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인정 못 받지만 한국은 그리운 내 조국”
고려인문화센터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는 여성 3인방. 왼쪽부터 김 옥사나 씨, 김 발레리아 선생, 조 엘레나 교육부장.
기존의 유치원 건물을 사들여, 약 5년간의 건설 과정을 거쳐 2009년 본격적으로 문을 연 고려인문화센터에는 고려인 이주사를 한 눈에 살필 수 있는 박물관과 도서관은 물론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한국어, 전통춤, 사물놀이 강의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밖에도 센터에는 한국 식당과 한국식 카페가 들어서 있어, 한국인 여행객들과 고려인들은 물론 한국 문화와 음식을 체험하고 싶은 현지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었다.
러시아는 그 어느 나라보다 여권이 높기로 유명하다. 이곳 센터 역시 고려인 ‘여성 3인방’이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었다. 취재진은 이곳에서 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 발레리아 선생(56), 조 엘레나 교육부장(52), 김 선생의 외동딸로 이번 우수리스크 여정에서 길라잡이를 자처한 김 옥사나 씨(26)가 그 주인공이다.
세 사람 모두 다른 고려인들과 달리 한국말이 능통했다. 모두 조국에 대한 관심 때문에 개인적인 노력으로 일궈온 결실이었다. 특히 부모님의 권유로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김 옥사나 씨는 이국적인 외모만 아니면, 한국인이라 믿을 정도로 유창한 우리말 실력을 자랑했다.
‘3인방’과 마주하자 먼저 현재 러시아 사회에서 고려인의 사회적 지위와 위치가 궁금했다. 앞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해들은 신한촌 기념탑 낙서 테러가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최근까지 학교를 다녔던 김 옥사나 씨는 “심하진 않지만, 러시아 학교에선 고려인 아이들과 러시아 아이들(슬라브계)을 비교한다”라며 “고려인 학생들은 월등히 뛰어나지 않으면,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 고려인 학생들은 더욱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고려인문화센터 입구.
이 때문에 고려인들의 교육열은 뜨겁다. 조 엘레나 선생은 “당연히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쓸 수밖에 없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지면 안 되지 않나”라며 “그래서 최근에는 이러한 교육열을 바탕으로 이곳 사회의 법조계, 의료계, 정치계 등 유수한 인재가 배출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가장 큰 병원의 수석도 세브란스 연수생 출신의 고려인 의사다”라고 덧붙였다.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이곳 고려인들의 노력도 대단하다. 김 옥사나 씨는 “이렇게 시내 한 가운데에서 큰 문화센터를 운영하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다른 민족들이 대단하게 생각하고 부러워하는 부분”이라며 “비록 말은 많이 잊었지만, 고려인 어느 집이나 지금까지도 전통 방식을 고수하며 차례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통 혼례나 돌잔치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우리의 돌잔치 문화를 러시아 현지인들이 받아들여 하고 있을 정도”라고 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 탓에 불거지는 미묘한 문제도 있다. 고려인센터도 마찬가지. 조 엘레나 부장은 “남북과 북러 관계가 좋았을 때는 우리 센터의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넘어가 전통춤을 배워오기도 했고 태양절(김일성 생일)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라며 “하지만 최근 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북한과의 이러한 관계가 단절됐다. 또 최근에 우리 센터에 북한 태권도 시범단이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왜 센터에 태극기밖에 없느냐’고 불만을 표한 적도 있다. 이 때문에 북한 분들은 최근 우리 센터에 오시기 불편해 하시더라”라고 지적했다.
물론 한국 사회와 정부에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음악을 전공하며 오랫동안 한국 유학생활을 한 김 옥사나 씨는 “나에겐 선택권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도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고, 한국에서도 기회가 있었다”며 “당연히 한국을 택했다. 첫 해에는 좋았다. 그런데 시간이 가면서 깨달았다. ‘난 한국에 살아도, 아무리 한국어를 잘해도 한국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구나.’ 불편한 점이 있더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현지 고려인들의 마음엔 ‘조국’이 있다. 조 엘레나 부장의 말이다.
“연해주에만 158개 민족이 살고 있다. 러시아 사회에서도 우리를 두고 ‘러시아인’이라고 안 부른다. 우린 여기서 ‘까레이츠’로 여전히 불린다. 한국이 잘 되면 우리도 정말 기분이 좋다. 한국의 발전은 우리에게 있어선 여전히 자랑거리다. 우리 마음이 그렇다.”
러시아 우수리스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