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향한 과정 아직 도취할 순 없어요”
탁구 스타 안재형의 아들 안병훈이 5월 24일(현지 시간) 유럽프로골프투어 메이저 대회인 BMW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연합뉴스
그렇게 장밋빛 미래를 예약했다고 생각했지만 2011년 프로 데뷔 후 3년간 유러피언투어의 2부 격인 챌린지투어를 전전했다. 아마추어 무대에서 보인 천재성이 프로가 된 이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최경주, 양용은, 노승열에 가려 ‘무명선수’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 이름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힐 무렵인 지난 5월 25일. 잉글랜드 서리주 버지니아 워터의 웬트워스클럽 웨스트코스(파72·7302야드)에서 열린 유러피언투어 메이저급 BMW PGA 챔피언십대회에서 그는 쟁쟁한 톱랭커들을 모두 제치고 생애 첫 우승을 신고했다. ‘골프천재’에서 ‘무명선수’로, 그러다 다시 ‘깜짝스타’로 인생역전을 이룬 안병훈의 얘기다. 그가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데에는 꼬박 6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난해 7월, 제143회 브리티시오픈에서 공동 26위(최종합계 4언더파 284타)를 차지한 안병훈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를 했다. <뉴욕타임스>가 안병훈에게 관심을 기울인 배경에는 그가 전 국가대표 탁구선수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 안재형-자오즈민의 아들이란 사실 때문이었다.
<뉴욕타임스> 기자는 안병훈에게 ‘왜 아버지 어머니처럼 탁구선수가 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에 대해 그는 “(탁구에) 소질이 없다. 난 느렸고, 살까지 쪘다”며 “아버지(안재형)도 ‘탁구는 너무 힘드니 선수 생명이 긴 골프를 하라고 권했다”라고 설명했다.
안병훈은 당시 브리티시오픈에서 한국 국적 선수 중 유일하게 컷을 통과해 본선에 올랐고, 3라운드 첫 6개 홀에선 4개의 버디를 잡으며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그런데 그걸 깨닫는 순간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
안병훈은 그 느낌을 ‘자전거 타기’로 비유했다. 자전거를 배울 때 다른 생각을 하면 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예상보다 높은 순위를 확인하고, 자신의 이름 앞뒤로 TV에서만 보던 선수들 이름이 올라와 있는 걸 보는 순간 골프에 집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그때 이후부터 나는 매 홀이 끝날 때마다 순위판을 보고 있었다.”
<뉴욕타임스>에 털어 놓은 안병훈의 고백이었다. 그리고 지난 5월 25일. 2011년 프로 데뷔 후 첫 우승을 메이저대회에서 최소타 기록으로 멋지게 장식한 안병훈은 기자회견에서 소감을 말하던 중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아 마치 달 위를 걷는 기분”이라는 말과 함께 “내 인생을 바꿀 만한 큰 의미가 있는 우승”이라고 표현했다. ‘자전거’가 아닌 ‘달’ 위를 걷는 기분을 만끽한 안병훈이 전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리는 순간이었다.
키 186㎝, 몸무게 90㎏인 안병훈의 장기는 300야드 대의 드라이브 샷이다. 올해 평균 드라이브 샷 비거리가 304.9야드로 전체 206명 중 13위에 올라 있다. 장타자이자 세계 랭킹 1위인 로리 매킬로이(302.3야드)보다 멀리 칠 만큼 확실한 장타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290야드부터 350야드까지 드라이브 샷 비거리를 조절해 세컨 샷을 자신이 좋아하는 거리에서 칠 수 있다.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스윙은 어드레스부터 백스윙, 임팩트 구간을 지나 피니시까지 ‘심플’ 그 자체.
