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어만 가는 ‘컨트롤 타워’의 그림자
▲ 허문석 왕영용 전대월(위부터 시계방향) 3인방은 정치권 연루설을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입맞춤’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 ||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전대월-허문석씨가 서로 통화한 녹취록이 공개돼 그동안 암흑에 휩싸여 있던 사건의 실체에 대한 ‘서광’을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핵심 4인방’들의 진술이 서로 엇갈리고 있어 실체 규명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흥미로운 점은 전대월 허문석 왕영용씨는 모두 이광재 의원이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반면, 사업을 처음 기획했던 권광진씨만은 이 의원이 이번 사업에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3명 모두 ‘입’을 맞추었든지, 아니면 권씨가 이 의원을 곤궁에 빠뜨리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관련자들의 진술을 중심으로 유전의혹 사건을 중간 점검해본다.
유전의혹 사건은 철도공사 왕영용 본부장이 전대월 권광진씨 등의 유전개발 사업 제안을 받아들여 정부기금으로 투자를 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여기에 이광재 의원의 소개로 이 사업에 뛰어든 허문석씨는 사업성 등에 관한 자문을 해주는 대가로 돈을 받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번 파문이 단순 사기 사건으로 결론이 난다면 왕영용 본부장 등 ‘피라미’만이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광재 의원이나 제3의 권력 상층부 인물이 개입된 흔적이 발견된다면 대형 권력형 비리로서 노무현 정권에도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이번 사건이 두 가지 중 어떤 비리로 규정이 되든, 현재로서는 사건 관련자들의 엇갈린 진술에 대한 신빙성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먼저 이번 사업의 최초 기획자였던 권광진 쿡에너지 대표의 경우 비교적 일관된 진술을 하고 있다. 그는 사건 초기만 해도 이번 사건이 정치 쟁점화되는 것을 우려해 이광재 의원의 연루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그는 이 의원이 계속 거짓말로 일관하는 것에 대해 매우 화가 났다고 한다. 그 뒤부터 그는 일관되게 이 의원이 이번 사업의 처음부터 끝까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특히 “확실한 것은 이번 사업과 관련해 이 의원측과 수없이 접촉해 얘기했다는 것이다. 특히 그쪽 요청으로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전에 이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20여 일간 정신 없이 관련 자료를 작성했다”며 이 의원 개입을 구체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전대월씨가 수시로 이 의원측과 접촉하며 시간을 맞춰달라고 날마다 닦달했다. 대통령도 러시아 방문 때 직접 이를 언급하기로 돼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해 이 의원은 권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권씨의 주장 일체에 대해 완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상태다. 사실 권씨는 자신이 몇 년 동안 이번 유전 개발 사업을 ‘기획’하고 사업 성공을 위해 뛰어다녔지만 결과적으로 한푼도 벌어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사건 파문이 커지자 ‘사심 없이’ 모든 일들을 털어놓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검찰이 그의 진술을 얼마나 확실하게 입증할지가 이번 사건 규명의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오른다.
그는 국회 건설교통위에 출석한 자리에서 “우리가 인수하려 했던 러시아 페트로사흐사는 영국 최대 석유회사인 BP사가 투자한 러시아 회사에 매각됐다. 따라서 사업성이 없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간접 확인됐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그 뒤 BP사는 러시아 페트로사흐사 인수와는 전혀 무관한 것으로 밝혀졌다. 왕 본부장의 거짓말 행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지난해 8월과 9월 철도공사 공식 회의 석상에서 “이번 사업은 이광재 의원이 밀어주는 사업”임을 여러 차례 밝혔다. 하지만 그는 “회의록이 잘못 기록됐다”며 그런 사실을 전격 부인한 바 있다. 최연혜 철도공사 부사장도 “왕 본부장이 이광재 의원이 밀고 있다고 했다”고 말했지만 그는 “기억이 없다”며 버텼다.
왜 그럴까.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왕 본부장이 권력 실세 친분 운운하는 허문석씨의 말만 믿고 사업을 추진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허씨의 ‘감언이설’에 속았다는 것을 알고, 이 의원 연루설을 강하게 부정할 가능성이 첫 번째다. 이럴 경우 허씨의 말을 검증 없이 믿은 자신의 책임이 크므로 모든 책임을 혼자 덮어쓰려 했을 것이다. 실제로 왕 본부장은 이 의원 연루 부분에 대해 “허문석 박사가 그런 방향으로 얘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는데 허 박사가 내게 신빙성 있게 보이려고 그렇게 말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이 허 박사에게 속아 이 의원을 팔고 다녔지만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그의 진술에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다. 왕 본부장은 기술고시 출신에 공직경력 28년째를 맞고 있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공무원이다. 그런 그가 허 박사 등의 말만 믿고 아무런 검증 없이 공식 석상에서 거리낌없이 노무현 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를 언급할 정도로 어리숙한 행정력을 보였을까 하는 점이다.
