콧대 높던 간판선수 ‘순한 양’ 돌변
홍성흔은 올 시즌 초반 부진으로 2군에 갔다온 뒤 오른손 타자 최초로 2000안타 고지를 밟았다.
그렇다면 데뷔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1군에서 보낸 스타플레이어들이 2군에 간다면 어떨까. 2군의 열악한 생활을 이미 경험해본 선수들보다 상실감이 몇 배나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부상이 아닌 부진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 선수라면 다른 2군 선수들과 똑같이 생활해야 하기에 더 그렇다.
“두 부류의 선수가 있다. 2군에 가서 이를 악물고 달라진 모습으로 돌아오거나, 혹은 승부에 대한 부담이 없는 2군에서 타성에 젖거나.”
베테랑 선수 출신 A 코치의 말이다. 2군행이 ‘보약’이 되느냐, ‘독약’이 되느냐는 결국 선수의 생각과 의지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 2군행, 받아들이는 자세는 천차만별
지난 6월 2일 당시 2군에 내려간 이재학이 퓨처스리그 고양 다이노스와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투구를 하고 있다. 사진출처=고양 다이노스 트위터
이런 선수들이 2군에 내려오면 2군 코칭스태프도 피곤해진다. 2군 생활을 오래 한 B 코치는 “한 간판급 선수는 2군에 내려온 후 ‘나는 나니까 내가 알아서 하겠다. 건드리지 마라’는 식으로 코치들을 대하곤 했다. 스케줄을 줘도 무시하기 일쑤고, ‘힘없는 2군 코치들보다 내가 이 팀에 더 오래 있을 사람’이라는 암시를 하기도 했다”며 “그러다가 2군에 있는 시간이 본인의 예상보다 길어지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코치들에게 말을 걸었다. 1군 감독에게 좋은 보고를 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고 회상했다.
물론 이런 선수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특히 프로로서 선수들의 자존심과 책임감이 강해진 2000년대 이후에는 문화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 앞서의 A 코치는 “최근에는 많은 구단들이 2군 경기를 거쳐서 어느 정도 구위나 타격감이 올라왔다는 검증이 된 후에야 다시 1군에 올리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도 2군에 있다고 나태해져선 안 되고, 자신의 건재를 증명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많은 감독들이 팀 내에서 철저한 경쟁 구도를 만들고 있어서 오히려 2군에서 초조해하는 선수도 많다”고 했다.
# 베테랑의 2군행, 쓸쓸함이 앞선다
2군 코칭스태프도 뒤늦게 낯선 2군 생활을 경험하는 베테랑 선수들을 배려하는 편이다. 앞서의 B 코치는 “젊은 선수들은 ‘이러저러한 부분이 부족하니 잘 다듬고 만회해서 올라오라’는 식으로 구체적인 지시를 받고 오지만, 베테랑들은 몸과 마음을 좀 추스르고 돌아오라는 의미로 2군에 보내질 때가 많다”며 “그럴 때는 세부적인 훈련 계획에 따르게 하기보다는 고참 선수들이 자율적으로 훈련할 수 있도록 여지를 많이 준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정작 ‘배려’를 받는 베테랑들은 도리어 마음이 불편하다. C 선수는 “아무래도 나 스스로 눈치를 보게 된다. 어린 후배들을 비롯해 주변에 관심 있게 지켜보는 시선도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2군 선수들과 같은 스케줄을 소화하려고 한다”며 “오히려 운동을 열심히 따라하는 게 잡념이 없어져서 좋을 때도 많다. 함께하지 않으면 더 외로워지고, 내가 2군에 있는 후배들의 걸림돌인 것 같은 생각도 든다”고 털어 놓았다.
#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
아무리 이름값이 높은 선수라도, 부진의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 도리가 없다. 감독은 고민이 깊어지고, 2군행은 불가피한 선택이 된다. 그리고 그 시기가 다가왔음을 선수도 직감한다. 때로는 선수 스스로 지쳐서 2군행을 내심 원하기도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비보’를 전하는 방법이다.
