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유죄” 검찰 “무죄” 흩어진 퍼즐 맞춰라
2001년 겨울 전남 나주 드들강 유역에서 알몸 시신으로 떠오른 박 양과 그의 생전 모습.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 화면 캡처.
“그놈이 범인은 맞고! 범인이 맞기 때문에 퍼즐 맞추기를 하는 거지.”
7월 30일 <일요신문>과 만난 나주경찰서 관계자의 말이다. 이 관계자는 이어 “10년 전에 놓친 것들을 찾기 위해 재수사를 시작했다”며 “우리가 수사 결과를 내놓으면, ‘이놈이 범인이 아니면 안된다’하는 반응이 나와야 한다”며 의지를 다졌다. “증거를 탄탄하게 만들고 있다”는 그의 단호한 표정에선 비장감마저 감돌았다.
2001년 2월 4일, 전남 나주의 드들강 유역에서 여고생 박 아무개 양(17)이 시신으로 떠올랐다. 옷이 전부 벗겨진 상태였다. 목이 졸린 흔적은 물론 허벅지에도 세로로 길게 난 여러 개의 상처가 남아 있었다. 우측 사타구니에선 멍 자국도 나타났다. 당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폐와 콩팥에서 플랑크톤이 검출됐다. 경부압박질식 및 익사로 사료된다”며 “사망추정시각은 2001년 2월 4일 해가 뜨기 전 약 7시께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목을 졸린 자국이 있었음에도 사인은 익사였던 것이다.
박 양이 끼고 있던 반지는 사라졌고 옷가지들은 사건 현장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시신에는 지문 하나 없었다. 수사가 난국에 빠졌다. 그런데 사건 발생 후 17일 만에 박 양의 몸에서 남성의 정액이 발견됐다. 경찰은 정액에서 용의자의 DNA를 확보했다. 누군가가 박 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용의자조차 특정하지 못했다. 광주에 사는 박 양의 시신이 어떻게 나주 드들강에서 발견됐는지부터가 ‘미스터리’였다. 박 양은 사망 전날 휴대폰을 잃어버렸다. 사건 당일 새벽 3시 30분, 자신의 집 근처에서 박 양이 의문의 남성들과 함께 있던 장면을 목격한 A 군(17)은 그들의 얼굴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 수사는 난항을 거듭했다. DNA와 일치하는 용의자도 찾지 못했다.
10년 가까이 갈피를 못 잡던 수사가 2012년 뜻밖의 반전을 계기로 활력을 띠기 시작했다. 대검찰청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에 보관돼 있던 박 양의 몸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 그 장본인은 바로 강도·살인 등의 죄목으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현재 목포교도소에 복역 중인 김 아무개 씨(38). 김 씨는 금괴 판매를 미끼로 두 명의 남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암매장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당포 살인 사건’의 범인이었다.
박 양 사건을 수사 중인 나주경찰서 전경.
나주경찰서 강력팀 관계자는 “여자 질 속에 남자의 정액이 들어있다는 건 확실한 정황증거다. 피해자가 강간과 폭행을 당하고 죽었다”며 “그 피해자 몸속에서 발견된 정액 DNA를 가진 사람이 용의자 한 사람인데 그걸 범인이 아니라고 하면 이상하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김 씨가 박 양의 집 인근에 거주 중이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김 씨는 박 양의 집에서 불과 100m 떨어진 곳에서 자취를 했지만 주소지가 전남 장성의 형 집으로 돼 있어 경찰의 초기 수사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경찰이 용의자의 주소지를 나주 인근으로 특정했기 때문에 운 좋게도 경찰의 수사망을 비껴갔던 것. 경찰에 따르면 박 양과 김 씨는 평소 같은 오락실을 다녔다고 한다. 사건이 일어난 새벽 두 사람이 만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미다. 김 씨는 ‘전당포 살인 사건’에서도 피해자들을 살해하고 알몸 상태로 야산에 묻었다. 박 양을 살해한 용의자의 증거인멸 수법과 유사했다.
하지만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김 씨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성관계’와 ‘살해’의 연관 고리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불기소 처분의 결정적 이유였다. 김 씨는 경찰로부터 박 양의 몸에서 발견된 정액의 DNA가 자신의 것과 일치한다고 추궁당하자 박 양이 누군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그러던 김 씨는 검찰 조사에선 말을 바꿔 “박 양은 내가 성관계를 한 수많은 여자 중 한 명일 뿐”라며 “합의하에 성관계를 했지만 죽이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박 양의 몸 안에서 김 씨의 DNA가 나왔다고 해도 그것을 ‘강간 살인’의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놨다. 사건은 그렇게 ‘영구 미제’로 끝이 나는 듯했다.