뼈를 깎는 고통을 수반했다고 말할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통해 완성된 샷 컨트롤 능력도 일품이다. 2005년 미국 플로리다로 건너가 골프 본고장에서 레슨을 받은 안병훈은 스윙은 물론 기술적인 부분도 세계 정상급 골퍼들과 닮았다. 경기 운영 능력 또한 강약 조절이 가능하다. 전문가들은 “유럽골프 챌린지투어에서 쌓은 경험이 지금에서야 빛을 발하고 있다”라고 입을 모은다. 중요한 것은 지금보다 앞으로의 행보에 더 큰 기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안병훈은 이번 우승으로 세계랭킹이 54위까지 껑충 뛰어 올랐다. PGA에서 활약 중인 한국 선수들 중 최고 기록이다. 올 가을 한국에서 열리는 프레지던츠컵 인터내셔널팀 대표로 자력 출전이 가능한 등수에 도달하며 한국의 새로운 에이스로 주목을 받게 됐다. 안병훈 또한 한국에서 개최되는 메이저대회에 출전하길 간절히 소망한다. 더욱이 2016년 브라질 리우올림픽에 한국 대표로 참가할 수 있는 기회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기 위해선 랭킹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 안병훈 또한 인터뷰를 통해 “톱10 안에 드는 것을 올 시즌 목표로 하겠다”고 거듭 강조한 바 있다.
안병훈 옆에는 올해부터 호흡을 맞추고 있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캐디 딘 스미스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지난해까지 아버지 안재형 코치가 캐디백을 멨다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캐디 대디’와의 이별을 택했다. 딘 스미스는 프로 경험이 많지 않은 안병훈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다. 버디를 하거나 보기를 해도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다. 선수가 감정 기복 없이 플레이하도록 최고의 조력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안병훈도 “캐디 바꾸길 정말 잘한 것 같다”며 만족감을 나타냈고, 결국 프로에서 생애 첫 우승을 일궜다.
이에 대해 아버지 안재형 코치도 올 시즌 아들과 잠시 헤어진 데 대해 ‘잘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태릉선수촌에서 탁구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안 코치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처음에는 아들과 떨어지는 게 걱정됐고, 서운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아들 곁을 떠난 게 최고의 결정이었다”라고 털어놨다.
안 코치는 2007년 초, 대한항공탁구단을 맡고 있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골프유학 중이던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안병훈은 2005년 미국 플로리다 브래던튼의 데이비드 레드베터 골프 아카데미에서 골프 수업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다보니 외로움과 슬럼프를 이기지 못하고 급기야 건강이 악화되는 위기를 맞이했다.
안 코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당장이라도 모든 일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는 게 맞지만, 탁구 지도를 포기하고 아들을 위해 사는 게 쉽지 않았다. 그는 결국 중국에서 휴대폰 부가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는 아내 자오즈민과 수차례 대화 끝에 한국 생활을 접고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마지막까지 고민하면서 결정 내리는데 도움을 준 부분은 ‘시기’였다. 병훈이한테는 그때 아버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탁구 지도는 시간이 지나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필요한 시기에 내가 함께 하지 못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만 같았다. 오래 고민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고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플로리다에 가선 안재형이 아닌 안병훈 아버지이자 캐디로 살았다.”
안병훈이 2009 US 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캐디 역할을 한 아버지 안재형(우)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AP/연합뉴스
안병훈은 2010년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명문 대학인 UC버클리에 골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원래는 LA지역 명문인 USC를 원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재미있는 일은 2009년 UC버클리로의 스카우트가 확정된 상태에서 2009년 8월 안병훈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US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 타이거 우즈의 18세 7개월을 뛰어 넘는 역대 최연소 챔피언 신기록을 세웠다는 것. 안병훈을 거절했던 USC로선 땅을 치고 후회할 노릇이었다.
안병훈은 2011년 예정보다 일찍 프로로 전향했다. 그러나 PGA 1·2부 투어는 물론, 유럽투어 시드를 얻는 데도 실패하며 수년간 유럽 2부 투어를 전전해야 했다. 당시 아들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곁들인다.
