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 군기잡기 그만하시오
▲ 최근 이해찬 총리(사진)와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공공연히 갈등을 빚고 있다. | ||
지난달 30·31일 이틀 동안 전북 무주리조트에서 개최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중앙위원 워크숍’에 만난 한 중진 의원이 쏟아낸 말이다. 이는 이해찬 국무총리에 대한 불만어린 속내를 피력한 것이다.
최근 들어 상당수 열린우리당 의원과 이해찬 총리 사이에 미묘한 갈등 기류가 흐르고 있다. 올해 초부터 이 총리의 호남고속철도 조기 착공 불가 방침과 수도권 규제 지속 방침 등으로 여당 의원들의 불만이 누적되고 있다는 관측. 가뜩이나 이처럼 불안한 상황에서 지난 1일 이 총리는 지난달 당정간담회에 불참했던 의원 40여 명을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또다시 ‘호출’, 해당 의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5선인 이 총리를 향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지만, 여당 의원들의 불만이 갈수록 쌓이고 있다는 관측이다.
열린우리당 워크숍의 조별 분임토의에서 한 의원은 “당정협의를 당이 주도해야 한다. 항상 총리 공관에서 열리고 있는 것도 문제다. (당정협의) 형식과 내용을 당이 주도해나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당이 총리실에 끌려 다니고 있다는 지적과 반감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다.
가뜩이나 이 같은 불만이 내재된 상황에서 워크숍이 끝난 직후인 1일 이 총리는 지난달 당정간담회에 불참했던 40여 명의 의원을 총리공관으로 불러, 불만을 샀다. 총리는 지난달 다섯 차례에 걸쳐 여당 의원들을 불러 간담회를 가진 바 있다. 이 간담회에 불참했던 의원들을 재차 소집했던 것. 이에 일부 해당 의원들은 총리실에서 당정협의를 주도하는 것과 총리 개인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달과 지난 1일 총리실 호출에 불응했던 수도권의 한 의원은 “40~50명씩 모이는 간담회에 가봐야 단순히 밥밖에 더 먹느냐. 말이 간담회지 제대로 얘기할 기회도 없다”고 직설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호남지역의 한 초선 의원도 “선약이 있어서 (간담회에) 가지 않았다”면서도 “가 봐야 무슨 얘기를 하겠느냐”는 불만을 드러냈다. 이밖에도 “총리가 군기잡기를 하려는 것이냐” “출석체크하는 것이냐”는 등 못마땅하다는 발언이 쏟아졌다. 이 같은 흐름을 의식한 듯 향후 고위 당정협의는 국회와 총리공관에서 번갈아 열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에선 이 총리와 여당 의원 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을 올해 초로 보고 있다. 총리와 호남 의원들이 호남고속철도 조기 착공 문제로 갈등을 빚으면서부터라는 것. 이 총리는 지난 1월 연두순시 당시 “이해찬이 총리로 있는 한 (호남고속철도) 조기 착공은 못 한다”고 밝혔다. 총리는 경부고속철도와 마찬가지로 호남고속철도도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던 것.
하지만 여당 의원들이 중심이 돼서 반발했다. 여당의 광주지역 의원들은 “총리의 발언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며 지난 2월엔 여야 의원 2백5명이 호남고속철도 조기 착공을 정부에 촉구하면서 대정부 건의안을 제출했다. 여기에는 여당 의원 1백19명이 동참했다. 총리를 엄호해야 할 여당이 오히려 야당과 함께 총리를 향해 총대를 겨눈 모양새였다.
‘호남지역 열린우리당 의원 모임’의 간사를 맡고 있는 김동철 의원은 당시 “고속철도가 부분적으로 개통된 지 1년도 안된 시점에서 벌써 운영수지를 따진다는 것은 너무나 단견이 아닐 수 없다”는 불만을 토로했다. 김 의원은 3일 전화통화에서 “6월까지 고속철도 분기역이 결정될 것이고, 12월 말까지 기본계획이 수립될 것이다. 대통령도 정책조정회의에서 ‘(호남고속철도를) 경제성만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며 “총리가 더 이상 말할 단계가 아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총리의 조기 착공 불가 방침은 ‘공식적으로’ 유효한 상태. 이런 까닭에 호남 의원들의 불만도 가시질 않았다. 워크숍에서 만난 한 호남지역 의원은 ‘총리의 조기 착공 불가 방침’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총리가 (호남) 지역 정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불만을 토로하며 “이러다간 내년 지방선거 때 호남에선 여당이 완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여기에 경기지역 여당 의원들 역시 총리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표출하고 있다. 지난 5월 초부터 이 총리와 손학규 경기지사는 수도권 규제 정책을 놓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태다. 수도권정비법 대체법안의 내년 시행과 국내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 등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손 지사와 규제 고수 입장인 이 총리의 신경전은 급기야 감정싸움으로까지 번졌다.
이 총리는 지난달 20일 손 지사를 겨냥해 “정치적으로 말하면 나는 고수에 속한다. 손학규 지사는 ‘아래도 한참 아래’며 정치인으로나 행정가로 볼 때도 도리가 아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손 지사는 22일 “그 사람(이 총리)이 정치는 잘 할지 몰라도 행정이나 경제는 0점 아니냐”고 반박하는 회견을 가졌다.
그런데 여기서도 여당의 경기지역 의원들은 손 지사의 손을 들어주는 양상을 띠고 있다. 열린우리당 수도권발전대책특위 산하 경기발전위원회는 규제 위주인 현행 수도권정비법을 2008년까지 전면 개편키로 한 것. 더불어 2007년까지 경기 과천과 성남 등을 정비발전지구로 지정, 규제를 해소·완화키로 했다. 이 총리에 대한 불만이 투영된 셈이다.
경기지역의 한 의원은 “손 지사가 향후 대권 도전과 관련해서 정치적 이해타산도 고려했겠지만, 행정가로서의 손 지사 심정을 이해한다”며 “우리(경기지역 의원)도 지역구 사정을 고려하면 당장 규제가 완화되면 좋은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여당의 핵심 인사는 “여당 의원들이 대다수 초재선 의원인 까닭에 5선인 이 총리에게 쉽게 대들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점점 의원들의 불만이 늘고 있고, 총리는 거침없는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어 향후 잦은 마찰이 빚어지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