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미저리 | ||
우선 발신번호표시금지 전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했다. 이동통신회사 지점을 방문했다. 욕설이나 음담패설 같은 사생활 침해의 증거가 담긴 녹음 내용이 필요하다고 했다. 녹음을 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문자 생각이 났다. 욕설이 담긴 문자는 증거 효력을 발휘했다. 이동통신회사는 잠시 뒤 발신번호표시금지 전화를 건 여자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확인한 전화번호는, 충격이었다. 그녀는 열흘 전에 만났던 대학교 동창생이었다. 자신이 의대 출신이라고 소개했던 그녀와는 금세 친해졌다. 선한 외모에 조용조용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던 그녀는 선선히 자기 속내를 얘기했다. 그녀가 근무한다던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결과가 더 충격이었다. 그런 의사는 존재하지도, 존재한 적도 없었다. 그녀는 조작된 존재였던 것이다. 그리곤 자기 전화와 발신번호표시금지 전화로 번갈아 통화를 하면서 상대를 희롱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때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고민하던 문제는 해결됐나요?” 순간, 섬뜩했다. 그녀는 비밀을 알고 있고 어쩌면 그 비밀을 악용할 수도 있었다. 서둘러 경찰서로 내달렸다. 그 사이 다시 발신번호표시금지 전화가 몇 차례 울렸다.
<미저리>의 주인공인 간호사 ‘케시 베이츠’는 자신의 관심을 받아주지 않는 소설가를 고문하고 학대한다. 그녀가 스토킹을 하는 표면적인 이유는 소설의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지만, 결국 자신의 집착에서 만족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제임스 칸’은 교통사고를 당한 자신을 구해준 케시 베이츠의 친절함을 이용하기 위해 그녀에게 애정을 보인다. 그게 빌미였다. 그의 친절 때문에 그녀의 집착이 시작된다. 그녀는 자기 스스로 감정을 키우고 관계를 확대하는 ‘스토커’였다.
그 후로도 발신번호표시금지 전화를 계속되고 있다. 섹스가 얽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녀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거나 그런 암시를 주는 행위를 했다면 더욱 끔찍한 집착이 시작됐을 것이다. 스토커가 생겼다.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됐다.
지형태 영화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