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까만 거짓말’ 들통나도 “나는 흑인입니다”
오랜 기간 흑인 행세를 해오다가 백인으로 밝혀져 도마 위에 오른 레이첼 돌레잘 NAACP 지부장이 지난 15일 결국 사퇴했다. 작은 사진은 돌레잘 부모가 공개한 과거 사진과 출생증명서.
지난 8년 여 동안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던 돌레잘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은 지난 12일이었다. 돌레잘의 부모가 방송을 통해 딸의 진짜 정체를 폭로하고 나섰던 것이다. 몬태나주 트로이에서 CNN과 인터뷰를 실시했던 래리와 루태너 돌레잘 부부는 “내 딸은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다”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그러면서 “내 딸은 혼혈도 아니요, 또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아니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양가 조상들 가운데 흑인 혈통은 없으며, 체코, 스웨덴, 독일 혈통만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부부는 자신들이 돌레잘의 생물학적 친부모라는 증거로 돌레잘의 출생증명서와 함께 어릴 적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속의 돌레잘은 푸른 눈의 금발 소녀였으며, 어딜 보나 백인이 분명했다.
돌레잘 부부는 또한 딸이 흑인 행세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2007년 신문 기사를 통해서였다고 말했다. 이미 그 때는 딸과 연락이 끊긴 상태였기 때문에 본인들은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고 했다. 그러면서 돌레잘 부부는 “딸은 우리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체를 폭로할까봐 그랬을 것이다”라며 착잡한 심경을 토로했다.
왜 이제야 딸이 백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하느냐는 질문에는 “최근 기자 한 분이 찾아와서 딸에 대해 물었다. 그래서 사실대로 말했다”라고 답했다. 돌레잘의 어머니는 “딸은 현실을,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딸아, 우리는 너를 사랑한다. 네가 진실을 알고, 믿고, 그리고 말할 수 있도록 주변의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호소했다.
이 소식에 온 미국 사회가 들썩였던 것은 물론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흑인인권단체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왔던 흑인 간부가 사실은 백인이라니 이보다 더 큰 배신감도 없었을 것.
이번 사건이 특히 이례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흑인이 백인 행세를 하는 경우는 더러 있었지만 반대로 백인이 흑인 행세를 하는 경우는 손에 꼽힐 정도로 극히 드물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 펜실베이니아대 사회학과 교수인 카밀 주브린스키 찰스는 “우세 집단의 일원이 비우세 집단의 일원 흉내를 내는 건 아주 드문 경우다. 왜냐, 그렇게 해봤자 얻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 흑인 음악을 하는 에미넴도 자신이 흑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돌레잘의 경우에는 조금 다른 면이 있었다. 흑인인권운동계에서는 오히려 백인이 배척당하고 흑인인 것이 훨씬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 돌레잘은 흑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NAACP의 지부장직을 꿰찼는가 하면, 아이다호와 이스턴워싱턴에서도 다년간 인권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인정을 받았다. 또한 현재 이스턴워싱턴대학 시간 강사로서 강단에 오르고 있으며, 스포캔시 경찰 옴부즈맨 위원장직도 맡고 있다.
이번 폭로로 인해 생물학적으로 100% 백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현재 돌레잘은 NAACP 지부장직을 내놓고 물러난 상태.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흑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돌레잘은 NBC 방송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흑인입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내가 흑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또한 그녀는 “나는 확실히 백인은 아니다”라면서 “다섯 살 때부터 그림을 그릴 때면 늘 살구색이 아닌 갈색 크레용으로 얼굴을 색칠했다. 나는 내 자신이 흑인이라고 생각해왔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이번 문제에 대해서 “이것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인종, 민족, 문화, 자기 결정, 정체성,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율권의 문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자신이 흑인이라고 믿었던 돌레잘이 지금까지 해온 흑인 행세를 보면 실로 어이가 없다. 경찰 옴부즈맨 위원회에 제출한 이력서에 ‘백인’ ‘흑인’ ‘아메리칸 인디언’ 항목에 모두 체크한 것은 그나마 애교에 속할 정도였다.
돌레잘은 지금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백인 어머니와 백인 양아버지 밑에서 자랐지만 사실 내 진짜 아버지는 흑인이다”라고 떠벌려왔다. 그러면서 엉뚱한 흑인 남성을 가리켜 버젓이 아버지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돌레잘이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라고 소개한 남성은 앨버트 월커슨이라는 흑인 남성이었다. 돌레잘은 인터뷰를 통해 흑인 아버지의 무용담을 늘어놓곤 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샌디에이고 경찰관이었던 내 아버지는 백인 동료 경찰관의 추적을 피해 야간열차를 타고 남부를 떠나 북부로 도망을 쳐야 했다. 인종 차별이 심했던 남부에서 백인 경찰관과 폭행 시비가 붙었기 때문이었다”, “내 아버지는 해병대에서 24년간 복무했으며, 당시 세 차례에 걸쳐 부하 백인 병사들에게 목숨을 잃을 뻔했다.”
돌레잘은 NBC 방송 <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당신은 흑인입니까?”라는 질문에 “나는 내가 흑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최근 정체가 들통 난 후 왜 월커슨을 아버지라고 속였냐는 질문에 돌레잘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당당하게 말했다. 노스아이다호의 행사장에서 월커슨을 처음 만난 즉시 가족과 같은 유대감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인종에 관한 질문에는 “그 질문은 간단하지가 않다. 아주 복잡한 질문이다. 사람들이 잘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들이다”라는 애매모호한 말을 했다. 이밖에 흑인이었던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외에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장남도 사실은 돌레잘 부부가 입양해서 키우던 흑인 자녀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요컨대 동생을 아들이라고 속여온 것이다.
