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개 씨! 내 넋두리 좀 들어줄래요?
신상 노출 걱정 없이 속 깊은 마음을 털어놓는 ‘익명 SNS’가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오른쪽은 익명 SNS에 올라온 사연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과 같은 SNS는 자신의 계정을 개설해 사진이나 글을 올리면서 타인과 소통한다. 내 취향은 무엇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지금 기분은 어떤지를 효과적으로 잘 포장해서 올려야 댓글과 관심을 얻을 수 있다. 친구에게 질세라 예쁜 프로필 사진을 엄선해야 하고, 해외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사진이라도 잔뜩 올려야 한다. 분명 온라인에 있는 ‘나의 사적인 공간’이지만 남의 눈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정도의 포장은 불가피한 것이다. ‘SNS 피로감’이 몰려오는 순간이다.
이러한 불순물을 걸러낸 SNS가 등장했다. 소위 ‘감성앱’, ‘힐링앱’으로 불리는 익명 SNS가 그것이다. 익명 SNS에서는 자신의 어떠한 정보도 입력하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아이디조차 없다. 출생연도와 성별을 물어보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복잡한 가입절차는 생략돼있다. 익명 SNS는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솔직하고 진솔한, 날 것 그대로의 사연을 수용하는 ‘대나무 숲’ 역할을 톡톡히 해내면서 조금씩 저변을 넓혀가고 있다.
익명 SNS인 ‘모씨(MOCI)’는 어플리케이션(앱) 다운로드 수가 100만에 이른다. 익명으로 글을 쓰거나 해시태그를 통해 키워드를 설정하면 내 글에 다른 사람들이 공감하는 댓글을 달 수 있는 앱이다. 익명으로 텍스트만 작성하면 감성적인 배경사진과 글씨가 합쳐진 그럴싸한 ‘고민카드’가 노출된다. 여성 이용자는 ‘여모씨’ 남성 이용자는 ‘남모씨’로 지칭한다. 모씨에는 주로 ‘남자들은 사랑하면 정말 여자를 지켜주나요?’, ‘이직할까요? 말까요?’, ‘치킨 어디서 시킬까요?’ 같은 짧은 글귀의 고민이나 재미있는 주제가 올라온다.
모씨 이용자인 3년차 직장인 이 아무개 씨(여·29)는 “다른 익명 SNS에 비해 재미있는 주제들이 많이 올라오는 편이다”면서도 “초창기에 비해 사용자 연령층이 많이 어려지는 것이 눈에 띄더니 가벼운 욕설이나 단순한 험담도 늘어나고 있다. 진지한 고민을 털어놓기는 어려운 분위기”라고 후기를 전했다.
가족에게도 말 못할 사연을 털어놓고 싶은 이용자들은 주로 ‘이팅(eting)’을 이용한다. 이팅은 엽서를 쓰듯이 자신의 고민을 써서 전송하면 랜덤으로 선정된 이용자가 사연을 받아본다. 자신의 사연을 받아 본 익명의 이용자는 공감이나 위로, 조언의 글로 답장을 보낸다. 일대일 커뮤니케이션에 가까운 이팅은 과거 펜팔을 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익명성은 철저히 보장된다고 한다. 대신 다른 사람이 한번 보낸 답장에는 또 다시 답을 할 순 없다. 대화를 이어나갈 수 없는 것이다. 이팅 개발자 오승목 씨는 “메시지를 전송하면 한 번의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무엇이든 끝이 있어야 더 소중한 것처럼 한 번의 인연이 갖고 있는 특별함을 강조하고 싶었다”고 했다.
익명성 뒤로 숨은 언어폭력이나 장난글은 여전히 익명 SNS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익명 SNS ‘어라운드’는 이 부분을 가장 잘 극복했다고 평가받는다. 어라운드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나 난치병 투병기와 같은 진지한 글들도 올라온다. 물론 회사생활의 어려움이나 연애상담과 같은 고민도 단골 주제다. 어라운드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버찌’라는 열매를 얻어야 한다. 버찌를 얻으려면 남의 글에 공감하고, 댓글을 정성껏 달아야 한다. 악플을 달거나 인신공격을 하면 버찌를 얻을 수 없다. 자연스럽게 악플러들의 접근이 차단되는 시스템이다.
어라운드의 가장 큰 특징은 이용자들이 끈끈한 유대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달콤창고’라 불리는 이벤트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사용자 누군가가 지하철역 사물함에 간식을 넣어뒀다고 알리면 누군가가 그 간식을 가져가는 대신 메시지가 적힌 포스트잇이나 소정의 선물을 두고 가는 식이다. ‘달콤창고’ 개설 소식과 이용방법은 어라운드 앱에서 이용자들끼리 공유한다.
직장인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블라인드’의 유명세는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블라인드는 회사계정의 이메일 인증을 거쳐야만 이용할 수 있는 익명 SNS. 직원수가 300명 이상인 기업, 별도의 회사 이메일 계정이 없는 곳, 기업이 아닌 단체나 협회 등은 등록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블라인드 이용자 최 아무개 씨(30)는 “블라인드 앱에서는 사내연애나 상사에 대한 정보, 연봉과 같은 공개적으로 털어놓기 어려운 정보들이 많이 올라와 인기가 있다”며 “다만 회사 이메일 계정으로만 가입을 할 수 있어 또 하나의 사내 커뮤니티 같은 느낌도 있고, 회사 메일로 인증했다 걸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다”고 귀띔했다.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전미영 연구교수는 한 칼럼을 통해 “익명 SNS는 이슈가 되더라도 누가 한 이야기인지 밝혀지지 않는 구조이기 때문에 글을 올린 사람조차 자신의 글을 객관화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쉽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 좀 더 솔직한 정보 등이 유통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익명을 활용해 잘못된 정보를 퍼뜨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용자들의 자체 필터링을 통해 충분히 정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