한화 탈보트는 2군에 다녀온 뒤 팀의 에이스로 거듭났다. 사진제공=한화 이글스
D 코치는 “선수에게 그냥 통보만 하는 것과 2군에 가서 보내야 할 시간들을 직접 납득시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팀의 간판급, 게다가 베테랑 선수일 경우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라며 “요즘은 선수들과 ‘소통’을 중요시하는 감독들이 많아지면서 더 그런 절차를 거르지 않는 추세”라고 했다.
좋은 예가 있다. 두산 홍성흔은 최근 오른손 타자 최초의 2000안타 고지를 밟은 뒤 프로 첫 사령탑인 김인식 감독을 ‘은인’ 가운데 한 명으로 꼽으면서 신인 시절 처음 2군에 내려갈 때의 얘기를 꺼냈다. “그때 감독님께서 나를 직접 불러 ‘넌 분명히 다시 1군에 올라올 거니까 2군에서 준비 잘 하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 한 마디가 어린 내게는 정말 큰 힘이 됐다”며 “그냥 말없이 2군에 보내셨다면 여러모로 의기소침할 수 있었는데, 감독님께서 ‘분명히 넌 내가 기용할 테니 다시 올라와서 열심히 해보자’고 힘을 실어 주신 덕분에 지금까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지 않나 싶다”고 돌아봤다.
홍성흔은 그 후 17년이 지난 올해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시즌 초반 부진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해 결국 잠시 2군에 머물러야 했다. 앞서 언급했듯, 베테랑 선수에게 2군행은 여러모로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는 사건. 그러나 김태형 감독은 직접 홍성흔을 불러 어깨에 힘을 실어줬다. 홍성흔은 “이번에 2군에 갈 때도 감독님이 직접 면담을 하시면서 ‘금방 다시 부를 테니까 나이 먹고 2군에 간다고 좌절하지 마라. 우리 팀에서 네가 벤치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다’고 말씀해 주셨다”며 “그래서 2군에 가서도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한 것 같다. 감독님께서 터닝 포인트를 잘 잡아 주셨다”고 고마워했다.
물론 반대의 사례도 있다. 몇 년 전 E 선수에게 경기 직후 2군에 가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늘 팀의 핵심 전력이었던 선수지만, 팀 패배에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는 일이 많아지자 감독이 용단을 내렸다. 그런데 그 과정이 썩 매끄럽지 못했다. 코치 한 명이 선수에게 다가가 “너 내일부터 2군에 간다. 짐 싸라”는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E 선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E 선수는 훗날 “내가 부진해서 경기에 졌지만, 그렇게 짧고 갑작스러운 통보에 정말 실망스럽고 당황스러웠다. ‘지금까지 내가 이 팀을 위해 뭘 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팀은 기대와 기다림에 부응하지 못하는 선수에게 화가 났고, 선수는 과거의 공적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는 느낌에 분노한 것이다. 결국 E 선수는 2군에서도 훈련에 충실하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적했다.
# 어린 유망주들에게도 좋은 기회
2군에 간 스타 선수들은 또 하나의 낯선 광경을 목도하게 된다. 집 혹은 숙소에 돌아와 TV를 켜면, 얼마 전까지 자신이 뛰던 1군 경기가 생중계되고 있는 장면이다. 대부분의 선수가 “처음에는 채널을 돌려 버리지만, 이내 결과가 궁금해져서 중간 중간 경기를 찾아보게 된다”고 했다. 심경도 두 갈래로 갈린다. 팀이 지면 동료들의 어두운 표정에 마음이 안 좋은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기면 ‘내가 없어도 잘 나간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다.
삼성의 토종 에이스 장원삼은 최근 부진으로 인해 2군행 통보를 받았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F 선수는 “잠깐 몸이 안 좋아서 1군에서 빠져 있었던 것뿐인데도, 내가 없는 동안 팀이 연승을 달리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는 위기의식마저 느껴졌다”며 “이러다가 내가 돌아갔을 때 팀이 오히려 잘 못 하면 더 부담이 될 것 같더라”고 귀띔했다. G 선수 역시 “2군에 갈 때는 차분하게 내 감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내 자리에 대신 투입된 선수가 너무 잘 하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졌다”며 “2군에 있다는 사실 자체보다 2군에 있는 동안 밖에서 느끼는 위기감이 더 큰 자극제가 되는 것 같다”고 했다.
