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불만 땐 죽음뿐…‘적자생존’ 유행어 처절하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은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원로들에게도 모욕적 언사를 서슴지 않고 있다. 배경 사진은 지난 4월 15일 김일성 주석의 103회 생일에 금수산태양궁전 참배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0월 말 김정은의 이른바 ‘현지지도’ 이후 순안비행장 신청사 공사는 한동안 올스톱됐다. 최고지도자의 취향에 맞춰 새롭게 시공해야했기 때문이다. 설계와 시공을 총책임진 마원춘 국방위 설계국장은 그 뒤로 6개월 동안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그는 김정은 시대 들어 가장 잘나가는 간부로 꼽힌 인물이다. 백두산건축연구원 설계원이던 마원춘은 후계자 김정은의 마음을 사로잡아 집권 후인 2012년 5월 노동당 부부장(차관급)에 올랐다. 북한이 김정은 시대 ‘기념비적 창조물’로 내세우는 강원도 마식령 스키장과 평양의 문수물놀이장 등이 마원춘의 작품이다. 이런 공로를 인정해 김정은은 그에게 중장(별 둘, 우리의 소장) 계급도 달아 줬다. 건설현장을 방문한 최고지도자의 바로 옆은 늘 그의 자리였다. 그런 그가 단 한 번의 실수로 숙청된 것이다.
마원춘의 사례는 아무리 신임 받고 승승장구하더라도 김정은의 눈 밖에 나면 하루아침에 몰락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노동당과 군부의 엘리트들이 팽팽한 긴장감 속에 권력 유지를 위해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단지 자리나 권력을 내놓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과 가족, 추종세력이 모두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한다는 점에서 목숨을 건 자리보전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국가정보원이 지난 4월 29일 국회 정보위에 보고한 평양 권력 내부의 은밀한 첩보들은 이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야 정보위 간사들이 전한 보고 내용에 따르면 김정은은 올 들어 넉 달간 15명의 고위 간부를 처형했다. 집권 첫 해인 2012년 17명, 2013년 10명, 지난해엔 41명이었는데 올해는 4월 말까지 벌써 15명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올 첫 대상은 임업성 부상(차관급)으로, 김정은이 야심차게 추진 중인 산림 녹화사업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는 게 이유였다.
2월에는 대동강변 과학기술전당 설계와 관련, 김정은 지시에 이견을 낸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차관급)이 처형됐다. 김정은이 돔 형태로 돼 있는 설계를 ‘꽃(김일성화) 모양으로 하라’고 지시했는데 담당자들이 ‘그렇게 바꾸면 시공도 어렵고 기간도 연장된다’고 하니 바로 공개처형을 지시했다고 한다. 지난 3월에는 과거 음란 동영상 추문에 휘말렸던 은하수관현악단 총감독을 포함한 예술인 4명이 간첩 혐의로 처형됐다고 한다. 국정원은 정보위에 “(예술인 처형은) 북한 핵심 지도부의 가족에 관한 말(연루설)이 흘러나온 것이 배경일 수 있다”고 보고했다.
처형 방법도 잔혹하기 그지없다.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관포를 발사하는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와 같은 방식이란 게 국정원의 평가다. 처형 같은 극단적 방법이 아니더라도 군 간부의 계급을 강등시키거나 해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간부들을 문책한다. 이 때문에 평양 권력 핵심부에는 처형의 두려움 속에 납작 엎드린 공포정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고 한다. 일부 간부는 처벌이 두려워 와병 등의 이유를 들어 자리에서 물러나려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은의 특별조사 지시로 꾀병인 게 드러나 화를 당하기도 했다는 첩보도 흘러나온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김정은 측근으로 불리는 북한 파워엘리트들 사이에선 요즘 ‘적자생존’이란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적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생존전략을 일컫는다. 늘 수첩과 펜을 갖고 김정은 지시사항을 받아 적는 간부만이 권력에서 밀려나지 않고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김정은을 밀착 수행하는 노동당과 군부 핵심 간부는 예외 없이 수첩을 펼쳐 들고 있는 모습이 <노동신문> 사진 등을 통해 드러난다. 폭우 속에서도 수첩이 젖는 줄 모르고 깨알메모에 여념이 없거나, 걸음을 재촉하는 김정은을 뒤따르면서도 필기를 위한 손놀림을 늦추지 못하는 장면이다.
