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해야 할 것 같은 사랑 오겠죠”
▲ 사진=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어린 시절 비밀을 감당하지 못해 걸핏하면 자살을 시도하는 여교수와 사람을 셋이나 죽인 사형수의 ‘까칠한’ 만남이 사랑과 용서,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큰 의미로 이어지면서 배우 이나영도 훌쩍 성장했다. 지난 2004년 <아는 여자>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2년 만에 찾은 스크린.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이 만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이나영은 어느새 경력 9년차의 어엿한 배우라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지난 9월 4일 열린 영화 시사회장에서 그녀를 만났다.
길쭉길쭉한 팔 다리, ‘에브리 데이 뉴 페이스’라는 CF 카피를 떠올리게 하는 맑고 투명한 피부, 그래서 화면 가득 클로즈업해도 마냥 예쁘기만 한 얼굴. 지난 98년 잠뱅이 CF로 데뷔한 이래 각종 화장품 광고 모델로 ‘선망’ 받아온 이나영의 비주얼은 여전히 변함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세인들은 얼굴 크기가 겨우 19.8㎝라 CD 한 장으로 가려진다는 둥 환상적인 8등신이라는 둥 그녀의 외모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그 사이 차근차근 내공을 쌓아온 이나영은 어느새 그 내공에서 강한 빛이 발산되는 배우로 성장했다.
그녀를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캐릭터’로 ‘고정’시킨 드라마 <네 멋대로 해라>를 시작으로 <아일랜드> 영화 <후아유> <영어 완전 정복> <아는 여자> 등등, 이런 필모그라피는 배우 이나영을 심은하 전도연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자리 잡게 했다. 게다가 주인공의 연기와 감정 표현에 모든 것을 맡긴 이번 영화를 마치고 나니 그 가치는 더 확고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만만치 않은 대가를 치러야했다.
“영화가 100% 감정신이고 내면 연기여서 많이 힘들었어요. 소재도 무거웠고요. 촬영을 마친 후에도 그 힘겨움이 남아 한동안은 멍하게 있기도 했어요. 감독님의 요구대로 한 장면, 한 장면에 진심을 담으려 노력했는데 그 느낌이 잘 전달되길 바라요.”
영화 속 ‘유정’은 뻔뻔하다. 사형수 윤수(강동원) 앞에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고모가 사형수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기분 더러웠다고요”라고 말할 정도다. 그는 이런 장면들을 ‘진심’으로 연기하기 위해서 실제 사형수들을 만났다. 이 대목에서 이나영은 유난히 검고 큰 눈을 반짝이며 아주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직접 그 분들 만나러 간다고 했을 때 폐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괜히 영화 찍는답시고 찾아가서 상처를 주는 건 아닌지 신경 쓰였거든요. 정작 그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저희가 간다는 소식에 밤잠을 못 이뤘다고 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눈물 흘려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 나쁜 사람일 때 죄를 짓고 천사의 얼굴일 때 벌을 받는 것 같아요. 우리는 ‘삶’이나 ‘죽음’이란 단어를 너무 막연하고 하찮게 사용하잖아요. 일상생활에서 죽고 싶다는 말도 쉽게 하고요.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대단히 예민한 단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어요. 그러면서 존재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게 됐고, 많은 생각을 했어요.”
이나영이라는 사람은 그녀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맡았던 캐릭터처럼 뭔가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것은 기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중론’이라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외계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녀. 심지어는 ‘자폐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었다.
“그 별명이 이젠 익숙해져 특별히 좋고 싫음이 없어요. 사실 제가 엉뚱한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단지 계획성 없이 흘러가는 대로 작품을 선택하는 편이고 또 연기자로 활동하면서도 크게 눈치 안 보고 스스로의 재미를 찾는 모습이 독특하게 비쳤을 수도 있고요. 그리고 저는 사람 만나는 것 좋아해요. 많은 사람이 필요 없을 뿐이죠.”
또래의 여자 스타들에 비하면 유독 안티 팬이 적고 오히려 여자 팬들이 많은 이유를 이런 소탈하고 솔직한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나영은 올 봄 배용준의 소속사 BOF로 둥지를 옮겼다. 데뷔 후 처음으로 소속사를 바꾼 것이다. 기존의 소속사가 편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편안함으로 인해 긴장감이 풀렸다는 생각이 들어 좀 더 힘차게 뛰기 위해 새로운 소속사를 찾게 된 것이라고 한다. “소문처럼 엄청난 돈을 받은 것은 아니고 그 회사와 내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한 방향성이 잘 맞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한다.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 매 작품마다 출연을 결정한 계기를 묻는 질문에 그가 내놓는 대답이다. 그렇게 결정된 출연작의 공통점은 조건과 현실을 뛰어넘는 사랑, ‘그냥 해야 할 것 같은’ 사랑에 대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런 탓에 그와 사랑을 나눈 극중 대상들은 소매치기, 양아치, 사형수 등이었다. 이제는 20대 후반이 된 이나영의 실제 사랑법도 그런지 궁금하다. 작품을 고르듯, 그 안에서 연기하듯 운명이 이끄는 사랑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을까. 이 질문에 이나영은 그냥 환한 미소로만 화답할 뿐이다.
최승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