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 마비’ 바이러스…감정 문제가 아닌 병
의처·의부증은 이를 질병이 아닌 일시적 감정 문제로 치부하거나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심리 때문에 조기치료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남편 이 아무개 씨(34)와 아내 박 아무개 씨(30)는 결혼 3년차 부부다. 최근 이 씨의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지면서 박 씨의 잔소리가 늘었다. 영업직인 남편이 행여나 접대자리를 가면 ‘딴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 된다. 박 씨는 남편이 그럴 일이 없다며 애써 생각을 지우지만 밤늦게 남편이 통화만 해도 여자랑 하는 것은 아닌지 신경 쓰인다. 결국 박 씨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털어놨다. 이 씨도 괜한 걱정을 하게 해 미안하다며 회식자리를 줄이고, 밤늦게 전화한 사람은 직장상사라며 아내에게 확인시켜줬다. 박 씨는 더 이상 괜한 의심은 하지 않는다.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는 않다.
최 아무개 씨(42)와 강 아무개 씨(여·33)는 맞벌이 부부다. 최 씨는 젊고 능력까지 갖춘 아내에게 반해 결혼했지만 오히려 이제는 그것이 불안하다. 최 씨는 아내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와 이메일을 하루 5~10회 확인한다. 아내 강 씨가 이웃집 남자와 인사를 하는 것만 봐도 최 씨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아내 강 씨도 매번 “당신이 너무 예민한 것”이라고 다그치지만 최 씨의 근거 없는 의심은 날로 심해졌다. 어느 날 아내 강 씨의 전화기 너머로 남자 목소리를 들은 최 씨는 전화기를 뺏어들었다. 아내와 통화를 하던 사람은 아내의 친오빠였다. 하지만 최 씨는 “친오빠와도 그 짓을 하느냐”며 강 씨를 몰아세웠다.
‘증’이 붙었지만 의처·의부증이 병명은 아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음에도 끊임없이 배우자의 불륜을 의심한다면 질투망상, 부정망상 등 ‘망상장애’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남편의 늦은 귀가시간에 예민해진 박 씨와 이웃집 남자와 인사하는 아내를 의심하는 최 씨는 의처·의부증일까?
단순 질투의 감정과 의처·의부증은 차이가 있다. ‘왜 귀가시간이 늦어지지?’ ‘왜 늦은 시간에 통화가 잦아지지?’ 같은 의심과 질투를 하는 배우자를 무조건 의처·의부증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단순 질투일 경우 의심이 가는 상황이라도 증거가 없으면 배우자가 불륜이 아니라는 것은 납득하는 반면, 의처·의부증일 경우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도 배우자의 불륜을 의심하는 망상이 집요하다.
결과적으로 남편과 밤늦게 통화하던 사람이 직장상사라는 사실을 알고 근거 없는 의심을 거둔 박 씨의 경우가 단순 질투라면, 아내와 통화하는 사람이 친오빠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외도라고 몰아세우는 최 씨의 경우는 의처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어째서 의처·의부증을 가진 질투의 화신으로 변하는 것일까. 의처·의부증은 실제 배우자의 외도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 때문에 진행되는 경우와 정서적 불안증과 망상장애 때문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남편에게 끊임없이 불륜녀가 있었다든지, 성매매 업소에 다니는 일이 잦았다면 아내는 트라우마로 인한 의부증 증세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의심하는 아내에게 남편이 무작정 “너 의부증 있냐?”, “마음 안주고 몸만 줬는데 무슨 불륜이냐?”고 반박하면 아내의 증상은 더욱 심각해진다.
의처증 남편은 아내를 폭행하는 등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MBN <실제상황>의 한 장면.
성의학연구소 강동우 소장(성의학 전문가)은 “배우자 외도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의처·의부증이 진행되는 경우는 의처·의부증을 지닌 당사자를 포함해 불륜 경계선상을 왔다갔다하는 배우자를 함께 치료하기도 한다”며 “이 경우는 망상장애에서 비롯한 의처·의부증이라기보다 서로의 신뢰가 무너진 것이기 때문에 부부간의 불신을 치료한다”고 설명했다.
