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은 유승민 칼끝은 김무성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6월 26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정책자문위원 위촉장 수여식에서 참석자들에게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법 개정안 파동과 관련,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거부권 행사가 감지되자 여권은 긴박하게 움직였다. 특히 친박 실세인 서청원 의원은 막후에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연결해 파국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여권 관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청원 의원이 ‘국회법 개정안을 없던 일로 하되 유승민 원내대표 거취 문제도 다루지 않는다’는 최종 중재안을 가지고 청와대와 당 사이의 메신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잠시 동안 서 의원의 뜻이 청와대에 전달돼 당과 청와대가 모양새를 갖추며 갈등을 봉합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특히 메르스 정국에서 국민 관심도가 떨어지는 국회법 개정문제로 당청이 균열하면 민심 이반이 극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상식적으로 보면 싸움을 만들 수 없는 시점이었다. 메르스 정국이 하이라이트에 이르렀을 때 서 의원 중재안대로 갈등이 그럭저럭 봉합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하지만 메르스 정국이 일부 수그러들고 대통령의 지지율도 추락을 멈추자 상황이 달라졌다. 박근혜 대통령은 보란 듯이 새누리당에 초강수를 날렸다. 한때 자신의 비서실장이었던 인물을 배신자로 찍으며 국민의 심판을 촉구했다. 대통령 말대로 보면 유승민 원내대표(대구 동을)는 내년 총선에서 공천도, 당선도 불가능하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여당 내부에서 서 의원 안을 다수가 동의하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이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한다. 친박 안에서도 강경파가 득세하고 온건파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당 주변에서는 ‘강경파는 이정현 의원이고 온건파는 서청원 의원’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또한 이 의원은 “애당초 이 문제가 국회법 개정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국회법 개정안은 방아쇠였다. 대통령의 여당에 대한 선전포고를 넘어 당청간 주도권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통령의 선전포고는 어느 정도 치밀한 정치적 계산을 깔고 있을까. 위기 국면마다 깜짝 놀랄 만한 승부수를 던졌던 박 대통령의 국면 돌파 스타일이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집권 이후 처음으로 20%대로 주저앉은 지지율은 더 나빠질 게 없다 △국정난맥의 책임을 국회에 분명하게 묻자 △청와대보다 국회 무능이 더 큰 문제라는 점을 국민에게 알리자 등으로 분석할 수 있다.
대통령 거부권에 대한 여론은 찬반이 팽팽하게 맞서 있다. 먼저 대통령의 의회 무시 일방통행에 대해 불통정치라는 비난이 거세다. 따라서 이번 선택이 정치적 계산보다 대통령의 개인적 감정이 앞선 행동이라는 견해도 있다. 레임덕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반면 국회의 ‘발목잡기’ 정략정치에 대한 부정적 여론도 만만치 않다. 청와대가 국회의 구태정치를 정면으로 공박한 것도 여론의 이런 틈을 포착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특히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강한 배신감을 공개 표출하며 ‘퇴출’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인사는 “유승민 원내대표, 이혜훈 전 의원, 이상돈 교수, 김광두 교수 등의 공통점이 있다. 대통령의 속내(본질)를 잘 알고 있어 대통령이 부담스러워하는 유형”이라며 “대통령 비서진에게 ‘청와대 얼라들’이라고 한 말이 심기를 크게 건드렸을 것이다. 청와대 문고리 권력을 상전으로 모시는 사람만 살아남는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유승민 원내대표의 정치적 미래는 어떻게 될까. 대통령의 정면 공격을 받은 탓에 외상은 물론 내상까지 크게 입었지만 그냥 물러서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먼 미래를 보고 청와대와 각을 세우는 것이 ‘자기정치’ 측면에서 훨씬 나은 선택이기 때문이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박 대통령에게 저항한 몇 안 되는 거물급 여권 정치인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이에 대해 “대통령과 맞서는 이미지는 순간적으로 추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길게 보면 정치인 유승민의 체급이 그만큼 올라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사태는 위기라기보다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며 “대통령이 휘두른 칼에 희생되는 느낌이 결코 나쁘지 않다. 웅변보다 침묵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전술이다”고 말했다.
유 원내대표와 김무성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또한 유 원내대표의 미래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대구·경북(TK) 민심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발언 이후 대구경북 민심은 두 가지로 명확하게 갈린다. 지역 언론사의 한 정치담당 데스크는 “대구·경북의 여론주도층은 대통령 발언이 부적절하고 유 원내대표와 같은 ‘바른 소리’하는 정치인이 곁에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고령자를 비롯한 전통 지지층은 대통령이 오죽하면 저렇게 하겠냐며 유 원내대표를 비판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역 국회의원들은 속내를 감추며 이번 사태가 총선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대구의 한 초선의원은 “유 원내대표가 최근 ‘미련 있는 것 아니다. 수가 틀리면 못하는 것이지’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유 의원의 뜻에 동조하면서도 청와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지역구 의원으로서 난감하다”며 “대통령 말씀에 적극 호응하는 의원이 많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이번 사태의 불똥은 최종적으로 김무성 대표에게 날아갔다. 김무성 대표가 “청와대에 할 말은 하겠다”던 전당대회의 결기는 오래전에 사라졌다. 비교적 메시지 관리를 잘 하며 대선가도에 순항하던 김 대표에게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찾아왔다.
지난 며칠의 대응은 “더 이상의 확전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위기감이 당 안팎을 지배했다. 김 대표는 대통령의 의지를 꺾을 수도,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에 몰렸다. 새누리당 한 당직자는 “김무성 대표는 지금 대통령의 칼을 양 손으로 잡고 있는 형국이다. 칼의 힘이 어느 방향으로 가느냐에 따라 김 대표가 큰 상처를 입거나, 무난하게 말리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라며 “대통령과 원내대표의 싸움에 당 대표가 끼어있는 모양새여서 한마디로 고약하다. 명확한 견해를 만들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면 자신에게 덧셈정치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앞서 언급했던 새누리당 인사는 “별 네 개짜리 대장은 쿠데타를 못하고 별 두 개짜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영화로 얘기하자면 감독이 대통령, 주연배우가 원내대표이고 당대표는 카메라맨에 불과하다”며 “시간이 갈수록 대통령, 친박, 당대표 순으로 피해를 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메르스 공포의 여진이 전국을 흔들고 있을 때 청와대발 쓰나미가 새누리당을 침수시켰다. 여당은 애써 태연함을 유지하면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고 있다. 국민은 “이게 또 뭐냐. 대한민국이 국가가 맞고 우리는 국민이 맞나”라며 대통령 대신 자신을 탓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거 국회의원을 하면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정권실세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면 국가가 아니다. 대통령 자격이 없다. 용서할 수 없다.”(2004년 김선일 씨 피랍사건)
“정부가 국회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2005년 입법권 시행령 파동)
“참 나쁜 대통령.”(2007년 노무현 4년 연임 개헌 제안)
전계완 정치평론가 jkw68@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