인종을 속였다는 점보다 이를 더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돌레잘의 가족들은 “머리 스타일을 흑인처럼 바꾸는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동생을 아들이라고 우기는 건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라며 비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 부모와 연락을 끊었던 돌레잘은 흑인 동생들에게는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생 자흐(21)는 <워싱턴포스트>를 통해 “스포캔에 있는 누나를 방문했을 때 누나가 ‘부모님이 내 친부모라고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동생인 이즈라(22)는 “2012년 스포캔에 있는 누나를 방문했을 때 그만 깜짝 놀랐다. 누나는 완전히 흑인으로 변해 있었다”라고 말했다. 당시 인권운동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고 있었던 누나는 자신을 찾아온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들어, 나는 이제부터 흑인으로 살 거야. 나한테는 흑인 아버지도 있어. 그러니까 내 정체를 알리지 마.”
이런 누나의 흑인 행세에 대해 몹시 분개하고 있는 이즈라는 “백인이 얼굴을 새카맣게 칠해 흑인으로 분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지금이 1900년대였다면 누나의 이런 행동은 다분히 인종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종주의를 더 부추기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이즈라가 더욱 분노하고 있는 이유는 누나가 단순히 흑인 행세를 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백인들에게 억압당하고 고통 받은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출세에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가령 어릴 적 백인 부모들이 노예들에게 사용했던 채찍으로 흑인 자녀들을 때렸다거나 인권운동가 활동을 하기 시작하면서 백인들로부터 온갖 협박을 당했다는 거짓말들이 그것이었다. 출세하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사실에 격분하고 있는 이즈라는 “누나는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 했지만 너무 멀리 왔다”고 말했다.
실제 돌레잘은 지금까지 SNS나 방송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흑인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떠들어왔다. 2010년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는 “공화당의 극보수 단체인 티파티가 주최하는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나 같은 흑인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라면서 “흑인들과 함께 무리로 가지 않는 한 무섭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12월에는 지역 신문에 ‘미국에 사는 흑인으로서 경험하게 되는 질식 상태’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하는 등 백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과격한 스탠스를 취하기도 했다. 백인을 맹렬히 비난하던 여성이 사실은 백인이었다니 놀랄 일.
이런 그녀의 주장의 망상인지, 아니면 뻔뻔함인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백인인 그녀는 왜 굳이 흑인이 되려고 했을까.
이에 대해 흑인 자녀 넷을 입양해서 키웠던 돌레잘 부부는 아마 어릴 적부터 흑인 형제자매들 틈에서 자란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흑인들 틈에 있다 보니 오히려 자신도 흑인이 되길 희망했으며, 심지어 백인을 증오하고, 더 나아가 자신이 백인이란 사실을 싫어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흑인 명문대학인 하워드대학에 진학하게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을 것이라고 돌레잘 부부는 추측했다. 유명 흑인 지도자를 다수 배출한 하워드대는 학생들의 대다수가 흑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백인 학생들이 역차별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역차별 때문에 돌레잘이 점점 더 흑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을 것이라고 가족들은 추측하고 있다. 특히 아프리카 미술을 전공했던 돌레잘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랬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 하워드대에 입학한 후부터 점점 흑인처럼 굴기 시작했던 딸이 언제부턴가 전화 통화를 할 때면 흑인들의 말투를 흉내 내곤 했다고 말하는 돌레잘 부부는 “아마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딸이 흑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흑인 동생인 이즈라도 “누나가 흑인 행세를 하기 시작한 건 최근 들어서였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흑인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한번도 자신을 흑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돌레잘은 평소 아프리카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 말하거나 대학 강단에서 아프리카 문화나 역사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단 한번도 아프리카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스캔들을 바라보는 미국에서는 과연 돌레잘을 흑인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한 쪽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하는 것처럼 이 역시 인정을 해줘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를테면 인종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한 쪽에서는 동성애자와 비교하는 건 잘못됐다고 말한다. 흑인 분장을 하는 건 인종적으로 상당히 모욕적일 뿐만 아니라 인종 문제와 관련된 미국의 불행한 역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옳지 않다는 입장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비밀 폭로 진짜 이유 괘씸한 딸 응징 차원? 최근 <뉴욕데일리뉴스>는 돌레잘 부부가 딸의 비밀을 뒤늦게 폭로한 이유가 사실은 다른 데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10년 가까이 지켜왔던 비밀을 굳이 이제 와서 밝히는 데에는 다른 속내가 있다는 것이다. 돌레잘의 부모와 미성년 성추행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친오빠 조슈아 돌레잘(원 안). 다름이 아니라 성폭행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 아들 조슈아 돌레잘(39)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2013년 콜로라도에서 미성년을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조슈아는 곧 열리게 될 공판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상태다. 바로 여동생인 돌레잘이 평소 부모에 대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해온 데다 성추행 당한 피해 여성의 편을 들고 나섰기 때문이다. 실제 돌레잘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어릴 적 백인 부모들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주장해왔으며, “나와 동생은 ‘피부색’ 때문에 채찍으로 맞곤 했다. 그 채찍은 노예 시절 사용했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었다”라고 말한 바 있다. 돌레잘은 자신의 부모가 폭력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는 자신의 주장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고 더 나아가서 콜로라도 법정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비밀을 폭로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돌레잘의 부모는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있는 상태. 혹시 딸이 괘씸해서 폭로했냐는 언론의 질문에는 “그건 가족 문제며, 이번 폭로와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답을 회피했다.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