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놈의 비주류DNA 때문에…결집력은 ‘굿’ 확장성은 ‘영~’
문재인 대표
친노 입장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지난 대선과 2·8 전당대회, 4·29 재보선 과정 내내 야권은 친노의 ‘정리’ 문제로 내분이 격화되곤 했다. 이번 재보선에서도 문 대표가 친노를 의식하지 않고 정동영 천정배 후보를 잡는 통큰 정치를 했다면 상황은 또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쯤에서 정치권에서는 ‘과연 친노는 야권에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나올 법하다. 지난 ‘과거의 역사’를 통해 오늘의 친노세력이 어떤 과정 속에 있는지 되짚어 봤다.
# [친노1기] 노무현 정부 탄생 전
2013년 12월 개봉한 영화 <변호인>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발생한 부림 사건으로 인해 조세변호사의 삶에서 인권변호사로 변모해가는 이야기를 담아 인기를 모았다. 검정고시 출신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뒤 정치권에 입문해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그의 인생은 비주류의 역전승으로 점철돼 있다. 그를 보좌하는 인사들 또한 대부분 혁신적인 비주류 인사들이었다.
200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한 문성근과 명계남. 일요신문 DB
일명 친노 1기로 불리는 세력은 1980년대 부산에서부터 시작됐다. 노 전 대통령은 부림 사건을 담당하면서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당시 여행사 대표)과 인연을 맺었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로는 이호철 전 수석과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 천호선 정의당 대표 등이 보좌진을 맡았다.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만들어 활동하는데, 이때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서갑원 전 의원이 합류했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도 연구소장으로 영입되면서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자리 잡게 된다. 2002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후보의 캠프가 있던 금강빌딩의 이름을 딴 ‘금강팀’에서는 염동연 전 의원과 이강철 전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이 당내 조직 총괄을, 유시민 전 국민참여당 대표, 정태인 유종일 교수 등이 정책을 담당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뒤 젊은 386세대를 중심으로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만들어졌다. 최초의 인터넷 ‘팬클럽’ 형식의 노사모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강한 전국 조직력을 발휘해 노 전 대통령의 또 다른 뿌리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한국에서는 각종 ‘~사모’ 이름을 붙인 정치 팬클럽이 생겨났다. 한국의 정치팬클럽 ‘붐’에 대해 2003년 노 전 대통령 취임일 영국의 <가디언>은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하다)라는 제목의 기사로 그를 지칭하기도 했다.
‘노사모’에서는 새롭게 참여한 연예인 문성근과 명계남, 그리고 ‘미키루크’라는 필명으로 활동해 조직을 끌어 모은 이상호 씨와 정청래 의원 등이 핵심 활동가로 평가된다.
당내 지지기반이 약했던 노 전 대통령의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이었던 천정배 이재정 임종석 김원기가 도왔고, 당시 부천시장이었던 원혜영 의원 등 국민통합추진위원회의 멤버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해찬 의원 또한 지지대열에 합류했다.
# [친노2기] 노무현 정부 탄생 이후
친노 2기는 청와대 입성하는 인재들과 열린우리당 핵심 인사들이 추가된다. 노무현 정권에서는 청와대로 유입된 친노세력은 관료 출신인 이용섭 김진표 송민순 전 의원 등이다. 학자 출신은 김용익 의원과 이정우 경북대 교수 등이 꼽힌다.
2003년 ‘친노 정당’인 열린우리당 창당 당시 김근태와 정동영. 일요신문 DB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본격적인 ‘친노’정당도 만들어진다. 김대중 정권 말기에 혁신적 인사들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 정치개혁을 위해 창당했다. 당시 386세대 현역들이었던 천정배 신기남 의원과 정동영 전 의원이 김대중 정권에서 권노갑 상임고문의 2선 후퇴 등 쇄신을 주장했고 이후 열린우리당 창당을 주도했다. 2004년에는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며 친노 결집의 ‘정점’을 찍었다. 하지만 2006년 대선을 앞두고 친노들은 제각기 분열되기 시작했다.
