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크와 불도저 청계천을 갈아엎다
▲ 양윤재 부시장(왼쪽), 이명박 시장 | ||
양 부시장의 전격 구속에 대해 이 시장측에서는 “혐의가 있다면 엄벌을 받아야 할 것”이라며 일단 선을 긋는 입장이다. 하지만 만약 검찰 수사가 사실로 밝혀지면 향후 ‘이명박 캠프’에 두고두고 상당한 부담으로 남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지금 세간의 최대 관심사는 양 부시장과 이 시장과의 ‘관계’다. 대학과 정계라는 서로 다른 세계에 몸담고 있던 이 두 사람은 과연 어떻게 시정의 ‘동반자’가 됐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사람은 ‘청계천’을 인연으로 끈끈히 맺어졌고, 그 이후 현재까지 양 부시장은 이 시장의 방계 인맥 군단의 ‘사단장’급으로 치부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사건이 터지자 서울시측은 “이 시장이 청계천 복원 아이디어를 착안한 것은 98년 미국 체류 시절부터였다”고 밝혔다. 청계천 복원 사업이 이 시장의 순수 아이디어지, 양 부시장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해명이다. 또한 이미 오래전부터 청계천 복원 사업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청계천 복원 사업에 참여했던 학계 인사들의 증언은 좀 다르다.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라는 학계 모임이 모든 정책 자료를 제공했고, 이 모임에 뒤늦게 참여했던 양 부시장이 이 시장 캠프와 상당히 밀착됐다는 것.
이 시장의 선거 캠프 정책팀장을 맡으며 청계천 복원 사업에 초기부터 간여했던 조광권 서울시 교통연수원장은 최근 자신이 펴낸 책 <청계천에서 역사와 정치를 본다>에서 “본격적으로 선거 캠프가 구성되고 정책 개발을 해나가면서 이 후보는 고민에 빠졌다. 획기적인 개발 사업이 필요했는데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청계천 복원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진 집단이 있다는 얘기가 들린 것이다. 귀가 솔깃했다.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와 바로 접촉에 나서 심포지엄 자료를 건네받았고 실무적 차원의 검토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당시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 회장이었던 노수홍 연세대 교수는 “2001년 9월께 이명박 시장측에서 먼저 연락을 해와서 우리측의 자료를 상당부분 제공했다”며 조 원장의 책 내용을 뒷받침했다.
서울대 홍욱희 교수 또한 <월간중앙> 2002년 8월호 기고에서 “이명박 후보가 언제부터 청계천 복원에 관심을 가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올해 2월25일 기자들의 참여 속에 청계천 현장을 처음 방문했고 3월 초에 열린 심포지엄에서 간단한 인사말을 하는 정도였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후보는 자신의 선거공약 1호인 ‘청계천 복원’에 대해 별로 철저한 준비를 하지는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라고 밝혔다.
항간에는 청계천 복원 구상을 최초로 한 이가 양 부시장이라는 얘기가 있으나 학계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의 단초를 제공한 이는 사실상 노 교수라는 것이 정설이다.
90년대부터 청계천 복원을 위한 자료 수집에 들어갔던 노 교수가 2000년 9월 ‘청계천 되살리기’라는 첫 심포지엄을 가진 게 시초라는 것. 이 모임에서 회장으로 선출된 노 교수는 주변 추천에 의해 양 부시장(당시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을 소개받았고 양 부시장은 제2회 심포지엄이 열렸던 2001년 4월부터 이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당시 이 시장은 1998년 16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서 당선됐으나, 2000년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자진 사퇴했고, 그 직후 곧바로 서울시장 선거를 사실상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캠프에서 청계천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인 시기는 2001년 하반기부터였다.
