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자의 복수혈전’ 측근들만 치명상
홍준표 경남지사가 지난 8일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해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고등검찰청에 소환됐다.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사건 발생 초기엔 수사의 첫 타깃이 김기춘·허태열 전 청와대비서실장이 될 것처럼 보였다. 특히 김 전 실장의 경우 메모지에 유일하게 금품을 전달한 것으로 추정되는 날짜와 장소까지 적혀 있어 핵심 수사 대상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무르익으면서 두 전직 실장과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에 대한 얘기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8명이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총 16억 원 중 이들과 관련 있는 것만 해도 13억 원에 이르는데도 말이다.
반면 메모지에 금액 없이 이름만 적혔던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이후 성 전 회장으로부터 3000만 원을 받았을 당시 정황이 구체화되며 총리직에서 낙마하는 등 직격탄을 맞았다. 성 전 회장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와 이 전 총리 자신의 잇단 거짓말에 결국 발목이 잡히면서 타깃이 된 것이다.
홍준표 경남지사는 오히려 이 전 총리보다 더 상세하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1억 원이 전달됐는지가 드러났다. 현재 검찰 수사 속도라면 홍문종 새누리당 의원의 2억 원 수수 정황도 곧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면 리스트에 오른 8명 중 피의자로 포토라인에 설 사람은 일단 3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법원의 재판과정에서 달라질 수 있다. 무엇보다 혐의가 구체적으로 드러난 홍 지사 등의 경우 법원에서 치열한 법리 다툼을 벌이다보면 상황 변화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윤승모 전 경남기업 부사장은 1억 원을 홍 지사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홍 지사는 윤 전 부사장의 배달사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금품 공여자인 성 전 회장이 사망한 상황에서 윤 전 부사장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공소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의 경우 지난 2012년 임석 솔로몬 저축은행 회장으로부터 1억 4000만 원 상당의 불법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 등으로 불구속기소됐다가 1·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지만, 대법원에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바 있다. 대법원은 “정 의원이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객관적인 물증이 없는 사건에서 임 회장의 진술이 가장 직접적인 증거이자 사실상 유일한 증거”라며 “그러나 임 회장의 진술은 다른 관련자들의 진술이나 당시의 상황 등에 비춰보면 그 신빙성을 인정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정 의원은 지난해 11월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정 의원의 경우 금품 공여자인 임 회장의 진술이, 홍 지사는 금품 전달자인 윤 전 부사장의 진술이 핵심 증거라는 점에서 두 사건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검사장 출신의 한 법조인은 “홍 지사뿐만 아니라 이번 사건은 금품 공여자가 사망한 상황에서 전달자나 다른 주변 정황 등을 근거로 기소를 하더라도 법원에서 공소유지가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 법조인은 특히 “복수라는 게 현장에서 검으로 베어야 복수인 거지 (성완종 전 회장이) 다른 것도 아닌 살아있는 권력에게 제도(검찰 수사)를 이용해서 복수하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었다”며 “지난 재·보궐 선거에서 박근혜 정부에 정치적 타격도 안겨주지 못한 것을 보면 사실상 실패한 복수극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 성완종 최측근들
성완종 전 회장의 최측근인 박준호 전 상무(왼쪽)와 이용기 전 비서실장.
박준호 전 경남기업 상무와 이용기 전 비서실장이 대표적이다. 두 사람은 성 전 회장의 가장 지근거리에 있었던 만큼 검찰은 이들이 성 전 회장 생전 동선이나 행적, 비밀장부 존재 여부 등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구속 수사를 하고 있다. 법조계 한 인사는 “성 전 회장이 이 전 실장을 자식 못지않게 아꼈다”며 “성 전 회장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이 전 실장이 함께 있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측근인 정낙민 인사총무팀장의 경우 구속 상태는 아니지만 연일 검찰에 불려와 조사를 받고 있다. 정 팀장의 경우 경남기업의 조직적인 증거인멸 의혹에 가담하지 않아 구속은 피했지만 여전히 검찰의 주요 조사대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성 전 회장 측 한 인사는 “차라리 리스트를 뒷받침할 만한 뭐라도 속 시원히 남겨놓고 가셨으면 측근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다”며 “밀린 월급까지 챙겨주고 싶을 정도로 성 전 회장이 아꼈던 측근들이 오히려 지금은 가장 힘든 상황에 처했다”고 토로했다.
