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크 오버하다 보복사구 ‘퍽퍽’
# 더그아웃이 더 재미있다
가장 화제도 되고 종류도 많은 세리머니는 단연 홈런을 쳤을 때다. 언젠가부터 많은 거포들은 경기 도중 중요한 홈런을 쳤을 때 남들과 다른 독특한 동작으로 기쁨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홈플레이트 부근에서는 주로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거나 자신의 심장 부근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등 가벼운 동작으로 자축한다. 안 그래도 홈런을 맞아 불쾌한 상대 투수와 상대팀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배려 때문이다.
일본 오릭스 이대호는 롯데 시절인 지난 2011년 아내 신혜정 씨에 대한 사랑을 담은 홈플레이트 세리머니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등번호 10번과 부부의 이니셜 ‘DH♡HJ’가 새겨진 목걸이를 건 채 경기에 나섰고, 홈런을 치고 들어오면서 늘 이 목걸이에 입을 맞췄다. KIA 최희섭은 예전에 홈런을 친 뒤 양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세리머니를 펼치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하늘이 아닌 KIA 더그아웃에 수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 베테랑 감독은 “최희섭이 팀과 하나가 됐다는 증거”라며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했다.
4월 10일 롯데의 장성우가 한화와의 경기에서 연장 11회말 끝내기 역전을 투런 홈런을 치자 동료들이 ‘물폭탄’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롯데 자이언츠
더그아웃에서의 홈런 세리머니는 좀 더 자유롭다. 일렬로 늘어선 동료들에게 애정 어린 뭇매(?)를 맞기도 하고, 절친한 선수 한 명과 미리 약속한 동작으로 팬들에게 즐거움을 안기기도 한다. 최근에는 NC의 용병타자 에릭 테임즈와 포수 김태군의 합동 세리머니가 인기다. 지난해에는 테임즈가 홈런을 칠 때마다 김태군이 덥수룩한 테임즈의 턱수염을 잡아당기곤 했다. 밤늦게 경기가 끝나면 테임즈가 김태군의 차에 함께 타고 귀가하곤 했는데, 이때 자연스럽게 개발한 동작이다. 올해는 세리머니가 다 끝난 뒤 둘이 나란히 팬들을 향해 돌아서 거수경례를 하는 동작이 추가됐다.
또 넥센은 창단 첫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2013시즌 후반기에 ‘인간 탄환’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육상 스타 우사인 볼트의 세리머니를 따라하며 팀 전체가 함께하곤 했다. 박병호와 강정호 같은 팀의 간판스타들이 홈런을 많이 친 덕분에 ‘우사인 볼트 세리머니’가 더 유명해졌다. 당시 박병호는 “그 세리머니를 하기 전에 팀 상황이 별로 안 좋았기 때문에 선수들이 하나로 뭉치고 상대와의 분위기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송신영 선배가 제안한 세리머니를 모두 함께 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 예나 지금이나 논란 여전
1986년 9월 2일 삼성의 이만수가 빙그레와의 경기에서 홈런을 친 뒤 양팔을 번쩍 치켜올리며 기뻐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산 양의지도 2011년 홈런 세리머니 때문에 당시 KIA 용병이던 트레비스 블랙클리와 충돌한 경험이 있다. 홈런 타구가 담장을 넘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1루로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트레비스는 베이스를 도는 양의지의 곁으로 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고, 마운드를 내려가면서 당시 두산 소속이던 김민호 코치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메이저리그에서는 홈런을 치고 빨리 뛰지 않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해프닝을 두고 야구계에서는 갑론을박도 벌어졌다.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트레비스가 민감했던 것 같다”는 의견과 “양의지가 주루를 너무 늦게 시작해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다”는 지적으로 갈라졌다.
사실 홈런 세리머니에 대한 생각은 한국의 야구인들끼리도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대체적으로 투수 출신들은 “홈런을 친 후에 액션이 크고 과도한 선수들이 분명히 있다. 투수 입장에서는 기분이 썩 좋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타자의 자유라 크게 의식하지 않는다”는 투수도 분명히 존재한다. 또 많은 타자 출신들은 “한국 타자들도 대체적으로 세리머니를 최대한 자제하는 편”이라고 주장한다. 한 베테랑 타자는 “단기전만큼은 팀 사기를 위해 홈런 세리머니를 크게 할 필요도 있다”고 덧붙였다.
