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에 빠지고…헤엄치고…물먹고…
북한군 장교 출신 탈북자 이 씨는 한때 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씨가 출연한 채널A 방송화면 캡처.
지난해 11월 27일 늦은 밤, 몇몇 탈북 인사들에게 한 통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보낸 이는 북한군 장교 출신 탈북자 이 아무개 씨(35). 그는 “한국에 와서 많은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힘들었다. 오늘 비록 목숨을 끊지만 통일의 이념은 뜨거웠다”며 자살을 암시했다. 다행히 문자를 받은 지인의 신고로 경찰이 경기도 평택 자택에 출동해 옥상에 있던 이 씨를 발견하면서 이 씨의 자살 시도는 미수에 그쳤다.
그런 그가 다음날 살인미수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이 씨가 갈등을 겪던 탈북자 아내 A 씨(29)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 했던 것이다. 사건 당일, 이 씨는 별거 중이던 아내를 만나 “다시 잘해보자”며 재결합을 요구했으나 A 씨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이 씨는 “살고 싶지 않다. 같이 죽자”며 아내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A 씨가 방뇨를 하며 실신하자 이 씨는 겁을 먹고 그만뒀다.
본래 이 씨와 A 씨는 여느 부부보다 각별한 사이였다고 한다. 귀순 전 북한에서부터 잘 알고 지냈으니 그럴 법도 했다. 먼저 귀순한 이 씨는 북한에 두고 온 A 씨를 잊을 수 없어 A 씨와 A 씨 어머니의 귀순을 돕게 된다. 이미 두 사람은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한 아픔이 있었기에 그 누구보다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2012년 결혼한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도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 씨는 어째서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 A 씨의 목을 조르는 끔찍한 일을 벌이게 된 것일까.
이 씨는 경기 파주지역 철책을 넘어 ‘노크 귀순’을 하면서 화제가 됐다. 사진은 파주지역 육군 부대가 GOP 철책선 등 경계 태세를 점검하는 모습.
북한군 보위사령부 중위 출신인 이 씨는 2008년 4월 28일 경기 파주지역에서 철책을 넘었다. 당시 이 씨는 총을 7발 발사한 뒤 우리 군의 반응이 없자 GP(최전방 경계초소)까지 걸어가 국군장병을 부르는 이른바 ‘노크 귀순’을 하면서 화제가 됐다. 보위사령부 장교의 귀순은 1979년 이후 두 번째. 보위사령부는 우리의 기무사 격으로 북한군의 핵심 보직으로 통했다. 이 때문에 이 씨는 2012년부터 방송에 출연해 북한군의 실상 등을 상세하게 전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그가 북한의 실상을 알리겠다며 만든 블로그에는 하루 만에 1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처럼 이 씨는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방송 출연이 잦아지면서 직장에 소홀해졌고, 권고사직을 당했다. 방송 출연만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던 그는 배달일과 일용직, 대리운전 등을 하기도 했다. 잦은 방송 출연은 결국 자충수를 둔 모양새가 됐다.
게다가 ‘노크 귀순’을 할 당시 자신을 알아채지 못했다며 방송에서 우리 군의 안보태세를 지적하는 그의 발언은 군 관계자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방송 후 유명세를 타면서부터는 온갖 악플에 시달렸다. 그는 블로그를 통해 “칼로 생긴 상처보다 말로 남긴 상처가 더 아프고 오래 남는다”며 이에 피로감을 호소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찾는 방송도 점점 줄어들었다.
이 씨가 지인들에게 보낸 자살 암시 문자.
남한 사회에 적응하면서 혼돈을 겪던 이 씨는 급기야 2013년 가족과 함께 벨기에로 이민을 떠난다. 하지만 벨기에에서의 생활도 녹록지 않았다. 이 씨는 벨기에에서 만난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정착금 등 전재산을 날리고 채 1년도 안 돼 귀국했다.
B 씨는 “탈북자 중에는 한국에서 적응을 하지 못하고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탈북자들이 영국으로 많이 건너갔다. 하지만 대부분 실패한다”며 “자신이 특별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외로 가지만 한국에서보다 더 궂은일을 하게 되면서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 씨의 벨기에 이민이 결국 악수가 된 듯하다”고 말했다.
전 재산을 탕진하고 한국으로 돌아 온 이 씨는 아내 A 씨와도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이 씨는 장모와도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아내와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이 씨는 아내를 흉기로 협박하는 등 위협을 가하기도 하고, 몇 차례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결국 별거에 들어간 이들 부부의 관계는 A 씨가 이혼소송을 내면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미디어에서 잊히고, 직장까지 잃은 이 씨에게 전부나 다름없었던 아내 A 씨의 이혼 요구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결국 아내의 목을 졸라 살해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재판으로 넘겨진 이 씨는 1심에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지난 6월 22일 항소심 재판부 서울고법 형사11부(부장 서태환)는 살인미수 혐의로 기소된 이 씨에게 원심과 같이 징역 2년 6월을 선고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아내인 피해자를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것으로 죄질이 좋지 않고, 피해자도 처벌을 원하고 있다”며 “피해자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탈북자 1호 박사’인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탈북자들 사이에서는 ‘한번 사기 당하는 게 교과서다’라는 말이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과 비즈니스 마인드에 익숙하지 않은 탈북자들이 그만큼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말”이라며 “막 귀순한 탈북자들에게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하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 잘 의지하고 살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이 씨도 상당히 똑똑하다는 평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현재로서는 죗값을 치르고 새 출발을 해 재기하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