노사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참정연(참여정치연구회)과 국참연(국민참여연대)이 당권을 두고 대립한 것이 대표적이다. 국참연이 당내 정치활동을 선언하며 참정연에 대해 “입만 열면 개혁을 소리 높여 외치지만 실제로는 세 불리기와 당권장악에만 혈안이 돼 있다”고 비판하자 유시민 전 대표는 “진짜 친노는 참정연밖에 없다”며 서로 적자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참정연은 개혁당 출신의 유시민 전 대표, 유기홍 의원과 자치분권연대의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가 주축을 이뤘고 국참연은 명계남 이상호 씨 등 노사모 핵심 인사들이 이끌었다.
두 세력은 2005년 3월 전당대회를 두고 강하게 부딪혔다. 두 조직은 정당개혁과 기간당원제 강화라는 같은 목표를 지향했지만 국참연은 실용노선의 염동연·송영길 후보를, 참정연은 개혁노선의 유시민·김두관 후보를 지지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 지지도가 하락하자 정동영 전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을 비판하며 독자 행보에 나섰고 천정배 의원도 한미자유무역협정 문제로 각을 세우며 독자 노선을 시작했다.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탈당 러시도 이어졌다. 분열됐던 인사들은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으로 합당을 거치게 된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 탈당파 80명과 김한길 의원이 주도한 중도통합민주당이었던 민주당 탈당파 4명,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를 주축으로 한 한나라당 일부 세력과 시민사회 세력이 모여 출범됐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정동영 후보가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하고 2008년 1월 손학규 대표 체제가 출범하자 이해찬 의원은 “한나라당 출신이 당대표를 맡게 된 현실이 안타깝다”며 탈당한 뒤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는 등 현실정치와 거리를 뒀다. 다른 친노 인사들이 미래발전연구원, 노무현 재단, 봉하재단 등으로 흩어졌지만 안희정 지사와 이광재 전 지사 등 참모진과 김원기 한명숙 이강철 등 원로 그룹 외 현역 의원들은 노 전 대통령의 만류로 그대로 당에 남았다.
노무현 정권이 끝나고 대선 패배까지 겪은 친노 세력은 안희정 지사가 2007년 12월 대선 패배 직후 “친노라고 표현돼 온 우리는 죄 짓고 엎드려 용서를 구해야 할 폐족”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해체의 길을 걸었다.
# [친노3기] 문재인 세력 구축
2009년 측근 비리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친노 인사들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대 총선을 앞두고 기존 민주당과 ‘혁신과 통합’, 한국노총과 진보 시민단체가 통합됐다. 이해찬 의원과 문재인 대표 등이 ‘혁신과 통합’을 매개로 민주당과 합당한 것과 달리 노무현 정권 당시 참여정부평가포럼을 결성했던 이병완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과 이백만 노무현시민학교 교장, 천호선 정의당 대표와 이재정 전 의원 등과 당시 유시민이 대표로 있던 국민참여당은 민주노동당 등과 통합진보당을 창당하며 다른 노선을 걷게 된다.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당시 슬퍼하는 친노 인사들. 일요신문 DB
한편 민주당에서 친노 주축은 이해찬 의원이 상임대표를 맡으며 주도한 ‘혁신과 통합’ 조직을 통해 정치 중앙으로 복귀한다. 2011년 발족한 ‘혁신과 통합’은 민주당과 합당한 시민통합당의 전신으로 총선 승리를 위한 야권통합 등을 기치로 탄생했다. 당시 친노계인 이해찬 의원과 문재인 대표, 문성근 씨, 시민단체 인사인 김기식 남윤인순 의원 등이 주축이 됐다. 민주통합당 초대 당대표를 맡은 한명숙 의원이 19대 국회에 김기식 남윤인순 도종환 은수미 의원 등 시민단체 인사들을 국회에 대거 입성시키면서 이해찬 한명숙 의원은 당내 친노의 좌장격으로 자리 잡는다. 이때 공천을 통해 들어온 초선 강경파 의원들 다수가 친노로 분류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1년 야권 대통합 추진모임인 ‘혁신과 통합’ 발족식. 일요신문 DB
2012년 대선에는 노 전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자 비서실장 출신인 문재인 대표가 후보가 된다. 이때부터 문재인과 친분이 있는 새로운 친노 인사들이 구축되기 시작하는데 이들이 친노 3기를 이룬다.