두 번째 가능성은 ‘실제로’ 이광재 의원이 이번 유전개발 사건에 깊숙이 개입돼 있고, 왕 본부장도 그 ‘실체’를 믿고 공식석상에서 이 의원의 ‘뒷배경’을 공공연히 팔고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사건 파문이 일파만파로 확대되자 도마뱀 꼬리 자르듯 자신의 선에서 이번 사건을 수습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철도공사의 한 관계자는 “왕 본부장이 유전개발 사업에 대한 이 의원의 ‘관심’을 강조하는 바람에 철도공사 최고위층조차 별다른 토를 달 수가 없었다”고 당시 공사의 내부 분위기를 전한 적도 있다. 왕 본부장의 엇갈린 진술의 실체를 규명한다면 이 의원의 ‘개입’ 여부도 더욱 명확해질 전망이다.
최근 공개된 전대월-허문석씨 간의 통화 녹취록을 주의 깊게 보면 허씨가 이번 사건의 ‘키’를 쥐고 있는 게 더욱 분명해 보인다. 허씨는 이 통화에서 이번 사건의 실체를 규명해줄 두 가지 중요한 단어를 자신의 입으로 말한다.
먼저 리베이트 부분. 이것은 이번 사건에서 드러나지 않는 최후의 보이지 않는 손을 가려낼 중요한 단서다. 허씨는 전씨에게 “(감사원 조사에서) 리베이트 준 것도 없고 줄 필요도 없다고 얘기하라”며 조언하고 있다. 이를 통해 ‘누구에게 어떻게 줬다’는 내용은 없지만 리베이트가 실제로 있었을 가능성을 유추해볼 수 있다. 있었다면 누구에게 얼마가 건너간 것인지, 허씨는 분명히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째는 허씨가 권력 실세의 실명도 거론했다는 점이다. 허씨는 이광재 의원을 언급하면서 “이 의원을 살리고 나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이를 통해 보면 허씨가 ‘무고한’ 이 의원에게 피해를 주지 말자는 순수한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 한 가지는 이 의원 역할이 전씨에게 허씨를 소개해준 것에 그치지 않고 이번 사건에 깊숙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치권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이 의원을 ‘살리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한편 허씨가 이 의원 외에 제3의 권력 실세 후원을 등에 업고 사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예기치 않는 거물급 인사가 걸려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대월씨도 허씨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건에서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다. 전씨도 허씨와 마찬가지로 권력실세와 돈, 두 가지 모두와 연관이 돼 있다. 전씨는 권광진씨의 사업 아이디어를 ‘자금’과 연결시킨 핵심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원도 평창 동향 출신인 이광재 의원을 가장 먼저 찾아갔기 때문에 ‘권력형 비리’의 단초를 제공한 장본인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이번 사건의 리베이트로 의심받고 있는 1백20억원의 ‘비밀’에 대해서도 가장 잘 알고 있다. 전씨가 사업참여 대가로 철도공사로부터 받기로 한 1백20억원의 성격에 대해 “1백20억원 가운데 60억원은 허씨에게 줄 돈이었다”며 허씨를 이 사업과 정치권간의 ‘연결 고리’로 지목한 바 있다. 허씨는 그 같은 이면계약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정치권과의 관련성은 부인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전씨는 ‘권력층’과 허씨를 이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했고, 허씨는 전씨에게 사업 전반에 대해 조언하며 뒤에서 ‘컨트롤’했을 개연성이 크다. 이번에 드러난 녹취록을 보면 전씨는 허씨에게 그 동안의 의혹에 대해 질문하고 허씨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설명’해주는 뉘앙스를 보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수평적이라기보다 상하관계였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허문석씨가 다른 관련자들보다 ‘상급’에 위치해 있었으며, 사업 전반을 주도적으로 제어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그 뒤에는 ‘실재’하는 권력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가 허풍으로 만들어낸 ‘허수아비 권력’이 있었을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전대월 허문석 왕영용씨 모두는 이광재 의원의 개입설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 사람의 진술이 엇갈리는 게 많지만 이 의원 연루 부분에 대해서만은 일치하고 있다. 3명이 이 부분에서 ‘입’을 맞추었든지, 아니면 권광진씨만 이 의원이 연루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검찰은 권광진 전대월 왕영용 허문석씨 등 핵심 4인방에 대한 수사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의 주요 인물인 허문석씨가 애초의 입장을 번복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잠적해버려 검찰이 사건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허문석씨가 검찰청 포토 라인에 서는 날, 이번 사건은 또 다른 고비를 맞을 전망이다. 아니면 여는 ‘게이트’처럼 파문만 확산된 채 소멸해버릴 ‘유성’에 그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