배우자의 외도와 상관없이 정서적 불안이나 망상장애로 의처·의부증이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정서감정이 취약하거나 자존감이 낮고, 편집증적인 성격인 사람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우울증이나 알코올 의존증, 각성제 계열의 마약 중독 등으로 의처·의부증이 진행되기도 한다.
강동우 소장은 “망상장애가 동반되는 의처증과 의부증은 부모와 자식 간 관계인 원 가족관계에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외도를 했다거나 부모가 심각한 갈등이 있는 집의 아이에게 가정은 비극적이고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배우자를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원 가족에서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와 달리 정서적으로 성격장애가 있어 의처·의부증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자존감이 낮거나 배우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는 경우”라며 “섹스리스가 있거나 성 트러블이 있을 때 ‘아내가 만족하지 못하니까 바람피우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결혼 과정에서 배우자의 이성관계가 복잡했다거나 상대방이 헤어지자고 통보한 경험이 만든 두려움이 의처·의부증을 만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단순 의심과 질투를 넘어선 의처·의부증이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하지만 의처·의부증 배우자를 치료권으로 들어오게 하기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의처·의부증을 질병이 아닌 일시적 감정문제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외부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의처·의부증을 조기에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원인이 된다.
이혼이라는 파국까지 간다면 배우자의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 인해 받은 피해와 고통을 판단할 수 있는 증거를 준비해 두어야 한다. 법무법인 선 박병채 변호사는 “의처증이나 의부증도 이혼사유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배우자의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 인한 신체적·정신적 피해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며 “폭력과 같은 신체적 피해로 이어지지 않아도 근거 없이 의심을 하며 괴롭혔다면 정신적 피해로 인한 위자료 청구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현명한 대처 방법은? “별일 아냐” “너 이상해” 무시·비아냥은 금물 배우자의 의처·의부증으로 고통 받는 부부들이 늘어나고 있다. 통계적으로 35~55세 사이에서 의처·의부증이 많이 나타났다면 최근에는 20대 부부 사이에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는 성의식 변화나 여성의 사회진출, 미디어의 영향 등과 관계가 깊다. 하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배우자가 가상의 연적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자신을 괴롭힌다면 어떻게 대처해야할까. 우선은 배우자의 의처·의부증을 악화시키는 말과 행동은 자제해야 한다. 왜 늦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묻는 배우자에게 무뚝뚝하게 대답하거나 무시하는 듯한 행동은 해서는 안 된다. “별일 아니야”, “당신이 너무 예민한거야”라며 상황만 모면하려는 태도도 배우자의 의심을 키우는 행동이다. 의처·의부증 증세가 있는 배우자에게 “너 이상해”, “너 의부증이냐” 비아냥거리는 것은 금물이다. 의심을 받는 배우자만큼 의심을 하는 배우자 본인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에 공감해줘야 한다. 자신을 의심하는 배우자를 폭행하거나 무조건 배우자의 문제로 치부하는 등 상대방의 자존감을 낮추는 행동도 좋지 않다. 의처·의부증은 본인의 자존감 결여와 깊은 관계가 있다. 결국에는 신뢰를 쌓고 서로 존중해 주는 것이 의처·의부증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의처·의부증은 부부가 함께 힘을 합쳐 치료해야 한다. 의처·의부증 환자 치료도 중요하지만 의심을 받은 배우자의 치료도 중요하다. 배우자 역시 의처·의부증을 가진 상대방으로 인해 삶의 영역이 고립되고 불안장애를 얻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가정문제상담소 김미영 소장은 “배우자의 외도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망상에 시달리면 정상적인 결혼생활은 불가능해진다. 결혼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면 배우자에게 문제를 꺼내 확인하고, 각자에게 맞는 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당부했다. 상대방에게 적절히 질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질투는 유치한 것이 아니다. 질투가 안으로만 향하면 망상이 될 수도 있다. 적절한 질투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