우선 문재인의 최측근 참모진은 청와대 비서실에서 동고동락했던 양정철 전 홍보기획비서관, 전해철 의원(전 청와대 민정수석), 이호철 전 민정수석으로 ‘3철’로 불린다. 이호철 전 수석은 19대 총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양정철 전 비서관은 문 후보의 자서전 <운명>의 집필을 도왔다. 이들은 당시 캠프 요직에 친노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자 2선으로 물러났지만 오랜 시간 정치적 동지로 함께했던 만큼 배후에서 문재인 대표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최측근 참모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청와대 출신 측근 그룹으로 정태호 전 청와대 대변인과 윤건영 전 대통령정무기획비서관과 현역 의원인 윤후덕 박남춘 김용익 등도 참여정부 출신 측근들이다. 이들도 3철과 함께 대선캠프 직책을 사퇴하며 물러났다.
대통령 선거 패배 후 참여정부 비서진 출신과 문재인 대선캠프 출신 의원들 주축으로 ‘문지기’ 모임을 구성했다. 해당 모임에는 김경협 김용익 김윤덕 김태년 김현 노영민 도종환 박남춘 우윤근 윤호중 전해철 홍영표 의원 등이 참여했다. 전해철 박남춘 김경협(전 청와대 사회조정비서관) 김현(전 청와대 춘추관장) 김용익(전 청와대 사회정책수석비서관)이 참여정부 청와대 출신이다.
문재인 캠프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우윤근(공동선거대책본부장) 노영민(비서실장) 홍영표(상황실장) 윤호중(당 사무총장) 의원이다. 이중 홍영표 의원은 저서 <비망록>을 통해 문재인 안철수의 대선후보 단일화 뒷얘기를 공개했고 윤호중 의원은 문재인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꾸준히 활동했다.
문재인 대표의 당내 최측근으로 꼽히는 이는 노영민 의원이다. 본래 노 의원은 김근태계의 민주평화국민연대 출신이지만 대선 캠프에 참여한 후 문 대표의 핵심 측근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 2·8 전당대회 때 문 대표는 노영민 의원을 최측근으로 꼽으며 “친노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외에 19대 국회에서 초선 강경파로 분류되는 김기식 남윤인순 은수미 배재정 최민희 진선미 의원 등도 새로 영입된 친노계에 해당된다.
지난 2·8 전당대회에서 문 대표를 당의 수장으로 밀어올린 공신 명단에는 앞서의 문 대표 최측근들 이름이 올라간다. 전당대회 캠프에서도 친노색을 최대한 배제하려 했지만 박지원 후보와 박빙인 분위기가 되자 양정철 정태호 전 비서관 등이 합류해 힘을 보탰다.
정치권에서는 친노의 최대 단점으로 폐쇄성을 들고 있다. 이너서클끼리의 결속력이 너무 강하고 배타적이라는 것이다. 한 친노그룹 관계자는 이에 대해 “2012년 문재인 후보가 진 이유는 친노들만 뭉쳐서 일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친노들끼리만 대선 캠프에서 고급정보를 공유하며 폐쇄적으로 활동했고 비노 측들은 소외됐다. 친노 의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만 캠프에서 보면 자기들끼리 다 했다. 그래서 문재인 후보의 동력이 부족해 떨어진 것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한 정치평론가의 다음 코멘트는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패배한 문재인 후보와 새정치연합, 그리고 친노그룹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원래 중앙정치무대의 중심에 있던 사람이 아니다. 당시 당에서도 꼬마민주당 출신이라 비주류였다. 항상 비주류에 있던 사람이라 당에 들어와서 뭘 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대통령 후보까지 됐다. 대통령 후보 되는 과정까지가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당시에 노무현 지지했던 친노 그룹들도 주류정치세력, 기득권에 대한 반감이 크다. 그래서 친노들의 집단의식에 비주류 의식이 남아 있다. 지금 친노 집단은 굉장히 폐쇄적이다. 사고 자체가 편 나누기를 좋아하고 정략적인 전술도 발달한 것 같다. 이런 게 없다면 비주류들이 골리앗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하고도 그를 지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강구하고 그런 속에서 정치공학적인 모사들이 늘어나는 것 같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을 수도 있다. 친노의 문제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집단을 먼저 생각하고 집단이 살아남기 위한 정치를 먼저 생각한다는 데 있다. 그렇기에 친노는 결집력은 강하지만 확장성이 부족하다. 이것이 친노의 가장 큰 한계다.”
김다영 기자 lata133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