이때는 당시 민주당의 서울시장 후보 경선자로 나섰던 이상수 캠프에서도 청계천 복원 사업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을 때였다. 노 교수는 “당시 여야의 후보들이 모두 청계천 문제에 관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우리 모임은 정치와 선거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자료를 양측에 모두 동일하게 제공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이듬해인 2002년 4월2일 민주당 경선에서 김민석 후보가 이상수 후보를 누르고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게 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김 후보는 청계천 복원 사업에 회의적이었다.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측의 관계자는 “청계천 복원을 주장하는 여야의 두 후보 가운데 이명박 후보는 당내 경선에서 승리한 반면, 이상수 후보는 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이명박 캠프와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조 원장은 저서 <청계천에서…>에서 “당시 청계천 문제의 관심은 이 후보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후보는 이미 2001년 12월부터 서울대 양윤재 교수 등과 청계천 내부 탐사와 청계천 살리기 연구회와의 공동세미나 계획까지 구상하며 청계천 복원 사업에 특별한 집념을 보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드러나듯이 당내 후보 경선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양 부시장과 이명박 캠프는 밀착했던 것으로 보는 의견이 많다. 이와 관련해 노 교수는 “우리 모임은 분명히 당내 경선 전까지는 중립을 지켰다. 단 양 부시장은 당시 우리 모임에서 중요한 위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어느 캠프에 가까웠는지는 모르겠다”고 밝혔다.
학계 주변에서는 2002년 2월25일 당시 이 시장이 직접 청계천 탐사에 나서는 등 청계천 사업을 선점하고 나서는 데에도 양 부시장이 큰 역할을 했으리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오고 있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 이 시장의 당선을 이끈 숨은 공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청계천 복원 사업’이라는 점은 당시 이 시장 캠프에 몸담았던 관계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또한 여기에는 학자이면서도 강한 현실 참여 성향을 보여온 양 부시장의 숨은 활약 또한 있었음은 당연했다.
학계에서 오랫동안 양 부시장과 함께해온 한 관계자는 “(양 부시장이) 이 시장과 상당히 가까웠고 따라서 선거에도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그는 대학 교수보다는 행정가나 정치인이 더 어울려 보일 정도로 자신의 뜻을 펴고 주위 사람을 대하는 데에 적극적이고 활달했다”고 덧붙였다.
역시 양 부시장과 오랫동안 함께 연구활동을 했던 김안제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는 “교수 중에는 학교에만 묻히는 형이 있고, 현실 참여 의지가 강한 스타일이 있는데 그는 후자쪽이었다”면서 “추진력도 강하고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다 보니 주변과 부딪치는 일도 많았다”고 밝혔다.
학교 주변에서는 양 부시장에 대해 “그가 정치나 현실 참여에 대한 구체적인 말을 한 적은 없지만 평소 성향이나 행보를 보면 언젠가는 학교를 떠나 정치나 현장 기업에 뛰어들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평도 들렸다.
서울시 주변에서는 “양 부시장은 이 시장과 상당히 닮은 꼴이었다. 그래서 이 시장이 양 부시장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 시장의 별명이 ‘불도저’인데 양 부시장 또한 별명이 ‘탱크’라는 것. 그 정도로 밀어붙이는 추진력에서 이 시장 못지않았다는 얘기다.
양 부시장이 결국은 학교를 떠나 이명박의 대선 캠프에 참여할 것이라는 얘기도 공공연히 들려왔다. 서울시 주변에서는 “양 부시장이 당초 계약 기간(2년)을 넘어 부시장에 승진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얘기가 많았다. 시청앞 잔디광장의 사업 계획이 많은 반대에 봉착했을 때에도 양 부시장은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기어이 성사시켰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시장측 계열로 분류되는 정치권의 한 인사는 “벌써부터 이 시장의 대선 캠프팀 운운하는 것은 좀 때이른 감이 있지만, 역시 종국에 가서는 현재 이 시장이 몸담고 있는 시청의 인맥이 향후 캠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할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본다면 양 부시장은 원세훈 정무부시장과 함께 사실상 서울시의 2인자격이나 다름없는 것 아니냐”며 그의 위상을 조심스럽게 내비치기도 했다. 양 부시장의 추락이 이 시장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