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판 일베 등장…3차 대전 불붙는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의 저자 레베카 솔닛은 여성비하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서기 꺼려하던 여성들이 최근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일간베스트(일베)를 중심으로 사회 전반으로 번져가는 여성비하에 ‘응전’을 선언하며 맞불을 놓은 것.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온라인은 포털, 커뮤니티 할 것 없이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다. 욕설과 성희롱이 난무한다. 원초적이고 유치하지만 장난이라고 두고 보기엔 심상찮다. 최근 치열해지고 있는 온라인상 남녀전쟁 속으로 들어가 봤다.
“니들이 몇 년간 하던 거 며칠 당했다고 발작한다.”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디시)’의 메르스 갤러리에 올라온 글이다. 디시의 메르스 갤러리는 요즘 온라인에서 가장 뜨거운 공간이다.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나누라고 열린 게시판이지만 올라오는 많은 글들은 메르스와 관계가 없다. 남성에 대한 비하로 ‘도배’돼 있다. 누가 시작했는지, 어떤 이유로 시작됐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베에서 “메르스가 퍼진 것도 여자 탓이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화가 난 여성들이 반격을 시작했다는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지만, 이마저도 확실한 근거는 아니다.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 남성비하 글 캡처.
메르스 갤러리가 생긴 건 지난 5월 30일이다. 여성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공간이었지만 이곳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분위기는 바뀌었다. 일베 회원으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이 몰려와 ‘전쟁터’로 바뀌어 버렸다. 서로 김치남, 김치녀라며 헐뜯고, 여성 혹은 남성이 우월한 이유에 대해 댓글을 달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시각, 일베에는 “메르스 갤러리에 쳐들어가자”는 등의 동조를 요구하는 글이 지속적으로 달렸다. 페미니즘단체 ‘페페페’의 한 관계자는 “여성비하가 이뤄질 땐 가만히 있던 운영진이 불과 며칠 사이에 메르스 갤러리에는 욕설 금지 경고글을 올렸다. 내가 하면 농담이고, 남이 하면 범죄라는 건 웃기는 얘기다”라고 일갈했다.
온라인상 남녀전쟁은 일상적인 일이 됐다. 지난 5월 초에는 인터넷 카페 ‘여성시대(여시)’와 남성 이용자가 다수인 타 커뮤니티와 일대 전쟁이 벌어졌다. 여시의 여성비하를 반대하는 집단행동을 ‘오늘의유머(오유)’, ‘SLR클럽(스르륵)’, 일베 등에서 문제 삼았고, 커뮤니티 간 대규모 망명사태까지 빚어졌다.
‘1차 대전’은 개그맨 장동민의 여성비하 발언 사건이다. 여시를 제외한 커뮤니티가 ‘여시가 과거 장동민의 팟캐스트 방송을 문제 삼아 잘나가던 때에 발목 잡았다’고 비판했다. 장동민이 과거 팟캐스트 방송을 하며 ‘개XX’, ‘처녀가 아니면 참을 수 없다’는 등의 발언을 끄집어내 문제 삼은 게 여시 회원들이라는 주장이었다. 애초 장동민 발언에 대한 문제의식은 간데없고 ‘무슨 의도로 하필 장동민이 무한도전에 출연하려는 시기에 문제 삼았느냐’는 식의 비판이 이어졌다.
2차 대전은 ‘레바웹툰’ 사태로, 여시 회원들이 인기 웹툰의 일부 장면이 성범죄를 조장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면서 불거졌다. 여시 회원들이 웹툰 작가에게 이메일, 트위터를 통해 지속적으로 모욕하며 괴롭혔고, 남성 네티즌들은 “별 것 아닌 것에 지나치게 반응한다”며 웹툰 작가를 옹호하며 공방을 벌였다.
여성비하가 위험수위에 치닫고 있는 페이스북 ‘김치녀’ 페이지들 캡처. 일반인의 신상을 털어 무분별하게 올리기도 했다.
과거 공개적인 여성비하는 디시인사이드, 일베 등 몇몇 남성 위주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유물이었지만, 최근에는 이에 동조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페이스북의 ‘김치녀’ 페이지는 그 위험수위의 정점을 찍고 있다. 일반인의 SNS(사회적관계망서비스)까지 ‘털어’ 신상을 공개한다. 이 페이지의 팔로어(구독자)는 11만 명에 달한다.
이곳에 올라온 게시물은 마녀사냥을 방불케 한다. “돈 안 쓰는 남자는 맘이 없는 남자다”는 말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한 여성의 사진이 눈만 가린 채 캡처돼 올라와있다. 밑에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이 난무하는 댓글이 수백 개 달린다. TV에 출연한 일반인의 얼굴을 무분별하게 올리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치녀’ 페이지 관리자는 “이 시대의 여성들은 존중하며 우리들의 어머니도 존중한다. 하지만 우리 어머니들과 요즘 여성이 얼마나 다르냐”며 “여성우월주의 사상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남성 또는 여성을 비하하기 위한 특정한 단어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도 온라인 남녀전쟁의 특징이다. 남성은 ‘아몰랑’이라는 단어를 유행어로 만들며 ‘여성은 지식이 없고 감정적이다’고 암시한다. 이에 대해 여성 네티즌은 남자는 ‘아됬어(됐어)’라는 말을 만들어내 대응하며 남성들을 ‘논리는 부족하고 맞춤법도 잘 모르는 무식한 집단’으로 단정 지었다. 또 개념 없는 한국 남성 혹은 여성을 뜻하는 말로 ‘김치남’, ‘김치녀’라는 단어를 써가며 서로를 비하한다.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의견을 온라인에서 피력하면 한 순간 공격의 대상이 된다. 섹스칼럼니스트 곽정은 씨는 지난 5월 21일 ‘예쁜 공주님’ 발언 때문에 남성 네티즌들의 도마에 올랐다. 곽 씨는 “택시 기사님이 ‘주말인데 좋은 데 놀러가냐’고 물었다. 일하러 간다고 답했더니 ‘아니 이렇게 예쁜 공주님들도 일을 하러 가느냐’고 다시 묻는다. 아무래도 중간에 내려 지하철을 타야겠다”고 글을 올렸다. 이에 대해 일부 네티즌이 “칭찬해도 지X이다”, “진짜 노답이다”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다수의 여성 네티즌은 “‘공주님’이라는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성역할을 나누는 폭력이 될 수 있다”고 옹호하며 맞서기도 했다.
