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일 군사 공조에 ‘경고 메시지’
북한·중국·러시아 3국이 8~9월 사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88여단 기념물 합동 제막식을 개최할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이 할아버지 김일성 주석의 103회 생일인 4월 15일 군 간부들을 대동하고 금수산태양궁전을 참배하는 모습. 연합뉴스
“8월 혹은 9월 사이에 북한·중국·러시아 3국이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88여단을 기념하는 기념물을 합동으로 제막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제막식에는 3국 고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내부 정보를 취급하고 있는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최근 <일요신문>과 만나 이렇게 밝혔다. 시기를 놓고 볼 때, 일제가 패망한 8월 15일 광복절과 북한의 정부 창립일인 9월 9일 사이가 유력할 것으로 보인다.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해당 행사의 참석 인사다. 특히 북한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참석 여부가 핵심이다. 이윤걸 대표는 “지리적 근접성이나 88여단의 중요성을 놓고 볼 때, 김정은이 직접 참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88여단은 북한에 있어서 상해임시정부급 위상을 지닌다. 북한의 체제 성립과 ‘김일성 왕국’의 시작에는 88여단이 자리하고 있다. 88여단 1대대장을 역임한 김일성을 포함해 해당 부대에 속했던 조선인들은 일본 패망 후, 조선 본토에 입성했고 곧 북한 체제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만큼 88여단은 북한 체제 성립은 물론 남북 분단사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88여단과 관련해 국내에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분단국 현실에서 북한을 포함한 대부분 공산권 연구가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도 그렇지만, 실제 이 부대와 관련한 많은 자료들이 고의적 혹은 어쩔 수 없이 소실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88여단의 성립과 그 성격에 있어선 현재까지도 논란으로 남아있다. 88여단을 두고 각기 다른 성격으로 규정해 ‘88국제여단’, ‘88보병여단’, ‘88정보여단’, ‘88국제저격여단’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기도 하다.
그렇다면 88여단 제막식에는 왜 북·중·러 3국이 참여하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부대의 성립 배경에 대해 좀 더 살펴봐야 한다. 88여단의 전신은 중국공산당 지휘를 받아 중국 동북지역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동북항일연군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혼재된 연합부대였다. 김일성 역시 훗날 북한 체제 성립을 주도한 그의 빨치산 동료 최용건, 김책, 안길, 최현(현 최룡해 당비서의 아버지) 등과 함께 동북항일연군에서 활동했다. 북한 내부에선 전설로 내려오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 역시 동북항일연군 시절의 일이다.
일제와 맞서 무수한 공을 세워오던 동북항일연군은 당시 점점 강화되는 일제의 토벌작전에 결국은 궤멸에 이른다. 1940년 즈음의 일이다. 부대 총사령관이었던 중국의 항일영웅 양정우 장군 역시 이 시기에 전사했다. 그 잔존 세력들은 살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소련행이었다. 동북항일연군 2로군 총지휘자였던 중국의 주보중 장군과 훗날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한국의 국회의장)과 부주석이 되는 최용건이 주도했다.
이렇게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넘어 들어온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들은 1942년 88여단이란 명명아래 소련군 편제에 들어간다. 1942년 조직 구성이 완료된 88여단은 여단장으로 주보중을 임명했으며 그 아래 참모장과 부여단장, 여단정치주임 등은 소련군 인사 차지가 된다. 최용건은 부참모장을 맡았으며 여단의 4개 대대 중 선봉대인 1대대장에 김일성이 임명됐다. 북·중·소 3국의 인사가 포진한 극동 공산권의 ‘국제부대’였던 셈이었다.
당시 ‘조소중립조약’을 통해 일제와 평행선을 유지하고 있었던 소련 입장에서 이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소련이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받아들여 자국의 군아래 편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은 1997년 논문을 통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소련은 내심 일제와의 조약을 믿지 않았으며 특히 70만 명에 달하는 일제의 만주 관동군을 의식했다는 것. 까딱하면 언제 어떻게 대일전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염려에서다. 또한 당시 88여단의 무장력은 별다른 가치가 없었지만, 만약 대일전이 발발한다면 이들의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정보력과 첩보능력이 크게 쓰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윤걸 대표 역시 “88여단은 쉽게 말해 정보부대의 성격이 강했다”라며 “이는 미국 극동사령부 내 다양한 국적의 군사들을 둬 정보전에 나선 것과 비슷하다”고 부대의 성격을 규정했다.
알려졌다시피 김일성을 비롯한 88여단 출신 조선인들은 소련의 협조하에 일제 패망 이후 그대로 조선 본토에 들어서 정권을 창립하고 장악하게 된다. 88여단 부참모장 최용건을 비롯해 김책, 강건, 안길, 오진우, 최현 등 빨치산파 인사들이 그 주인공이다. 김일성부터 김정일 김정은, 3대를 받들고 있는 ‘마지막 빨치산’ 이을설 인민군 원수(95) 역시 88여단의 일원이었다. 88여단의 정통성은 북·중·러 3국이 나눠 갖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배경 탓에 8월 혹은 9월 중 진행할 3국의 합동 제막식은 국제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윤걸 대표는 “앞으로 예정된 북·중·러 3국의 88여단 기념물 제막식은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이라며 “한·미·일 군사 공조, 특히 미일 공조가 강화되고 있는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북·중·러 3국은 이에 반하여 과거 함께 공조했던 88여단 카드를 통해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일성 하바로프스크행은 ‘신의 한 수’ ‘정치력 + 리더십’ 소련의 낙점 받다 3대 세습까지 성공한 북한 ‘김씨 왕조’의 시작은 88여단이 그 기반이었다. 그만큼 88여단과 김일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의 장남 김정일 역시 이 시기 하바로프스크 88여단 ‘남야영(B야영)’에서 출산했다. 88여단은 본래 2개의 야영이 있었는데, ‘북야영(A야영)’은 중국인이, 남야영은 조선인이 주로 머물렀다. 1961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를 하는 김일성 주석. 최용건은 당시 부참모장을 맡으며 직제상에서도 대대장이었던 김일성을 훨씬 앞섰다. 특히 그는 이전 동북항일연군 시절 조선인의 대표 격으로 중요한 결정사항에 참여했다. 게다가 지금에야 북에서 전설로 일컬어지는 김일성의 보천보 전투가 실상은 파출소 하나를 소탕한, 극히 소규모 전투였다는 점에서 대단한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김일성의 정치력이 아니면 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다. 김일성은 앞서 두 선배보다 훨씬 일찍 소련으로 퇴각했다. 88여단이 창설되기 2년 전인 1940년의 일이다. 김책의 경우 1944년이 되어서야 88여단에 들어왔다. 트로이카 중 가장 큰형님인 최용건의 과거 화려한 경력은 오히려 소련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다. 지나치게 중국과 가깝다는 이유였다. 반면 김일성은 일찌감치 연해주로 들어가 소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한다. 이윤걸 북한전략정보서비스센터 대표는 “김일성은 당시 사실상 소련 정보기관의 ‘프락치’ 역할을 도맡아 했고, 성과도 두드러졌다”고 설명했다. 일본의 석학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저서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통해 “당시 김일성은 나머지 인사들과 비교해 부하 장악력이 가장 뛰어났다”며 그의 리더십을 이유로 꼽기도 했다. 소련과의 정치적 위치도 그렇지만, 사실상 김일성 본인 특유의 리더십으로 부대 내 구심점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동안 중국 만주에서의 활동을 접고 가장 먼저 소련으로 넘어간 김일성의 당시 선택이 현재의 북한 체제와 남북 분단이라는 역사를 만들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