팀으로서는 또 다른 부수적 효과도 노릴 수 있다. H 감독은 “사실 2군 선수들은 평소에 스타급 선수들을 볼 시간이 없다. 늘 비슷한 수준의 선수들끼리 얘기하기 때문에 정말 야구 잘 하는 선배의 노하우를 전수 받을 기회가 없다”며 “그런 선수들에게 어쩌다 한 번씩 2군에 오는 고참 선수들은 좋은 선생님이 된다”고 했다.
갓 입단한 선수들은 대부분 선배들의 훈련 방식과 플레이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체험학습’을 한다. 때로는 코치보다 기술적으로 더 많은 부분을 전수하는 게 베테랑 선수들. 그래서 어떤 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는지가 그 선수의 미래를 좌우하기도 한다. H 감독은 “유명한 선배 선수가 와서 폼도 봐주고 경험담도 많이 들려주는 게 2군의 유망주들에게는 귀한 시간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앞서의 F 선수 역시 “사실 어린 선수들은 유명한 고참들이 2군에 가도 쉽게 ‘선배님, 선배님’ 하면서 곁에 다가오지 못한다. 힐끔힐끔 그 선배가 어떻게 훈련하는지 곁눈질로 보면서 인사만 90도로 열심히 하는 게 전부”라고 웃으며 “그럴 때는 고참들이 먼저 다가가서 이런저런 얘기도 해주고 농담도 하면 분위기가 편해진다. 모처럼 ‘젊은 피’들의 패기를 느끼고 나도 좋은 역할을 해줬다는 생각에 뿌듯해지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극약처방’ 2군행의 득실 ‘보약이냐 독약이냐’ 본인 의지에 달렸다 팀의 주축 선수가 부진해 2군에 가면 감독이 ‘극약처방’을 내렸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또 그 선수가 1군에 돌아와 다시 제 기량을 펼치면 2군행이 ‘보약’이 됐다는 비유를 종종 한다. 이렇게 감독을 ‘의사’, 2군을 ‘약’에 빗대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B 코치도 “1군 선수들은 정말 야구만 잘 하면 손 하나 까딱할 필요가 없다. 특히 팀에서 고참급이 되면 신인급들처럼 훈련이 끝난 뒤 공을 모으러 가거나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할 필요도 없다. 택배 같은 개인적인 업무도 구단이 알아서 해결해 준다”며 “2군에서 1군과 비교할 수 없이 열악한 생활을 하다 보면 1군의 소중함을 깨닫기 마련이다. 또 2군에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는 유망주들을 보면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선수가 ‘의사의 처방’대로 따르는 건 아니다. 1군에서 승부나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았던 선수들은 도리어 2군에서 타성에 젖는 부작용도 생긴다. B 코치는 “2군 생활이 조금 길어지면서 1군에 빨리 올라갈 시기를 놓치면, 그 생활에 적응하는 선수들도 있다. 2군 경기는 승리에 대한 압박감이 없고, 베테랑들은 특히 훈련양이나 스케줄을 어느 정도 조절할 수도 있다”며 “그러다 보면 의지가 부족한 선수들에게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된다. 애초에 스타로 롱런할 재목이 아닌 선수였던 셈”이라고 했다. 물론 이 역시 대부분의 선수와는 관계없는 얘기다. 특히 2억 원 이상의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는 시즌 도중 부상이 아닌 실력 저하와 같은 개인적인 귀책사유로 2군에 갔을 때 그 일수에 해당하는 연봉의 50%를 삭감당하게 돼 있다. C 선수는 “선수들의 연봉이 높아진 요즘은 2군행이 돈과 직결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선수 스스로의 자존심이 용납을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빨리 올라오려고 하는 편”이라고 귀띔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