반면 성 전 회장 혐의에 대해 구체적으로 검찰에 진술했거나 관련 자료를 넘긴 인사들은 지금도 검찰 수사에 협조하면서 ‘선처’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성 전 회장의 ‘금고지기’로 알려진 한 아무개 전 부사장은 250억 원에 달하는 성 전 회장의 비자금 출금 내역을 검찰에 통째로 넘겼다는 얘기도 나왔다. 사용처가 확인되지 않은 32억 원의 비자금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도 한 전 부사장 입을 통해서였다. 특히 한 전 부사장은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새누리당에 2억 원을 성 전 회장이 전달했다는 진술을 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한 전 부사장 밑에서 일했던 자금 담당 직원의 경우 1조 원가량에 달하는 분식회계 자료를 검찰에 모두 넘긴 것으로도 전해진다. 이 자료는 분식회계 전후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전 부사장보다 앞서 경남기업 회계를 책임졌던 전 아무개 전 상무도 성 전 회장이나 경남기업의 자금 흐름과 관련한 자료를 검찰에 상당 부분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전 전 상무는 2008년까지 금고지기 역할을 한 만큼 2007년 금품 로비 규명의 핵심 인물로 거론된 바 있다.
성 전 회장 측 다른 인사는 “측근 그룹과는 달리 회계를 담당했던 인사들의 경우 검찰이 추가로 수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세한 자료들을 넘긴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사건 발생 초기 성 전 회장 측근그룹과 금고지기그룹 간에 갈등설이 나왔던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1조 원에 달하는 분식회계와 관련해 성 전 회장이 한 전 부사장에게 같이 안고 가자고 얘기한 것 같은데 회사가 뒤를 봐줄 상황이 안 되면서 한 전 부사장이 검찰에 다 털어놓은 것 같다”며 “한 전 부사장은 지금도 검찰에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어 기소할 때나 재판에 넘겨진 후 구형량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했다.
김근호 언론인
포스코는요? 검찰 수사 속도전…정동화 넘어 정준양으로 “포스코는 살아있는 기업이고 경남기업은 죽은 기업이다. 검찰에 불려 와서 조사받는 사람들의 진술을 보면 살아 있는 기업과 죽은 기업의 차이는 극명하다. 한쪽(포스코)은 너무 말을 안 해서 수사가 어렵고 다른 한쪽(경남기업)은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정준양 전 포스코 회장. 그랬던 포스코 수사가 이제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검찰은 이번 주 정동화 전 포스코건설 부회장을 소환조사한 후 정준양 전 포스코그룹 회장도 곧이어 부를 예정이다. 정동화 전 부회장의 경우 포스코건설 협력업체 등을 통해 비자금 조성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을 뒷받침할 만한 진술과 자료 등을 확보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검찰은 정준양 전 회장에 대해서도 포스코가 무리한 인수·합병(M&A)을 추진하는 과정에 관여한 업체 등을 통해 관련 진술 등을 확보한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검찰은 지난 7일 포스코 계열사인 포스코플랜텍(옛 성진지오텍)의 자금 유용 혐의와 관련, 전 아무개 전 성진지오텍 회장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 했다. 전 전 회장은 지난 2010년 부실한 성진지오텍을 포스코에 비싼 값에 매각하는 과정에서 수백억 원의 차익을 거둬 특혜를 입었다는 의혹이 일었다. 성진지오텍이 포스코에 인수된 2010년 3월은 정준양 전 회장 때다. 이로써 포스코 수사는 비자금 조성 의혹과 M&A 과정에서의 특혜 의혹 등 ‘투트랙’으로 진행하게 됐다. 검찰 수사에 따르면 포스코의 비자금 창구는 포스코건설과 30년간 포스코와 거래해온 연강선재 제조업체 코스틸이다. 검찰은 정 전 부회장의 경우 포스코건설에서 조성한 비자금의 경유지라고 판단하고, 그를 통해 정 전 회장이나 정·관계로 비자금이 흘러갔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 전 부회장의 중학교 동창이자 거물 브로커로 알려진 컨설팅업체 I 사 장 아무개 대표가 정동화 전 부회장의 비자금 조성 개입 여부를 일부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재천 코스틸 회장은 포스코와 여재 슬래브 등을 거래하는 과정에서 납품가나 거래량을 조작하는 등의 방법으로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했다. 검찰은 이 비자금이 정준양 전 회장에게 흘러들어간 것으로 보고 박 회장을 피의자 신분으로 여러 차례 조사했다. 박 회장에 대해서도 곧 신병처리를 할 예정이다. 그동안 피의자로 신분이 전환된 포스코건설 전·현직 임직원은 모두 8명이다. 포스코가 성진지오텍을 인수하는 과정에 이명박 정부 실세 개입설도 제기된 바 있어 검찰이 전 전 회장을 소환조사할 경우 이 같은 의혹에 대해서도 실체가 규명될 수 있다. 울산 출신인 전 전 회장은 울산 지역 정·재계 인사들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광폭 인맥을 자랑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왕차관’으로 불린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 등과도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정동화 전 부회장과 정준양 전 회장을 소환하고 나면 포스코가 비자금을 조성한 후 정·관계 로비를 했는지에 대해서도 집중 수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살아있는 기업에 대한 수사는 어려울 수밖에 없지만 이제는 가야 할 길이 보인다”고 말했다. [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