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박까지 깰 뻔…‘박근혜가 당·했·다’
▲ 지난 3일 박근혜 대표(오른쪽)와 김덕룡 원내대표가 상임운영위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당직자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 ||
지난 3일 열린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의 입에서 ‘행정수도법-과거사법 빅딜’로 오해할 만한 발언이 나왔다. 이에 한나라당은 정 대표가 한나라당의 분열을 가져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를 흘린 것이라며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여권도 ‘무고죄’를 들먹이며 강공으로 맞서고 있다.
정치권은 구체적 팩트도 없고 정황상 무리가 있는 빅딜설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대세다. 하지만 빅딜설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기도 의문스런 점이 적지 않다.
먼저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여야 간 ‘합의’가 있었지 않느냐는 의혹이 있다. 아니면 박근혜 대표가 여권의 ‘공작’에 걸려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심지어 야당에서는 협상의 주역 김덕룡 원내대표가 뭔가 걸려든 게 있어서 그렇게까지 해준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춘삼월에 난데없이 떠오른 빅딜의 찬바람을 따라가봤다.
사실 ‘빅딜설’은 이미 지난 2월 중순부터 정치권에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열린우리당은 비록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개혁입법안에 대해 유연한 입장을 밝히긴 했지만 2월 임시국회가 중반부를 지나면서도 국가보안법 폐지 등 3대 입법에 대해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배경을 두고 많은 말들이 오간 게 사실이다. 기자들은 ‘이면합의설’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사생결단식의 전투를 벌이다가 갑자기 개혁입법안이 쑥 들어가 버리고 각 상임위에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이 나올 만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 일부 의원들의 언행이 이미 국회 주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빅딜설’을 더욱 부채질하는 계기가 되었다. 먼저 지난 3월2일 열린우리당 우윤근 의원은 ‘어떻게 처리될 것 같으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3대 법안까지 처리를 하지 않기로 했는데 통과시켜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는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날인 3월3일 정세균 원내대표의 입에서 “행정도시 특별법을 원만하게 처리하기 위해선 과거사법 처리를 연기해 주는 게 좋겠다는 완곡한 요청이 있어 부득이 미루게 됐다”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여기에 국회 신행정수도 특위 소위원장인 열린우리당 박병석 의원도 다음날인 4일 기자들과 만나 “정부와 여당은 특별법 통과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했다”는 묘한 발언을 해 논란을 가중시켰다.
비교적 객관적 입장에 있는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도 이에 대해 “당시 통과 의결 정족수가 왔다 갔다 했다. 결국 한나라당이 15명 정도를 채워 줘 전격 통과되었는데 여기에 의문이 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까지 여당을 도와줄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당시 본회의가 끝나고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이 책임을 다했다’는 말까지 나왔다. 한나라당이 뭔가 다른 반대급부 없이 책임을 다하면서까지 열심히 할 일이 있는가”라고 말했다.
