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문’ 아닌 ‘정문’ 열고 4월 참변에 맞서다
최재형 독립운동가
다음날인 5일 취재진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로 알려진 최재형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최재형 선생은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국경을 넘은 것은 9세 때 일이다. 당시 경원 땅의 극심한 가뭄 탓이 컸다. 최 선생 일가는 취재진이 거쳐 왔던 크라스키노 인근 한인 정착촌 ‘지신허’에 터를 잡았다.
11세 때 집을 나온 최 선생은 이후 선원 생활을 통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17세 때부터 이러한 경험으로 사업을 시작한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연해주 조선인들의 대부로 성장했다. 당시 최 선생은 연해주 현지에서도 러시아어에 능통한 거의 유일한 조선인이었고, 이러한 배경 덕에 러시아 정부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어찌 보면, 최재형 선생은 ‘조선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주자였다. 아니, 마지막엔 자신의 목숨까지 내놨으니 그 이상이라 하겠다. 상해임시정부 설립에 재정적 지원을 했던 이가 그였고, 이러한 이유로 임시정부에선 그를 초대 재정장관으로 임명했다. 최 선생은 여러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했다.
1905년 일제와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최 선생은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종의 명으로 간도관리사로 임명된 이범윤 선생과 ‘동의회’라는 의병조직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이 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선두에 섰다. 그런가하면, <대동공보>라는 민족 신문을 인수해 강도 높게 일제를 비판하면서 지적 투쟁에도 동참했다.
특히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와 선생의 관계는 각별했다. 안중근 의사의 의병활동은 이곳 최재형 선생의 동의회를 통해 전개됐으며 두 사람의 자녀는 당시에도 형제처럼 지낼 만큼 가까운 사이었다. 이토의 저격 역시 최 선생의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 선생의 재판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변호사를 선임하며 감형을 꾀했던 이도 최재형 선생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용감무쌍한 활동과 숭고한 희생의 버팀목이 최재형 선생이었던 셈이다.
아우 안중근을 먼저 떠나보낸 최 선생도 결국엔 그 길을 따르게 된다. 1920년 4월 참변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 해 일본은 시베리아 원정을 위해 연해주에 군대를 총집결시켰고, 이에 항거해 최재형 선생이 이끌던 우리 의병들과 소비에트 적군들은 시가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최 선생은 일제에 체포돼 며칠 만에 희생됐다.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고택 외관. 최재형 선생이 일본군에 체포됐을 당시 그의 막내딸이 뒷문으로 피신할 것을 강권했지만 그는 정문으로 직접 죽음을 맞으러 나갔다.
취재진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최 선생이 4월 참변 당시 마지막까지 기거했던 고택이었다. 보로다르스코 38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현재 고려인 문화센터가 사들여 현지서 잘 관리되고 있었다. 슬레이트 지붕아래 나름대로 멋이 깃든 두터운 회색건물이었다. 건물 한 쪽엔 한-러 정부가 공동으로 설치한 은색 현판이 눈에 띄었다. 마당에 들어서니 언제 누가 심어놨는지 모르는 덩굴나무가 제법 멋스럽게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취재진은 센터장인 김 발레리아 선생의 안내에 따라 집 내부도 살펴볼 수 있었다.
고택 내에서 본 정문(위)과 4월 참변 추도비.
커다란 방을 사이에 두고 나무로 된 정문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문은 ‘죽음의 문’이었다. 4월 참변 당시 가족들과 함께 일본군에 둘러싸인 최재형 선생은 그 문을 몸소 열고 걸어 나갔다. 집을 안내한 김 발레리아 선생에 따르면, 당시 최 선생의 막내딸은 체포되면 곧 죽는다는 것이 확실한 상황이라 아버지께 뒷문으로 도망갈 것을 강하게 권했다. 아니, 애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재형 선생의 입장은 단호했다. 만약 뒷문으로 도망간다면, 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모진 고문에 시달릴 것이 분명했다. 최 선생은 막내딸의 거듭된 권유에도 불구하고 결국 정문을 나섰다. 삶이 보장되는 뒷문과 최 선생이 직접 죽음을 맞으러 나갔던 정문 사이에 기자가 섰다. 이 복도 한 가운데에서 최 선생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
최 선생이 체포된 마지막 고택 근처엔 이전에 머물던 또 다른 집이 있다. 수하노바 32번지에 위치한 두 번째 고택. 한동안 풍문으로 돌았던 최 선생의 두 번째 고택은 김 발레리아 선생이 수소문을 한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단서는 마지막 고택과 동일한 처마 밑 문양. 첫 번째 고택에 비해 약간 작은 이 두 번째 고택 처마 문양은 앞서의 것과 비슷했다.
김 선생의 안내에 따라 취재진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집 근처에 위치한 중앙공원이었다. 당시 이곳은 러시아 장교들이 주로 이용했다 하여, ‘장교공원’으로 불렸다. 중앙공원에는 지금도 많은 현지인들이 가족 단위로 망중한을 즐기고 있었다. 그 역사만큼이나 수령 많은 나무들이 인상 깊게 다가왔다.
최재형 선생의 두 번째 고택 인근에 위치한 중앙공원. 이 공원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기 전 훈련을 하던 장소다.
이 공원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저격하기 전, 훈련을 하던 장소였다. 최 선생의 집과 불과 2분 거리에 위치한 이 장소에서 최 선생의 지도 아래 안중근 의사가 사격 훈련에 매진했다. 1909년의 일이다. 단지까지 한 비장한 청년 안중근이 마지막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거사를 준비했던 역사적 장소인 셈이다.
최재형 선생은 체포된 지 며칠 만에 일제에 의해 총살됐다. 하지만 최 선생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그가 어디에서 처형됐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최근에서야 일본의 한 학자에 의해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됐다. 당시 연해주에 파병 온 한 일본인 병사가 남긴 일기장이 그것이었다.
보인다. 아래 사진은 최 선생의 처형 장소로 추정되는 교도소 뒷산.
그런데 답은 쉽게 나왔다. 당시 이 작업을 함께했던 김 발레리아 선생은 “현재도 사용되고 있는 우수리스크 교도소는 단층이 아닌 복층 건물이었다. 당시 병사가 묘사하던 그 건물이 아니었다”라며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 교도소 건물의 1층과 2층의 색깔이 확연하게 다른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애초 단층이었던 교도소 건물에 소련 정부가 한참 뒤에야 수용인원 확보를 위해 한 층을 더 증축했던 것이다. 실제 그 건물 뒤에 일본인 병사가 묘사한 야트막한 뒷산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취재진은 직접 그 장소를 찾았다. 실제 일본인 병사가 묘사한 그대로였다. 김 발레리아 선생은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보면 이 장소가 최재형 선생이 처형을 당한 곳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이 장소가 발견된 지 얼마 안 된 지난해, 최 선생의 손자는 이곳을 찾아 직접 술을 올려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렸다. 당시 유족들은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결국 대성통곡을 하고 내려갔다고 한다.
<일요신문>은 최재형 선생을 비롯해 일제의 만행으로 희생당한 우리 조상들과 당시 러시아인들을 기리는 4월 참변 추도비를 마지막으로 찾았다. 추도비는 당시 일제에 의해 실제 습격당한 러시아 부대 앞에 위치해 있었다. 취재진은 추도비 앞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현재, 그 희생에 대한 기억은 분명 우리의 몫이다.
러시아 우수리스크=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