# 점점 진화하는 세리머니
프로야구가 날이 갈수록 발전하듯이, 세리머니도 점점 진화한다. 특히 물을 이용한 세리머니들은 2000년대 이후 생긴 대표적 문화다. 이제는 끝내기 승리가 나오면 선수들이 생수병을 들고 달려 나와 서로에게 쏟아 부으며 기쁨을 만끽하는 게 관례다. 한 베테랑 야구인은 “다들 물을 뿌리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면 솔직히 격세지감을 느낀다. 옛날에는 상대팀 선배들이 무서워서 좋아도 티를 못 내고 조용히 들어왔다. 더그아웃에서 선배들에게 맞는 게 세리머니의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한때는 500㎖짜리 페트병을 넘어 정수기에 꽂는 대형 물통까지 그라운드에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이 귀한 나라에서 지나친 낭비다”, “아이들 교육에 좋지 않다”는 내용의 항의전화가 KBO에 빗발치면서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세리머니는 그렇게 프로야구를 더 풍성한 이야기로 장식한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을 꺾고 4강에 오른 한국 대표팀은 ‘한국 야구가 세계를 정복했다’는 의미로 에인절스타디움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그리고 3년 후, 제2회 WBC에 출전한 후배 대표팀은 또 다시 일본을 이기면서 4강에 진출했고, 선배 대표팀의 영광뿐만 아니라 태극기 세리머니까지 고스란히 펫코파크에 재현했다. 한국 야구 역사에 또 하나의 명장면이 아로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한화 모건 ‘T 세리머니’ 논란 아웃되고도 ‘T’ 그건 아니잖아 한화 외국인 타자 나이저 모건(35)은 어딜 가나 화제를 몰고 다녔다. 모건이 올해부터 한국에서 뛰게 된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수많은 야구 관계자들과 팬들의 관심이 필연적으로 집중됐다. 야구로도 물론 인정을 받았던 선수지만, 그보다 독특한 언행과 세리머니로 더 유명세를 떨쳤기 때문이다. 나이저 모건이 T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모건이 야구를 잘할 때는 T 세리머니가 최고의 흥행 메이커였다. 모건은 밀워키 시절이던 2011년 애리조나와의 내셔널리그 디비전시리즈 5차전에서 끝내기 안타를 때렸다. 29년 만에 챔피언십시리즈 진출을 확정한 밀워키의 모든 팬들은 일제히 모건의 세리머니를 따라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모건은 다음날 “토니 플러시로 변신해 밤새 축하 파티를 즐겼다.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201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뛸 때도 T 세리머니가 요코하마 전 지역에 유행했다.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구단과의 마찰도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도 처음에는 환호를 받았다. 지난 3월 28일 목동 넥센전에서 4안타를 치고 도루까지 한 모건이 최초로 T 자를 그려보이자 관중석이 들썩였다. 한화 팬들의 T 세리머니로 관중석이 물결쳤다. 문제는 그 후 모건이 시도 때도 없이 세리머니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급기야 4월 8일 대전 LG전에서는 2루 도루를 시도하다 아웃을 당하고도 방송 중계 카메라를 향해 T 자를 그려 빈축을 샀다. 야구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늘 강조하는 김성근 감독이 모건을 못마땅하게 응시하는 모습이 화면에 그대로 담겼다. 게다가 모건은 팀이 경기에 지고 있을 때나 그냥 몸에 맞는 볼로 출루했을 때도 세리머니를 멈추지 않았다. 반대로 타격 성적은 세리머니의 화려함을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한화로서는 그야말로 속이 탈 노릇. 좋은 성적이 뒷받침돼야 독특한 세리머니도 빛나는 법이다. [은] |
성급한 세리머니 해프닝 ‘낫아웃’ 된 공을 관중석에 휙~ 섣부른 마무리는 가끔씩 화를 부른다. 칠 때는 홈런인 것 같았던 타구가 펜스 바로 앞에서 잡힐 때도 있고, 당연히 스트라이크인 줄 알았는데 볼 판정이 날 때도 있다. 홈런 세리머니, 삼진 세리머니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이유다. 물론 그 ‘콜’이 너무 빨리 나와도 문제다. 1997년 8월 23일 대구 쌍방울-삼성전에서 벌어진 해프닝 얘기다. 4-2로 앞선 삼성의 9회 초 마지막 수비 때였다. 2사 1·2루 볼카운트 1B(볼)-2S(스트라이크)에서 쌍방울 장재중이 헛스윙을 했다. 주심은 신속하고 당당하게 경기 종료를 선언했다. 삼성 포수 김영진은 곧바로 관중석으로 공을 던져 승리를 자축했다. 그때 삼성 백인천 감독과 쌍방울 김성근 감독이 동시에 움직였다. 백 감독은 김영진에게 “1루로 공을 던지라”고 외쳤고, 김 감독은 장재중에게 “1루로 뛰라”고 소리쳤다. 공이 한 번 바운드되면서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이 됐으니, 삼성은 장재중을 태그해야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관중석으로 공을 던진 김영진에게는 장재중을 아웃시킬 방법이 없었다. 결국 장재중은 무사히 1루를 밟았고, 끝난 줄 알았던 경기는 양 팀 감독과 심판의 실랑이 끝에 7분 만에 재개됐다. 쌍방울은 이어진 2사 만루서 당당하게 점수를 뽑아 6-4로 승부를 뒤집었다. 국보 투수로 이름을 날린 해태 선동열에게도 너무 성급해서 부끄러웠던 세리머니의 기억이 있다. 1994년 9월 8일 잠실 해태-LG전. 마무리투수로 등판한 선동열은 5-4로 앞선 9회 말 1사 후 LG 노찬엽과 허문회에게 연속 3루타를 맞고 동점을 내줬다. 엎질러진 물은 어쩔 수 없고, 어떻게 해서든 역전은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타석에는 LG 백업포수 김정민이 섰다. 주전포수 김동수가 방위병 동원훈련에 참가하면서 안방마님으로 대신 출장한 선수였다. 김정민은 천하의 선동열이 던진 초구를 힘차게 쳤다. 타구는 왼쪽 하늘로 힘없이 높게 떴다. 짧은 플라이아웃으로 확신한 선동열은 두 팔을 들어 ‘잡았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쉽게 잡힐 듯 보였던 타구의 포물선이 점점 조금씩 멀어지더니 담장을 살짝 넘어갔다. 선동열이 한국에서 11년간 맞은 28개의 홈런 가운데 유일한 끝내기포. 선동열은 훗날 “그때가 가장 부끄러웠던 것 같다. 다행히 TV 중계 카메라와 관중이 모두 타구를 바라보고 있어서 나를 주목하지 않았다”며 웃곤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