▲ 지난 4일 ‘빅딜설’의 빌미를 제공한 정세균 원내대표(왼쪽)가 집행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오른쪽은 임채정 당의장. | ||
하지만 이런 주장은 오히려 또 다른 의혹을 부를 소지도 있다. 한나라당이 과거사법 연기 처리로 만족할 수 없다고 할 때 그 이면에 또 다른 것을 챙겼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미 여야는 지난 연말 천정배-김덕룡 대표 간의 ‘2-2 밀약설’이 흘러나오자 양측 지도부 모두 곤경에 빠진 적이 있었다. 비록 이 ‘밀약’이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이번에 나온 빅딜설도 ‘2-2 밀약설’과 그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김덕룡 협상 라인이 살아 있는 한 정세균 신임 대표가 천정배 전임 대표의 카드를 이어받아 ‘딜’을 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1-3 밀약설’이 제기될 수도 있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여권은 차기 대선을 앞두고 행정중심수도 특별법에 당의 명운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어떤 개혁 법안보다 이 법 통과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한나라당으로서도 무정쟁의 해로 선포하고 상생을 하겠다고 한 이상 ‘1-3’ 정도는 협조를 해주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될 경우 여권이 3대 개혁법안의 연내 처리 유보 또는 최소한 한나라당의 ‘우보 전술’을 용인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원내대표 경선을 선언한 안상수 의원의 주장이 관심을 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나라당이 과거사법 처리를 4월로 연기해준 것에 대해 정치적 이득이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일단 그 법안들을 4월로 연기해 시간을 번 뒤 안되면 5, 6월로도 넘어갈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는 그동안 한나라당의 협상 전략이었던 ‘무기한 시간 끌기’ 전략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4월로 연기한 뒤 계속 협상을 지연시켜 3대 개혁 법안을 ‘누더기’로 만들든지, 아예 폐지시킨다면 한나라당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인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전략을 모를 리 없는 여권이 행정수도 특별법 통과를 대가로 이를 묵인해주겠다는 이면합의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런 ‘밀약’이 깨졌을까. 한나라당은 여기에 여권의 ‘공작정치’가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정두언 의원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정 대표는 평소 신중하고 입이 무겁기로 소문난 의원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안상수 의원도 “공당의 대표가 거짓말을 하겠는가”라며 정 대표 발언이 사실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측은 “여권은 계속 지지율 하락과 정체를 반복하고 있다. 그래서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뭔가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한나라당 분열 전술을 택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박 대표는 뒤늦게 정 대표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고 매우 격앙해서 소송까지 가며 강경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 지난 2일 국회 본회의장 전광판에 나타난 ‘행정도시특별법’ 표결 결과. | ||
먼저 한나라당 정두언 의원은 지도부의 합의 강박증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그동안 박 대표는 당명 개정 과정에서 지도력에 큰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시 지도부 뜻이 관철되지 못할 경우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반대파들의 주장을 무릅쓰고 강경하게 밀어붙였는데 결과적으로 여권의 꼼수에 당한 꼴이다. 특별법 통과 뒤의 여론조사에서 충청권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진 것도 이를 증명한다”고 해석했다.
홍준표 의원도 이에 대해 “애초 한나라당의 주장은 충남 연기공주에 과학기술도시를 만들자는 것이었고 따라서 정통부와 과기처 등 7개 부처정도만 옮기자는 입장이었는데 갑자기 지도부의 입장이 바뀐 것에 대해 의원들이 의아해 했다”고 밝히면서 “여당이 노리는 것은 한나라당의 분열이다. 이렇게 되면 4월에 반드시 과거사법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한나라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당한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지도부가 상생 정치로 행정수도 특별법을 합의해 주었지만 이는 결국 여권의 덫에 걸려들기만 했을 뿐 정치적 이득은 전혀 챙기지 못한 채 당내 분란만 가중되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빅딜설 배경에 김덕룡 한나라당 전 원내대표의 ‘사심’이 작용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김 전 대표는 지난 연말부터 국가보안법 처리를 두고 박근혜 대표와 갈등을 빚어왔다. 그런데 이번 처리과정에서 행정수도 처리 ‘선물’을 여권에 주고 확실한 신뢰를 얻은 뒤 나중에 정계개편과 개헌론 확산 등 정치적 변형이 이루어질 때 여야를 넘나드는 정치인으로서 지분을 확보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었다는 것이다. 박 대표도 허약한 리더십 제고와 과거사 부담에서 벗어나는 부수입을 챙길 수 있다는 점에서 김 전 대표의 ‘오버’를 눈감아주었다는 해석이다.
이에 대해 김 전 대표측은 “누구든지 주관에 따라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를 밟고 지나가라’는 순수한 뜻에서 사퇴했던 것이다. 온갖 억측에 대해 굴욕감마저 든다”고 반박했다.
어쨌거나 ‘쌩뚱맞은’ 밀약설 공방에 ‘상생’은 날아가 버렸고 꽃피는 춘삼월에 여의도는 아직도 찬바람만 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