의 나의 꿈, 이 모든 것을 집어던지기로 했다. 이왕 공인(公人)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박 대표가 스물두 살 때 쓴 글이다.
유영욱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