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명분은 다르지만 속셈은 하나
정치권에서는 문재인 대세론이 흔들리자 비노계의 역습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4·29 광주 서구을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천정배 후보가 광주 금호동 선거사무소에서 당선이 확실시 되자 환호하는 모습. 연합뉴스
새정치민주연합 비노(비노무현)계 한 인사가 던진 말이다. 비노의 전면전이 시작됐다. 지난 2·8 전국대의원대회의 ‘컨벤션효과’(정치적 이벤트 이후 지지율이 상승하는 현상)로 승승장구하던 문재인호가 4·29 재·보궐선거에서 전패하자 비노는 한층 커져 버린 원심력에 불을 지폈다.
친노의 야심 찬 2016년 공천 프로젝트였던 ‘호남 물갈이’가 야권의 텃밭 ‘광주 서구을’, 서울의 호남 ‘서울 관악을’ 보궐선거 참패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자 비노가 역습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셈이다. 빨라진 비노의 움직임과 ‘뉴 DJ(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을 천명한 천정배발 정계개편이 맞물릴 경우 야권 권력지형은 격랑 속으로 빠져들 전망이다.
야권발 정계개편의 큰 줄기는 ▲빅텐트(야권 대통합) ▲헤쳐모여 식 신당 창당(제1야당+호남 세력+제3세력) ▲신설 합당론(시민사회단체 중심의 제3지대 신당 창당) 등이다. 당초 가장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은 빅텐트였다. 제1야당과 정의당, 노동당 등을 한데 묶는 통합 정당론이 골자다. 특히 2012년 총·대선에서 ‘반쪽 빅텐트’로 나선 범야권이 정권 탈환에 실패하자 빅텐트의 필요성은 더욱 절박했다. 하지만 4·29 재보선 참패로 문재인호가 야권발 정계개편의 주도권을 놓치면서 야권발 정계개편은 ‘호남’ 중심의 헤쳐모여 식 신당 창당으로 쏠릴 전망이다.
4·29 광주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천정배 무소속 의원도 호남 중심의 전국정당 요소로 ‘호남(지역)·DJ(가치)·비노무현(세력)’ 등을 꼽은 만큼 ‘비 새정치연합’ 중심의 헤쳐모여 식 신당 창당을 속도전으로 전개할 가능성도 있다. 핵심 키는 ‘호남 점령’이다. 판은 짜였다. 천 의원을 필두로 한 ‘제3지대’ 호남 신당론, 동교동계인 새정치연합 권노갑 상임고문과 박지원 의원의 연대 전선, 새정치연합 내에서 호남 신당 창당에 군불을 땐 정대철 상임고문 등의 움직임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천정배발 ‘뉴 DJ’ 연합과 새정치연합 내 호남 의원과 동교동계의 움직임이 맞물릴 경우 친노가 고립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박지원 의원이 DJ의 3남인 김홍걸 전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주고 수도권(서울) 출마를 노리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DJ 적자’를 차지하기 위한 사전포석이다. 또한 광주 K 의원도 차기 총선에서 수도권 및 광주시장 출마 등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친노의 ‘호남 대학살’에 맞서 총궐기하고 있는 셈이다.
친노 관계자는 이와 관련, “문재인 체제는 제1야당 최초로 호남의 약한 고리를 드러낸 유일한 지도부”라며 “비노가 이걸 고리 삼아 전방위적으로 당을 흔들고 있는 것”이라고 힐난했다. 실제 비노의 역습은 체계적·조직적으로 전개됐다. 계파 갈등의 도화선은 김한길계인 주승용 최고위원 사퇴로 촉발됐다. 친노(친노무현) 청산을 촉구한 그는 지난 8일 정청래 최고위원과의 ‘공갈’ 발언 공방 과정에서 “치욕적”이란 말을 남긴 채 칩거에 들어갔다. 급기야 계파 수장인 김한길 전 공동대표도 문 대표를 향해 “친노 좌장이냐 대표주자냐 결단할 시점”이라고 초강수를 뒀다.
권노갑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왼쪽에서 세 번째)과 동교동계 인사들이 4월 7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으로 향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동교동계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권노갑·정대철 상임고문은 주 최고의원 사퇴 선언 날 박지원 의원과 김한길·안철수 전 공동대표 등을 각각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다음 날 서울 모처에서 회동하고 ‘문재인 책임론’에 공감대를 형성했다. 야권발 정계개편의 핵인 호남 ‘이니셔티브’(주도권)를 쥐려는 의도다. 계파 갈등의 파국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후 비노 성향 평당원들은 정 최고위원을 윤리심판원에 제소했고, 새로운 지도부 구성을 위한 임시 전당대회 구성 움직임도 현실화됐다. 비노계 의원은 “문 대표에 대한 재신임을 물어야 할 판”이라고 격분했다. 비노 내부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셈이다.
격한 감정만큼 초조함도 엿보였다. 2012년 총선 참패 이후 단행된 비노의 역습이 번번이 실패해서다. 당 한 관계자는 “18대 대선 직전부터 비노계의 역습이 시작됐다”고 귀띔했다. 그 첫 테이프는 새정치연합 출범을 이끈 김한길 전 공동대표가 끊었다. 김 전 대표는 대선 경선을 앞둔 2012년 8월 중순 안철수 전 공동대표(당시 서울대 교수)의 ‘멘토’로 알려진 법륜 스님을 국회 토론회에 초청했다. 이 자리에는 비노계 20여 명이 참석했다.
당시 야당 율사 출신 의원들의 ‘안철수 지지’ 움직임이 일면서 범 비노연대가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안 전 대표는 야권 단일화 과정에서 “영혼을 팔지 않았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전격 사퇴했다. 미완의 단일화에 그친 것이다. 결국 범야권은 권력 탈환에 실패했다.
두 번째 비노 역습은 새정치연합의 출범(2014년 3월)으로 이어졌다. 소문만 무성하던 ‘김한길·안철수’ 연대가 현실화됐다. 하지만 친노 강경파의 지도부 흔들기로 힘이 빠진 ‘김한길·안철수’ 전 공동대표는 지난해 7·30 재보선 참패(11 대 4)로 전격 사퇴했다. ‘주승용 사퇴’로 촉발한 이번 사태가 비노의 세 번째 역습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변수는 지지율이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새정치연합 출범 상황을 눈여겨봐라. 당시 민주당 지지율은 15%대였다. 20%대 중반인 문재인호의 지지율이 그 선으로 떨어진다면, 탈당 원심력이 증폭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지난해 2월 넷째 주 정례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0%포인트)에 따르면 정당 지지율은 새누리당 47.0%, 안철수 신당 19.0%, 민주당 13.3%로 나타났다. 박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은 59.7%였다.
하지만 호남 신당 창당이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고문의 구심력이 약한 데다, 현역 의원들은 탈당보다는 공천권 보장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성엽 의원은 “공천혁신특위를 구성해 주 최고위원에게 위원장을 맡기자”고 했다. 비노가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근거다. 문 대표가 계파를 초월한 초당적 혁신기구를 제안할 경우 계파 갈등이 봉합될 수 있다는 얘기다.
당 한 관계자는 동교동계를 향해 “친노 기득권 포기를 주장하면서 호남 기득권을 쥐고 있겠다는 것이냐”며 “호남발 신당 창당은 ‘호남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을 만들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