“너무 일찍 빛을 본 터라 프로 데뷔 후 경험한 아픔들이 병훈이에게 좋은 자극을 제공했다. 스스로 골프를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노력을 통해 결과를 얻어 내려는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숱한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물론 그걸 지켜보는 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어차피 길게 보고 가야 하는 골프 인생이라 병훈이에게 부담을 덜고 골프를 즐기라고 조언했다. 물론 병훈이는 그 얘기를 조언보다는 잔소리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들이 2부 투어에서 활약하는 동안 아버지는 캐디백을 메고 아들을 따라다녔다. 때로는 다정다감한 부자지간이 경기 결과에 따라 극한 대립을 벌이는 선수와 캐디로 모습을 달리했다. 선수는 연습만 하면 됐지만, 뒷바라지로 나선 아버지는 자동차 운전, 식사 준비, 비행기·숙소 예약, 코스 확인 등 1인 다역을 하며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3년을 보내다 어느 순간 내가 아들 옆에 존재하지 않는 게 아들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아들의 홀로서기에 대해 그림을 그려봤는데, 내가 없어야 더 잘할 것 같더라. 내가 전문 캐디가 아니고, 가족이다 보니 필드에서 감정을 노출할 때가 있다. 그로 인해 아들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래서 아들 곁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해 유럽 2부 투어에서 안병훈이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안 코치는 무거웠던 캐디백을 내려놓고 본업인 탁구 지도자로 돌아와 대표팀에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아버지가 아닌 전문 캐디와 호흡을 맞춘 안병훈은 1부 투어 첫 우승으로 멋지게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안 코치는 이번에 우승했다고 해서 아들의 골프 인생이 탄탄대로를 걸을 거란 기대는 아예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2009년 US아마추어 골프 챔피언십 우승 이후 밑바닥 인생을 경험했던 것처럼 유러피언골프투어 우승이 아들에게 순기능 역할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병훈이의 목표는 PGA 투어다. 거기서 우승하고 랭킹 1위에 오르는 게 꿈이다. 지금은 그 길을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그래서 병훈이, 나, 아내는 지금의 우승에 도취하지 않는다.”
부정(父情)이 듬뿍 담긴 아버지의 바람이자 기대였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
80년대 탁구 스타 안재형-자오즈민 부부는? 국경도 냉전도 뛰어넘은 사랑 안병훈의 부모인 ‘탁구스타’ 안재형-자오즈민은 국경을 초월한 사랑으로 유명한 커플이다. 1984년 파키스탄 아시안선수권대회 때 처음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시작한 부부는 수백 통의 서신 교환과 각종 국제대회를 통해 만나며 사랑을 키워왔다. 2009년 US아마추어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안병훈이 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자 어머니 자오즈민이 반기는 모습. 연합뉴스 그러나 1987년 자오즈민은 안재형과의 결별을 발표했다. “우리의 관계는 화제 찾기에 급급한 매스컴들의 얄미운 장난으로 인해 끝나버렸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양국 매스컴의 엄청난 관심에 따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 이별을 선택한 것.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이 적성국가였던 터라 그들의 사랑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 동서화해를 내세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다시 긍정적인 여론이 형성됐고, 대회 중 재회한 두 사람은 결혼을 결심, 1989년 스웨덴으로 건너가 1차 결혼식을 올렸고, 이후 한국에서 4000여 하객들이 보는 가운데 전통 혼례식을 치렀다. 냉전마저 뛰어넘은 드라마틱한 결혼 스토리를 갖고 있는 부부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외동아들 안병훈에게 골프보다는 축구, 야구를 시켜보려 했단다. 그러나 안병훈이 선택한 종목은 골프였다. 안재형 코치는 아들이 부모의 어떤 점을 닮은 것 같으냐는 질문에 “다른 건 몰라도 강한 승부욕은 타고 난 것 같다”면서 “골프도 손 감각이 아주 중요한데, 탁구의 손 감각을 아들이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답했다. 안 코치는 아들의 리우올림픽 출전과 관련해선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자 가문의 영광일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