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내는 ‘홍’ 주워담는 ‘이’
‘성완종 리스트’ 관련 조사를 받기 위해 피의자 신분으로 각각 8일과 14일 서울고등검찰청에 출석하고 있는 홍준표 경남도지사와 이완구 전 국무총리. 박은숙·최준필 기자
# ‘입’이 화근인 홍준표
홍준표 경남지사는 지난 4월 10일 성완종 리스트가 공개된 후 거의 매일 관련 발언들을 쏟아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홍 지사는 자신이 내뱉은 너무 많은 말로 인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났다. 홍 지사는 리스트가 공개된 4월 10일 경남도청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성 전 회장을) 개인적으로 둘이 만난 적도 없고 황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나흘 뒤에는 SNS에 “2011년 6월 전당대회를 전후해 서산지구당 당원간담회에서 잠깐 만나 인사한 것 말고는 성완종 씨를 만난 일도 없고, 전화통화 한 일도 없다”고 올렸다.
또 같은 달 30일 출근길에는 “2011년 11월 초 디도스 사건으로 정신없을 때 국회 대표실에서 성 전 회장을 수행원들과 함께 만난 적이 있다. 거기서 한 얘기는 검찰에서 밝히겠다”고 말을 바꿨다. 결국 “개인적으로 둘이 만난 적이 없다”던 홍 지사는 성 전 회장을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된 시점과 그 후에 두 번이나 만난 셈이다. 그러다 홍 지사는 4월 22일 갑자기 “오늘부터 내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일부 언론도 ‘입 닫은 홍준표’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홍 지사의 입은 다음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다시 열렸다. 홍 지사는 이날 출근길에 기자들에게 “올무에 걸렸을 때는 차분하게 올무를 풀 그런 방안을 마련하고 대처해야 한다. 올무에 걸린 짐승이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치면 올무가 더 옥죄어 든다. 올무에 걸렸을 때 차분하게 풀 방안을 마련하고 대처해야지 흥분하고 자제성을 잃으면 그 올무는 더 옥죈다. 평소와 달리 이 사건에 차분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이다. 이후 홍 지사는 더 많은 발언들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20여 년 전 선거법 위반 재정신청사건에서 나는 ‘팻감’으로 사용된 적이 있다. 나를 수렁에서 건져줄 사람은 나 밖에 없다(5월 3일).”
“거짓이 아무리 모여 봐야 참이 되지 않는다(5월 4일).”
“검찰의 관리 통제를 받아온 윤 씨의 증언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유일한 증인을 한 달 동안 검찰이 통제 관리하면서 만들어낸 진술조정을 받아들이기 힘들다(5월 6일).”
홍 지사는 검찰 소환 조사 이후 ‘집사람 비자금’ 발언으로 사실상 설화의 정점을 찍었다. 홍 지사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한 경선기탁금 1억 2000만 원의 출처가 성 전 회장으로부터 받은 1억 원이 섞여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5월 11일 “대여금고에 있던 집사람 비자금”이라고 밝힌 것. 이날 기자간담회를 했던 홍 지사는 전날엔 하루에 4번, 이날은 3번 SNS에 검찰 수사 관련 글을 올렸다.
당시 검찰 고위 관계자는 “법률가라면 입을 닫고 있어야지 왜 자꾸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상황을 악화시키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이 발언 이후 국회대책비 횡령 의혹에 또 다른 불법 정치자금 수수 논란이 일면서 홍 지사가 자충수를 뒀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사실 검찰 내에선 회심의 미소를 짓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홍 지사 발언의 신빙성이 떨어질수록 검찰 수사의 자신감은 더 높아졌던 것이다. 다른 검찰 고위 관계자는 “홍 지사가 본인 일이 되다보니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중심을 잃은 것으로 판단된다”며 “본인의 말이 오히려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홍 지사 측 변호인들이 그의 입단속을 하지 않는 데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기류도 있다. 이에 대해 서초동의 한 중견 변호사는 “변호인이 입단속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홍 지사 본인이 알아서 저런 행동을 하고 있지 않겠느냐”며 “성격상 변호인들이 얘기해도 아마 안 들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납작 엎드린 이완구
홍 지사와는 달리 이 전 총리는 4월 27일 총리직을 사퇴한 이후부터 줄곧 ‘침묵모드’를 유지해왔다. 5월 14일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나왔을 때도 가급적 말을 아꼈다. 이 사건 초기와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모습이다. 이 전 총리 측 한 인사는 “변호인이 총리 측에 이 사건과 관련해서 외부의 어느 누구하고도 전화도 하지 말아달라고 얘기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단순한 접촉도 오해 소지가 다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전 총리가 특히 침묵하는 이유는 이 사건 초기 불거진 회유 의혹을 의식해서다. 이 전 총리 측 다른 인사는 “사람이라는 게 말을 하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오해받을 언급이나 단어가 튀어나올 수 있는 데다, 회유 의혹이 또 다시 불거질 경우 이 전 총리에게 상당히 불리할 수 있어 각별히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 전 총리 측도 “검찰 조사를 받기 전까지” 침묵하기로 한 만큼 그 이후 상황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관측이 나온다. 특히 이 전 총리가 검찰 수사에서 부당하다고 느낀 부분이 있을 경우 그의 성향상 여론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이 경우 이 사건 초기와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4일 검찰 조사 당시 “필요하면 조사 후 인터뷰를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전 총리는 4월 10일부터 15일까지 거짓 해명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결국 총리직을 사퇴했다. 4월 10일엔 총리실을 통해 “성 전 회장은 19대 국회에서 의정활동을 한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아니다”고 밝혔지만, 다음날 성 전 회장과의 통화기록 수백 건이 공개됐다. 또 성 전 회장이 이 전 총리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그의 거짓말은 또 다시 입증됐다. 여기에 성 전 회장 측근들에게 10여 차례 전화를 걸어 회유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면서 리스트 공개 3일 만에 자진사퇴론이 불거졌다. 그러자 그는 사태 무마를 위해 “야당 의원도 구두로 성 전 회장 구명을 나에게 요청했다”거나 “만약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제 목숨을 내놓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했다.
검찰 간부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 전 총리가 검찰 조사를 앞두고 한 17일 동안은 잘 참았는지 몰라도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검찰 조사 전에는 굳이 쓸데없는 얘기를 해서 검찰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그런 부담도 없으니 그동안 답답했던 마음을 ‘입’으로 풀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근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