김정은은 고모부 장성택을 ‘건성건성’이란 괘씸죄로 무참하게 처형했다. 사진은 YTN 뉴스 화면 캡처.
김정은의 공포정치는 2013년 12월 고모부 장성택(국방위 부위원장)을 무참하게 처형하면서 본격화했다. 어린 조카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은 이유가 바로 ‘건성건성’이란 괘씸죄에 걸렸기 때문이란 얘기가 간부들 사이에 돈 것이다. 장성택 처형 사태는 잊혀가지만 여진은 계속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계속되는 피의 숙청이 바로 ‘장성택 물빼기’ 작업의 일환이라는 관측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장성택과 연계됐다는 이유로 중앙과 지방당 간부 10여 명이 강건군관학교에서 공개총살됐다. 이송길 해주시당 책임비서를 비롯한 황해남도 간부들은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고 횡령 등 비리를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같은 달 처형됐다. 또 당 재정경리부 간부 몇몇은 노래방에서 김정은 찬양 가요의 가사를 바꿔 부르다 적발돼 총살당했다. 음주를 절제하지 않았다는 ‘술풍 금지’ 지시를 어겨 강등되거나 처형된 사례도 있다.
이런 움직임은 김정은이 지난해 여름 ‘장성택 잔재 청산 2단계 작업’을 지시하면서 본격화했다고 한다. 노동당 조직지도부는 8월 “현대판 종파일당이 집행했던 사업들을 전면 재검토하고 간부들의 충실성을 검증해 이색분자를 색출·제거하라”는 지침도 내렸다. 최고 실세 부서인 조직지도부도 칼날을 비켜갈 수 없었다. 조직지도부 부부장과 선전부 간부 20여 명이 첫 대상에 올라 9월 공개 총살됐다. 이들에겐 ‘반당종파’ 혐의가 씌워졌고 뇌물수수와 여자 문제, 마약 복용 등의 죄가 더해졌다.
당연히 김정은의 곁에는 쓴소리를 할 사람이 없어졌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장성택에 이어 고모 김경희마저 권력 전면에서 퇴장했다는 점에서다. 고모부도 가차 없이 형장으로 보내는 분위기에서 소신 있게 의견을 제시하거나 개혁·개방을 주장할 간부는 없다고 봐야 한다. 오직 김정은을 ‘최고존엄’으로 떠받들고, 절대충성만 강조하는 강경노선만이 살길이란 생각을 북한 핵심 간부층이 굳혔을 것이란 측면에서다.
무자비한 숙청을 동반한 공포정치는 단기적으로 간부들을 절대 복종케 하고 충성을 유도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의사결정 과정에서 김정은의 독단적 판단이 절대시되고 간부들의 보신주의가 판치게 되는 부작용을 낳을 것이란 게 북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장성택 처형을 직접 지켜봐야했던 간부들 사이엔 ‘우리는 파리 목숨’이란 생각이 퍼질 수밖에 없다. 또 최측근 원로들도 김정은에 대한 비위 맞추기에 몰두해 김기남 당 비서는 ‘오묘하고 신비로우십니다’란 말을 김정은에게 쏟아내고 있다는 게 우리 정보당국의 첩보다.
중·장기적으로는 피로감을 증대시켜 파워엘리트 핵심부터 균열이 올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평양의 일부 핵심 간부 사이에서는 ‘이러다간 공화국이 10년 못 간다’는 말이 번지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이 할아버지 김일성과 아버지 김정일과 함께 일했던 원로들에게 욕설에 가까운 모욕적 언사를 퍼붓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당국은 파악하고 있다. 북한 TV 화면의 김정은 입 모양 분석을 통해서다. 한 대북 정보 관계자는 “이른바 혁명원로들이 젊은 지도자 김정은의 좌충우돌식 리더십에 내심 불쾌한 감정을 가질 수 있고, 이런 점이 권력의 균열을 가져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