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연기’ 겪었기에 배불리 사랑 받나봐요”
▲ ‘왕’에서 ‘내시’로 신분이 하락(?)했음에도 그의 카리스마는 단연 왕을 압도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왕과 내시는 9세기 신라 흥덕왕 때부터 1894년 갑오개혁까지 함께 해 왔다. 내시는 양물(남성 생식기)을 왕에게 바쳐 충성을 맹세했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의 암투 속에서 왕을 보필했다. 왕의 최측근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한 세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내시를 똑바로 보는 이는 없었다. 오랫동안 ‘내시=간사함’이라는 고정관념이 지속돼 왔고 이를 깰 수 있는 이는 없는 듯 보였다. 전광렬은 여기에 초점을 맞췄다. 권력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상처 입으면 아프다고 하는 사람, 그는 ‘새로운 내시’를 선택했고 완성해가고 있다.
물론 전광렬도 처음에는 내시 역할을 선뜻 선택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간 카리스마 넘치는 왕 역할을 맡아왔던 그가 내시라니 당황스러울 만하다. 그가 내시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의 반응도 “시트콤 찍냐?”였다. 그러나 전광렬은 “진짜 내시를 보여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대본을 손에 쥐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드라마 2회가 끝나자마자 내시에 대한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와르르 무너졌다.
“전 역할을 선택할 때 극중 인물의 위치라든지 비중에 염두를 둡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시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아내도 뭐라고 말하지 않더군요(웃음).”
자신의 소신을 믿었기 때문일까. 전광렬은 내시라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카리스마 넘치는 판내시부사 조치겸을 그려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시청자들의 찬사가 끊임없이 쏟아졌다. 얼마 전에는 실감나는 연기를 위해 무술 감독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연습하는 모습이 공개돼 사람들의 갈채를 받기도 했다.
“부채신공이라는 무술을 익히기에는 많은 부분이 부족했습니다. 틈틈이 연습하려다 보니까 핸드폰 동영상으로 녹화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역할에 몰입하고 있는 전광렬. TV를 통해 보이는 완벽한 조치겸은 그의 보이지 않는 노력 끝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전광렬의 열연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왕과나>는 초반 30%에 육박했던 시청률이 10%대로 주저앉았고 캐스팅 논란부터 쪽대본 문제까지 끊임없이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자꾸 미뤄지는 촬영에 노련한 연기자로 살아온 전광렬도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다. 하지만 전광렬은 “지켜봐 달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다소 풀 죽어 있는 후배들에게 연기자는 작품이 얼마나 흥행을 하느냐가 아닌 어떤 연기를 선보이느냐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미스 캐스팅 부분은 사실 아역 연기자들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분이 자주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는데 전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에 있어서는 나무랄 데 없는 후배들이거든요. 후배들에게도 항상 연기자라는 마인드를 가지라고 얘기하고 극중 인물에 대해 지금보다 더 분석하고 연구하라는 말을 많이 해주죠.”
그는 시청률은 연기자를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고 못 박았다. 현 시점에서 시청률이 연기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연기자들은 스스로가 얼마만큼 작품에 충실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광렬은 후배 연기자들의 ‘연기 선생님’답게 “연기에만 몰두하라”며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엄격한 선생님을 가장(?)한 자상한 선배였다. 전광렬은 침울해 있는 후배들을 위해 촬영장에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며 즐겁게 연기하고 있었다.
“<이산>은 훌륭한 작품입니다. 보면 볼수록 저에게 늘 긴장감을 갖게 합니다. <왕과나>가 비록 <이산>의 시청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현장에서는 후배 연기자들의 긴장을 풀어주고 스스로 부담감을 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제가 나서서 분위기를 띄우려고 하는 편이에요.”
그가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한 이유는 후배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기도 하다. <왕과나>의 주인공은 김처선(오만석 분)이지만 조치겸의 카리스마에 가려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드라마는 조치겸을 위한, 조치겸에 의한 드라마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광렬의 연기가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광렬은 “역할의 차이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조치겸은 극중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어요. 허구적인 인물이다 보니 연기자에 따라 이미지가 만들어져서이기도 하죠. 비중도 그렇고 주인공 같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밖에 없는 인물일 뿐입니다. 다른 연기자들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지켜봐주세요.”
▲ 사극 <왕과나>에서 판내시부사 역으로 명품연기를 펼치고 있는 전광렬. 사진제공=SBS | ||
“연기가 아니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늘 했습니다. 배고파도, 힘들어도 (연기를)버릴 수 없었던 건 이 때문인 것 같아요. 연기는 곧 저의 삶이자 낙입니다.(웃음)”
전광렬은 연기자로서의 삶에 대해 찬사를 늘어놓거나 무한한 애정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담담하게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끔은 힘들고 눈물 나게 슬프다가도, 가끔은 재미있고 즐겁게 말이다. 물론 전광렬은 앞으로의 고삐도 늦추지 않는다고 했다. 만족하면 멈춘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것. 실제로 전광렬은 자신의 연기를 끊임없이 모니터하며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전 아무리 바빠도 드라마 게시판에 올라오는 의견을 빼놓지 않고 봅니다. 악플이요? 그거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단지 제 연기에 대한 시청자들의 판단을 보고 싶은 거죠. 시청자들의 평가를 발판으로 삼고 절 뒤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무엇보다 전광렬 뒤에는 ‘가족’이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버티고 있다. 전광렬은 아내 박수진 씨(베스트셀러 <리얼 런던>의 저자)와 슬하에 1남을 두고 있다. 얼마 전 어느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결혼 13년차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닭살 커플의 면모를 과시하며 주위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전광렬에게 가장 힘들 때 도와준 사람을 묻자 역시 “가족”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장 힘들 때 힘이 돼주는 건 아무래도 가족이 아닐까 합니다. 늘 곁에서 말없이 지켜봐주고 응원해주는, 제 원동력이죠. 가족 덕분에 제가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가족의 응원에 힘입어 전광렬은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비단 연기자뿐 아니라 사업가로서도 탁월한 기질을 보이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 10월 삼성동에 600여 평의 대형 사우나를 개점한데 이어 내년에는 평소 와인 감별 능력이 뛰어난 특기를 살려 와인 브랜드를 출시할 예정. 전광렬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바삐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전 스스로를 20~30대라고 생각해요. 그 힘이요. 음…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 것과 연기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닐까요.”
내시든 왕이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색을 입혀 ‘전광렬표 작품’을 만들어내는 연기자 전광렬. 연기를 향한 못 말리는 열정과 늘 노력하는 자세로 앞으로도 한국 드라마를 빛내주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홍재현 객원기자 hong927@ilyo.co.kr