그런데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었다. 지난 2월 나주경찰서에서 다시 한 번 칼을 빼들었다. 결국 사건을 맡은 나주서 강력팀은 새로운 증거를 찾았다.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박 양의 시신엔 사타구니 멍 자국과 허벅지 상처 외에도 폭행의 흔적이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또 사건 당일 새벽 1시 5분 박 양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인터넷 채팅(‘스카이 러브’)을 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드러났다.
젊은 남성들과 집 주변 PC방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시각이 이날 오전 3시 30분이었다. 그날 새벽 채팅으로 누군가를 만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경찰에 따르면 ‘스카이 러브’는 채팅 상대방이 기록에 남지 않는 사이트였다. 김 씨와 박 양의 만남을 증명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었다. 경찰은 박 양이 사망할 무렵, 김 씨가 이미 ‘스카이 러브’를 통해 5~6명의 여자들을 만난 적이 있다는 정황을 추가로 확인했다. 김 씨는 180㎝가 넘는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경찰은 김 씨의 외모에 대해 “아주 잘생겼다”며 “딱 봐도 여자들이 잘 따를 만한 스타일이다”고 설명했다.
김 씨의 당시 이성 교제 스타일로 봤을 때 김 씨가 박 양과도 그날 새벽 인터넷 채팅을 통해 즉석만남을 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사건 발생 당일 박 양의 휴대전화 통화 내역과 유선 전화 기록엔 김 씨의 이름이 없었다.
경찰은 “성관계를 했지만 살해하지 않았다”는 김 씨의 주장을 무력화할 만한 단서를 찾고 있다. 나주서 관계자는 “박 양이 사건 당시 생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박 양이 생리 중이었기 때문에 김 씨의 성관계 요구를 거부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이에 김 씨가 강간 살인을 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김 씨가 범행을 자백할 가능성은 없을까. <일요신문> 취재진과 만난 나주서의 한 간부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김 씨는 지금 모범수다. 아무리 무기수라도 가석방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게 이 간부의 전언이다.
김 씨는 두 명을 살해하고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마치 ‘수행’을 하듯 성실하게 수형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상황인 김 씨 입장에선 자신이 설사 박 양을 강간·살인했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밝혀지면 ‘가석방’ 희망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그로부터 자백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죽은 박 양의 몸에서 김 씨의 DNA가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김 씨 가족들도 두려워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김 씨는 변호사까지 선임해 경찰 수사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 씨는 심리학자들이 진술의 신빙성을 측정하는 수사기법인 ‘진술분석’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김 씨는 “만약 경찰이 (자신의 거짓말 탐지기 검사가) ‘거짓’이 아닌 ‘진실’로 나올 경우 수사를 중단한다는 각서를 써주지 않으면 검사에 응하지 않겠다”고 말하며 거짓말 탐지기 검사도 거부하고 있다. 김 씨가 수사 협조를 하지 않아 경찰들이 애를 먹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편 박 양의 유가족은 아직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박 양의 아버지는 사건에 대한 충격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경찰 관계자는 “성폭력 특별법 통과로 강간·살인에 대한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몇 번이라도 김 씨를 찾아가 (수사 협조를) 요청할 것”이라며 “피해자 친구들도 경찰을 꺼리고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범인을 잡을 것”이라고 사건 해결 의지를 내비쳤다.
전남 나주=최선재 기자 sun@ilyo.co.kr
장기 미제 살인사건 얼굴에 테이프가 칭칭…15년째 ‘오리무중’ ‘드들강 여고생 강간·살인 사건’뿐만이 아니다. 여전히 진행형인 장기 미제 살인 사건들이 많다. ‘나주 간호사 알몸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지난 2000년 8월 나주의 한 병원 간호사 A 씨(21)가 나주시 봉황면 만봉천에서 알몸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된 것. 15년이 흘렀지만 범인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2001년 9월 발생한 광주시 용봉동 여대생 테이프 살해사건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피해자 손 아무개 씨(여·22)는 사건 당일 가족들이 외출을 나간 뒤 홀로 집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날 오후 8시 30분께 집에 돌아온 피해자의 어머니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손 씨가 손이 뒤로 묶이고 하의가 완전히 벗겨진 채 얼굴 전체가 테이프로 감겨 밀봉돼 죽어 있었던 것. 지난 2010년 10월 발생한 목포 여대생 살해사건도 영구 미제다. 당시 목포 소재 한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B 씨(22)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언니에게 귀가한다는 문자 메시지를 남긴 뒤 실종됐다. 경찰은 이튿날 새벽 4시 30분께 목포시 상동의 한 병원 뒷길 배수로에서 숨진 B 씨를 발견했다. 소지품은 이미 오랜 시간 바닷물에 젖어 있었기에 감정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목격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