온라인상 남녀전쟁은 특정 주제에서 더욱 크게 벌어진다. ‘김여사’라는 단어에 대해 여성들이 반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관련 뉴스마다 댓글은 남녀 간의 전쟁터로 변한다. 지난 1일 끼어들기 한 여성운전자를 집까지 따라가 보복 운전한 택시기사의 사건이 뉴스로 올라왔다. 이 기사에도 한 건에 500건이 넘는 댓글이 달리며 “도로 위에서 짜증나게 운전하는 사람은 백퍼센트 여자다”, “택시와 김여사가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등의 댓글이 달렸고, 이에 여성으로 추정되는 네티즌들이 “험악하게 운전하는 게 자랑이냐”, “여자보다 남자가 사고 더 많이 낸다”는 등의 답을 달며 싸움을 벌였다.
왼쪽부터 남녀 2차 대전의 원인이 된 레바웹툰, 성역할 관련 논쟁의 불씨가 된 섹스칼럼니스트 곽정은의 트위터 글, 매회 여성 비난 댓글이 달리는 네이버 웹툰 <뷰티풀 군바리>.
군대 관련 콘텐츠 역시 싸움을 벌이는 이들에겐 최상의 ‘먹잇감’이다. 네이버 웹툰 <뷰티풀 군바리>에서는 매 회 댓글로 몸살을 앓는다. <뷰티풀 군바리>는 여성이 남성과 동일하게 군대에 가는 상황을 주제로 그려진 만화다. 매회 군 가산점제 논란부터, 여성부에 대한 비판, “여자도 군대 가봐야 한다”는 등의 남성들의 한 서린 댓글들이 이어진다. 지난 5월 예비군 총기사고 사건 때도 기사마다 댓글이 뜨거웠다. 사건의 본질과 전혀 관계없이 “여자도 예비군 훈련 때 나와서 밥이라도 해라”, “남자 군대 2년에 예비군 8년 할 동안 여자는 뭐했느냐”는 등의 댓글이 수백 개씩 달리고, 댓글마다 수십 건의 공감을 얻었다.
남녀대결 구도에 대해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여성성의 가치가 주목받는 시대에서, 사고의 틀을 전환하지 못한 일부 남성들의 반발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험한 발언을 해서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세해 논란이 확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며 “과거 일방적인 여성비하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 자체는 긍정적 신호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윤심 기자 heart@ilyo.co.kr
여성비하 유명인은 황교안 “부산 여성들 드세서 구타사건…” 말이야 막걸리야 거침없는 여성비하는 얼굴을 가리고 활동하는 온라인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유명인들의 여성비하 발언이 문제되기도 했다. 개그맨 장동민의 팟캐스트 여성비하발언 사건이 불거진 후 가수 유희열 등이 경솔한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누구보다 더 바른 성 인식을 가져야 할 공인들도 경솔한 발언 때문에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총리 후보자에 오른 황교안 법무부 장관은 과거 “부산 여자들이 드세서 부인 구타 사건이 많이 일어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부산지역 여성단체들이 들고 일어서며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박용성 전 중앙대학교 이사장은 2015학년도 대입 전형과정에서 “분 바르는 여학생들 잔뜩 입학하면 뭐하느냐. 졸업 뒤 학교에 기부금도 내고 재단에 도움이 될 남학생을 뽑으라”고 합격자 성비 조정을 지시해 논란이 일었다. 이에 중앙대 학생들과 여성단체 회원들은 중앙대 앞에서 ‘분노의 분칠’ 퍼포먼스를 벌여 박 전 이사장의 발언을 규탄했다. [서] |
고소·고발에 살인사건 비화 이대 마녀사냥 단골 타깃 이대 정문에서 한 남성의 여성비하 시위. 지난 5월에는 페이스북 페이지 ‘김치녀’를 수사해달라는 진정서를 내기도 했다. 김치녀 페이지에 “이화여대가 ‘꼴페미(꼴통+페미니스트)’로 낙인찍히고 남성들의 공공의 적이 된 이유”라는 글과 사진 몇 장이 함께 게시됐다. 사진은 반군대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이 글에 욕설이 담긴 악의적 댓글이 수백 개 달렸다. 경찰은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아 모욕죄로 처벌이 어렵다”며 진정서를 돌려보냈다. 지난 2013년에는 디시인사이드에서 활동하던 백 아무개 씨(30)가 김 아무개 씨(여·30)를 찾아가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일어났다. 디시 ‘정사갤(정치사회갤러리)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쌍방이 성희롱과 인격모독을 일삼으면서 촉발됐다. 김 씨는 커뮤니티에 백 씨와 다른 이용자들에 대한 고소장을 찍어 올렸고, 고소장에서 주소를 확인한 백 씨는 김 씨를 찾아가 무참히 살해했다. [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